할머니가 일러주신 사도세자의 뒷담화
[수원 화성 답사기]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 남길 수 있는 역사의 현장
우리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틀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직접 일러주신 사도세자의 뒷담화
잘못한 건 사실이었다. 남의 재물을 함부로 취득했으니 절도죄요. 처벌이 두려워 절도죄를 숨기며 부모님께 거짓말을 늘어놓고 허위진술을 하는 건 아무리 따져봐도 잘 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조그만 녀석들이 일찌감치 이런 버릇에 길들여지면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 이런 버릇은 그 회수가 몇 번 되지않는다 해도 아버지는 중죄 다스리듯 한 것이다. 오죽하면 어떤 대통령의 어머니는 상습적인 거짓말쟁이 아들을 불러놓고 가훈이 '정직'이라고 가르칠 정도였겠는가. 그는 내일 모레면 나이가 여든에 가까웠지만 여전히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으니, 어쩌면 무 서리 몇 개 보다 복숭아 참외 서리 몇 개 보다 아버지께선 거짓말을 늘어놓는 허위진술(웃자고 하는 소리다)을 더 크게 다스린 것 같다.
우리는 어느새 이구동성으로 할머니께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깥 툇마루에서 손자들의 안녕을 빌며 이제나 저제나 자유를 되찾기를 바란 할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원성도 높아갔다.
"아(아이) 애비야! 니 새끼 참말로 죽일참이가...그만 두지않고..."
"허 참 엄니는 좀 가만히 계시소. 내 새끼 왜 죽입니꺼...허 참..."
할머니는 더 못참겠다는 듯이 안 방 문을 확 열고 우리를 향해 다급하게 말씀하셨다.
"이눔들아 뭐 하고 있노...어서...싸게 도망가지 않고..."
우리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틀리지 않았다.
아직 여든의 나이는 안 됐다. 그러나 서너 살 때 부터 머리 속으로 자리잡은 기억들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된다. 세 살 때 바늘이라도 훔친 기억이 있다면 지금쯤 미디어를 심심찮게 오르내릴 게 분명하다. 소를 훔친 게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대도가 되어 나라를 떠들썩 하게 만들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버릇은 조금씩 조금씩 증폭된다는 말이 우리 속담에 남아있어 '바늘 도둑 소 도둑 된다'는 속담을 남기고 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최소한 서너 살 때부터 머리 속에 좋은 기억이 남아있다면 그 기억은 죽을 때까지 가슴 속에서 모락모락 자라 자기는 물론 이웃에게 유익을 끼칠 게 분명하다.
동장대(연무대)에서 동북공심돈으로 이동하면서 바라 본 동북노대와 수원성의 모습. 성곽 너머 감을 주렁주렁 매단 감나무가 정겹다.
한 며칠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수원 화성을 1박 2일로 다녀오면서 정조대왕과 비운의 사도세자 뒷담화 등을 끄적이고 있다. 우리 선조님들에 대한 기록들이자 회상을 통해 다시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이다. 그 과거 속에는 몸서리칠 정도의 아픈 기억을 가진 한 임금이 있었다. 그가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이셩李祘-일반적으로 '이산'이라고도 부르지만 옳은 발음이 아니며, 祘은 '밝게 살핀다'는 뜻이다. 왕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임금이다.
동장대(연무대)에서 동북공심돈으로 이동하면서 성벽 사이로 바라 본 동북공심돈
일반에 널리 알려진 사실 처럼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27살의 젊은 나이에 (쌀)뒤주에 갇힌 채 숨졌다. 그냥 뒤주에 갇혀 숨진 게 아니라 옴짝달싹도 하지못하는 좁은 공간에서 똥오줌 조차 못가린 채 8일 동안 버티다가 숨진 것이다. 실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1762년 윤5월 13일부터 21일까지 뒤주에 갇혀있다가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략 날짜를 계산해 보면 한여름 날씨나 다름없는 무더운 날씨에 땀까지 뒤범벅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처참한 상황의 사도세자의 죽음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 영조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동북공심돈에 다다라 내려단 본 수원성의 동장대(연무대)와 수원성의 아름다운 곡선미
사람들은 당시 노론 벽파와 소론 시파 등의 정쟁에 휘말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 속에 가두어 놓고 물 한모금 주지않고 탈진해 죽는 것을 보고 있었다면, 과연 아버지 영조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가슴에는 어떤 기억이 남게될까. 아마도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한 정조임금은 평생을 통해 가슴 속에 응어리진 아픔을 풀어내지 못했을 것 같다.
동북공심돈에서 내려단 본 동북노대와 성곽. 뒤로 보이는 도시의 모습이 이채롭다.
지난 3일과 4일 이틀동안 수원 화성의 성곽을 돌아보면서 이런 생각은 투어가 끝날 때까지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정조임금의 가슴속에 과거의 트라우마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 처럼 글쓴이 한테는 사도세자에 얽힌 뒷담화가 새록새록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억들은 최소한 50년도 더 된 오래전의 기억들이며, 취학 전부터 취학 이후까지 이어진 기억들이자 '소셜투어'가 행해진 지 며칠 전까지 기억 속에서 되살아 날 정도였다. 정말 지독한 기억력이자 행복한 추억이기도 했는 데 그 추억을 되살려 준 게 정조임금이 만들어 놓은 수원 화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기억 속에서 꿈틀거린 사도세자에 얽힌 뒷담화는 어떤 모습일까.
동북공심돈에서 내려단 본 동장대(연무대)와 수원성곽, 멀리 팔달산의 서노대가 보인다.
할머니가 직접 일러주신 사도세자의 뒷담화
글쓴이 집안은 어릴 적 3대가 함께 살고있었다. 친조모님 한 분과 부모님 그리고 칠남매가 한 지붕 아래에서 살고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아들 딸 둘도 많아 하나만 키우는 가정이 흔하지만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이런 풍경은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아직 농경사회의 티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같다. 따라서 비록 방은 여러 칸을 사용하긴 했지만 칠남매를 키운 어머니께서는 등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아니 등이 휘청거릴 정도가 아니라 나중에는 등이 휠 정도였는 데 칠남매 중에 유독 나와 동생들이 속을 썩였다.
동북공심돈에서 바라 본 창룡문,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따지고 보면 큰 사고를 친 것도 아니었다. 당시 유행(?)했던 무 서리나 과일 서리에 친구들과 동참했다가 된서리를 맞는 것 등이었다. 특히 죄사함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사실 확인을 거쳐 엄중히 중죄(?)로 다스림을 받았다. 어른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가지 많은 나무 바람잘 날 없다'라며 자조하시곤 했다. 그런데 어른들로부터 이런 자조감이 나올 때까지 꽤 복잡한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원 화성의 작은 명물 '화성열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바라본 장안문, 벽돌로 축조한 특이한 건축물이다.
칠남매중 어느 한 사람이 사고(?)를 치면 단체로 기합을 받거나 회초리를 맞았다. 누군가 사고를 친 날이면 마치 군대생활 같은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사고 소식이 아버지께 보고되면 그날 저녁은 찬바람이 부는 듯 했다. 안방에 모여선 우리는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자마자 무서워 벌벌 떨었다. 아버지의 엄명은 매우 짧았다.
"큰놈!...회초리 해 왓!..."
"큰놈!...회초리 해 왓!..."
나 위로 맏이이신 누님 한 분과 큰 형님과 작은 형님 두 분이 계시고, 아래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하나가 있었지만, 나이 차이로 인해 막내와 여동생은 회초리를 맞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나와 동생 때문에 괜히 형과 누나가 피해를 입게되는 일이 잦은 것이다. 그게 더 무서웠다. 형과 누나는 말 그대로 부모님을 대신하는 '하늘'과 다름없었다. 징계가 끝나고 나면 엄청난 압력이 행사되곤 했기 때문이다.
화성열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바라 본 수원 화성의 성벽 축조물, 장인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리고 형님이 바깥에서 적당한 크기의 회초리를 구해오면, 우리는 미처 징벌을 당하기도 전에 '으앙 잘못했어요'라며 똥파리 두 손 비비듯 싹싹 비벼댓다. 그렇다고 즉시 죄사함이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종아리에 회초리 자국이 선명하게 나야 악몽같은 시간이 끝나는 것이다. 표현을 악몽이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니었다. 회초리로 종아리 몇 대 맞는다고 그게 악몽인가.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 시작됐다. 이런 상황을 바깥에서 지켜보고 엿 듣고 있었던 할머니께서 아버지를 향해 난리를 치시는 것이다.
"아(아이) 애비야! 니 새끼 죽일참이가...그만 두지않고...아(아이)들이 멀(무엇을) 잘못했다고..."
"아(아이) 애비야! 니 새끼 죽일참이가...그만 두지않고...아(아이)들이 멀(무엇을) 잘못했다고..."
화성열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바라 본 수원 화성의 북서포루, 참 특이한 건축물이다.
우리에게 할머니는 피난처이자 구세주
잘못한 건 사실이었다. 남의 재물을 함부로 취득했으니 절도죄요. 처벌이 두려워 절도죄를 숨기며 부모님께 거짓말을 늘어놓고 허위진술을 하는 건 아무리 따져봐도 잘 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조그만 녀석들이 일찌감치 이런 버릇에 길들여지면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 이런 버릇은 그 회수가 몇 번 되지않는다 해도 아버지는 중죄 다스리듯 한 것이다. 오죽하면 어떤 대통령의 어머니는 상습적인 거짓말쟁이 아들을 불러놓고 가훈이 '정직'이라고 가르칠 정도였겠는가. 그는 내일 모레면 나이가 여든에 가까웠지만 여전히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으니, 어쩌면 무 서리 몇 개 보다 복숭아 참외 서리 몇 개 보다 아버지께선 거짓말을 늘어놓는 허위진술(웃자고 하는 소리다)을 더 크게 다스린 것 같다.
화성열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바라 본 수원 화성의 북포루
하지만 안 방 취조실(?)에서 고문 당하듯 회초리 몇 대에 고성을 질러대던 우리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너무도 반가웠다. 우리가 구속에서 한시라도 빨리 해방될 수 있는 자유의 목소리이자 구세주와 같은 복음이 문 밖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더 큰 소리로 할머니의 구명운동에 화답했다.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며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파!...너무 아파요. 잘못했어요. 아부지 담부터 안 그럴 게요. 할머니...(뭐 하세요)"
"아파!...너무 아파요. 잘못했어요. 아부지 담부터 안 그럴 게요. 할머니...(뭐 하세요)"
화성열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바라 본 수원 화성의 보물이자 백미인 서북공심돈과 화서문(성곽 너머로 보이는 지붕), 한 아이가 손을 흔든다.
우리는 어느새 이구동성으로 할머니께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깥 툇마루에서 손자들의 안녕을 빌며 이제나 저제나 자유를 되찾기를 바란 할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원성도 높아갔다.
"아(아이) 애비야! 니 새끼 참말로 죽일참이가...그만 두지않고..."
"허 참 엄니는 좀 가만히 계시소. 내 새끼 왜 죽입니꺼...허 참..."
할머니는 더 못참겠다는 듯이 안 방 문을 확 열고 우리를 향해 다급하게 말씀하셨다.
"이눔들아 뭐 하고 있노...어서...싸게 도망가지 않고..."
수원 화성의 보물이자 백미인 서북공심돈의 독특한 건축물, 뒤로 방금 지나친 북포루가 보인다.
우리는 이때다 싶어 할머니께서 열어두신 비상구를 향해 엉엉 울며 냅다 뛰었다. 얼마나 급했으면 고무신을 신을 시간도 없이 튀었다. 그리고 동구밖에서 서성이면 할머니나 어머니께서 신발을 가져다 주셨다. 이런 상황이 그나마 한 여름이면 나았다. 그러나 무서리가 시작된 가을이 지나면 시쳇말로 죽을 맛이었다. 할머니의 도움으로 피신은 했지만 아버지의 노여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으셨는 지. 어머니와 할머니께서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시느라 괜히 왔다 갔다 하셨다.
"어이구 가엾은 우리 강쥐들..."
"어이구 가엾은 우리 강쥐들..."
수원 화성의 백미 서북공심돈 앞으로 화성열차가 지나간다.
할머니 기억 속의 사도세자와 정조임금이 꿈꾼 나라
할머니는 종아리를 살피셨다. 그때 나(또는 우리)는 뒷마당 굴뚝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숨죽이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굴뚝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당시에는 왜 그렇게 서러웠던 지.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꼴이자 어른들의 가슴을 핥키는 철부지 행위였다. 그 충격이 크든 적든 자기 새끼를 향해 매를 든 애비의 심정은 그로부터 수 십년이 더 지나서야 알게 됐고, 어미의 심정까지 헤아리는 데까지 수 많은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거의 습관처럼 말씀하시던 '사도세자에 얽힌 뒷담화'도 이때 쯤 나의 귀에 쏙 들어오게 됐다. 할머니께선 우리를 구출(?)해 내시면서 사도세자 뒷담화를 했던 것이다.
"애비야 니도 사도세자 처럼 니 새끼 쥑일 참이가. 그런 나뿐놈의 애비가 세상천지에 어디있노...지 새끼 쌀뒤주에 가다(가두어)놓고 쥑이는..."
화성열차를 타고 본 수원 화성의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할머니께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한 말씀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과장된 이야기가 틀림없었다. 아무렴 아버지께서 우리를 죽이기 위해(?) 작고 가는 회초리를 드셨겠는가. 그러나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할머니의 말씀 속에는 세상에 파다한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이 트라우마 처럼 도사리고 앉아 아버지를 향한 원성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땐 몰랐다. 사도세자가 누구인 지 사도세자의 애비가 누구인 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와 부모님 전부 하늘나라에 계신 지금, 당신이 하셨던 역할을 대신 맡고있다 보니 사도세자의 마음이나 당신의 아들 정조임금의 마음 모두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더군다나 할머니께선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임금이 태어났던 해(1875년) 보다 불과 13년 후에 태어나셨고, 할머니의 친정은 옛 소사 지역(현재 부천시 일원)이었으므로, 당시 한양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 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할머니가 알고 계신 건 정사가 아니라 야사였을 것이나, 보통의 백성들이 느끼는 사도세자에 대한 평은 노론과 소론 등 피비린내 나는 정쟁이 배재된 인간적인 면이 크게 부각된 모습이었다.
이를 테면 할머니께선 마지막 조선시대 사람이자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한 증인이었다. 누가 뭐래도 애비가 아들을 죽이는 일은 패륜이자 입장이 뒤바뀐다 할지라도 동일한 패륜이었으므로, 동시에 삼강오륜(三綱五倫) 등 유교사상을 밥 먹 듯 가르치신 부친께서 새끼들을 엄하게 다스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수원 화성의 성곽을 일행들과 천천히 돌아보면서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은 물론 부모님 생각이 간절했다.
더군다나 할머니께선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임금이 태어났던 해(1875년) 보다 불과 13년 후에 태어나셨고, 할머니의 친정은 옛 소사 지역(현재 부천시 일원)이었으므로, 당시 한양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 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할머니가 알고 계신 건 정사가 아니라 야사였을 것이나, 보통의 백성들이 느끼는 사도세자에 대한 평은 노론과 소론 등 피비린내 나는 정쟁이 배재된 인간적인 면이 크게 부각된 모습이었다.
이를 테면 할머니께선 마지막 조선시대 사람이자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한 증인이었다. 누가 뭐래도 애비가 아들을 죽이는 일은 패륜이자 입장이 뒤바뀐다 할지라도 동일한 패륜이었으므로, 동시에 삼강오륜(三綱五倫) 등 유교사상을 밥 먹 듯 가르치신 부친께서 새끼들을 엄하게 다스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수원 화성의 성곽을 일행들과 천천히 돌아보면서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은 물론 부모님 생각이 간절했다.
화성열차에서 본 소풍 나온 어린 학생들, 선생님은 무슨 이야기를 전해주셨을까.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정조임금은 할아버지로부터 행해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했으니 그 마음은 또 어떠했겠는가. 따라서 정조임금은 즉위 직후 노론 벽파의 눈치를 살피며 정약용 등과 함께 수원 화성 축조에 들어갔다. 당파싸움(정쟁)으로 어지럽던 한양을 떠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있던 수원땅으로 새로운 도시(수원 화성)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그곳에 정조임금의 친위부대 장영용까지 창설해 군사력까지 확보해 둔 것을 참조하면, 수원 화성은 당신의 피신처이자 탈출구였으며 아버지 사도세자가 꿈꾸던 나라. 사람들끼리 반목하지 않고 정쟁으로 갈등하지 않으며, 정치 때문에 희생되는 사람이 없고, 장차 사람들이 늘 꿈꾸는 그런 평화로운 세상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런지 동북공심돈(東北空心頓墩)에서 살펴본 수원 화성의 성곽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서두에 서너 살 때부터 머리 속에 좋은 기억이 남아있다면 그 기억은 죽을 때까지 가슴 속에서 모락모락 자라 자기는 물론 이웃에게 유익을 끼칠 게 분명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정조임금은 어린 시절부터 몸서리칠 정도로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이웃(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임금은 보통사람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당신께서 이웃(사람)을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없었던들 오늘날 수원 화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계속>
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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