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두 남녀의 몸을 가리고 있는 건 옷이 아니라 울긋불긋 스팩트럼을 통과한 오방색(五方色) 하늘빛물감이다. 두 남녀의 나신을 가리고있는 건 겨우 속옷이 전부이며 이들이 가린 속옷은 그나마 세상 사람들을 위한 작은 배려로 보인다. 이들 두 사람은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창동예술촌 아트센터 앞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서 '바디페인팅 퍼포먼스'를 선 보였던 사람들이다. 열연이었다. 그리고 바디페인팅 퍼포먼스가 끝나자 창동네거리를 지나 오동동으로 발길을 돌리는 모습이 용케도 글쓴이의 카메라에 다시 포착된 것이다. 그들은 마치 도시 속으로 사라진 '아담과 이브'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렇다면 두사람이 조금 전에 펼친 바디페인팅 퍼포먼스의 컨셉도 바이블의 창세기 기록이 모티브가 된 것일까.
낮이면 벌겋게 드러난 도시의 한 골목. 그곳은 한 때 사람들이 어께가 부딪칠 정도로 번창한 곳이었지만 상권이 창원시로 이동하면서 원도심은 점차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곳은 '창동'이라고 불리는 옛 마산의 중심지였다. 오늘날 서울의 명동이나 부산의 광복동 정도로 사람들이 붐비던 곳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점차 잊혀지기 시작한 창동이 창원시의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따라 변신을 시작하면서 창동의 골목길은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창동에 예술인들이 입촌하면서 생기를 잃었던 골목길에 다시금 활기가 넘치기 시작한 것이다. 빈 점포에 예술인들이 입촌하면서 생기가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창동예술촌에 입촌한 아티스트 '배달래 작가'가 연출한 바디페인팅 퍼포먼스도 그 중 하나였다. 지난 9월 1일부터 10월 3일 까지 창동예술촌에서 벌어진 '창동예술촌 100일 기념축제'중에 펼쳐진 바디페인팅 퍼포먼스는 늦은 시간에 펼쳐진 야외 공연이었다. 밤하늘에 반달이 둥실 떠올랐고 좁은 야외 공연장에는 사람들이 가득찼다. 마치 창동의 옛 모습을 되돌린 듯한 풍경이랄까.
공연이 시작되자 맨 먼저 등장한 배달래 작가가 창동의 옛 골목길을 담은 영상 위에 커다란 붓으로 페인팅을 시작했다.
그리고 등장한 한 남자. 두 사람의 퍼포먼스가 시작된 지 얼마지나지 않아 두 사람 곁으로 다가선 한 여자. 바디페인팅 퍼포먼스는 세 사람이 음악에 맞추어 진행한 난해한 공연이었다. 배달래 작가 포함 세 사람은 공연이 끝날 때 까지 배달래 작가가 흩뿌리는 물감으로 온 몸은 물감투성이 그 자체로 맨살로 등장했던 처음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 조차 몸을 사릴 정도로 아주 물감 범벅으로 뒤바뀐 모습이었다.
그리고 바디페인팅 퍼포먼스가 끝난 후 온 몸으로 열연을 한 연기자들이 관중들을 향해 인사를 나눌 때 까지, 이들이 보여준 퍼포먼스가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자주 접해볼 수 없는 예술의 한 장르인 '보디페인팅 퍼포먼스'는 순수미술을 격상시킨 것이라고 하나 난해하기 이를 데 없었다. 퍼포먼스는 대개 실험적인 성향을 가진 음악인들이나 무용가들과 함께 만들어지는 공연으로 사전의 시나리오나 리허설 없이 즉흥적인 몸짓과 붓질 등에 의해 진행되는 데, 이에 대해 배달래 작가는 한 매체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의식의 즉각적 표현을 중시하고 그 표현들의 표출을 통해 숨을 쉰다"
글쓴이 포함 여러분들이 감상한 '배달래 바디페인팅 퍼포먼스'는 배달래 작가의 무의식이 퍼포먼스로 발현된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무의식 속에는 '천지창조'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던 것일까. 그녀가 맨 처음 사람들에게 보여준 건 오래되고 낡은 창동의 한 골목길 모습이었다. 작가가 그곳에서 페이팅을 시작하는 모습은 마치 조물주가 세상을 만들고, 다시 생기(생령)을 불어넣어 새 생명을 창조하는 것 처럼 느껴졌다. 당시 그 느낌은 매우 난해했지만 퍼포먼스를 끝내고 귀가 중이었던 벌거벗은 두 남녀를 통해, 작가의 창조적 행위와 바이블 속에 나타난 천지창조와 에덴동산의 모습이 그대로 오버랩 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이블(창세기)에 나타난 장면들을 재구성해 보면 대략 이러하다.
바이블의 첫 장 '창세기' 1장 1절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기록돼 있다. 간혹 바이블의 기록에 대해 '부작용'을 겪으시는 분들을 위해 '하나님'을 '조물주'로 고쳐 부르기로 한다. 아무튼 조물주는 어느날 천지창조를 감행했다. 그게 놀이였던 지 사명감이었던 지 그건 알 바가 아니다. 조물주가 천지창조를 해 놓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하늘을 우러러 보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별들 중에 하필이면 지구별이라는 데 인간이 살 수 있도록 조치해 둔 것이 조물주의 역할이었다.
태초의 남자 사람 '아담'은 그렇게 지구별에 맨 먼저 태어나게 됐다. 아담이 태어난 곳은 '에덴동산('동산'이라 부른다)'이라고 불리우는 곳이었으며 그곳에서는 옷을 입고 다닐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인간이란 혼자 뿐이었으므로 눈치를 살피며 부끄러워 할 이유도 없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면 조물주가 심어둔 온갖 과실을 따 먹으며 동산 곳곳의 식물과 육축들에게 이름짓는 일에 몰두했다. 그런 어느날 그는 동산을 다니며 못 볼 걸 보고 말았다. 동물들은 자기와 달리 교미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담에게는 전혀 불필요해 보이는 농산물(?)이 신체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동산의 동물들 중 아무 동물이나 껴 안고 교미 흉내를 내 봤다. 조물주가 못 볼 걸 보고 말았다. 조물주의 실수가 시작된 것이다. 조물주는 즉각 아담이 깊이 잠 든 틈을 타 외과수술을 감행했다.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 이브 또는 하와로 불리우는 '여자 사람'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브였으며 아담을 돕는 배필이었다. 아담이 얼마나 좋아했으면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 했던가.
오늘날 '여자'라는 이름은 남자사람 아담에게서 취한(갈빗대) 것 때문이라니. 현대 여성들이 쉽게 동의하지 못할 거 같다.(흠...그래서 조물주라고...!) 아무튼 동산에서 벌인 아담의 엉뚱한 짓 등으로 벌어진 이브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조물주는 장차 인간 사회의 혼돈을 부추길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던 거 같다. 그게 동산의 한 사과나무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조물주는 참 야속한 인간(?)이었다. 그는 아담이나 이브가 따 먹지 않으면 안 될 사과나무를 에덴동산 한 가운데 심어놓고 "사과를 따 먹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요런 상황을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견물생심(見物生心)'이 딱 들어맞는다고나 할까. 견물생심이란, 어떤 물건을 실제로 보면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는 거 아닌가. 그런데 조물주란 자는 그냥 사과를 따 먹지 못하게 한 게 아니라 경고문(?)에 옵션을 달아두고 아담과 이브에게 호기심을 더욱더 부추기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아담과 이브가 살고있는 동산에는 배암이 함께 살고있었는 데 그 배암은 시도 때도 없이 호기심을 강행하라며 이브에게 견물생심을 부추기고 있었다.
"이보게 이브 그걸 믿나?...조물주 말은 뻥이야. 무슨 애플이 만지지도 못 하고 먹지도 못해?...그럼 뭣하러 심어놨겠나."
이브가 쇼핑차 동산에 들를 때 마다 애플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는 데 이브는 조물주의 경고가 못내 아쉬웠다. 조물주는 괜히 동산 중앙에 사과나무를 심어놓고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정말 먹지도 만지지도 말 과실나무를 왜 심어놓고 염장을 지르는 건 지. 동산에 심어진 사과를 따 먹는 날에는 즉시 눈이 밝아지며 조물주 처럼 선악을 구별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브 보기엔 동산의 애플을 쇼핑해 아담과 한 입씩 나누어 먹고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배암의 충동질에 의해 애플을 똑~따서 장바구니에 담아 집으로 한걸음에 도착한 것이다.
"자갸...한 입만...(우거적!!)..."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난 건 사과를 깨물자마자 나타났다.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깨물기 전 까지 홀라당 다 벗고 있었던 몸이 갑자기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곁에 있던 무화과 나뭇잎을 따다가 중요 부위를 가렸다는 게 바이블의 기록이다. (이런 걸 믿습니까...) 못 믿으면 '구제불능' 따위로 논쟁을 벌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함정을 파 놓고 꼬드긴 쪽은 오히려 조물주였건만 그는 아담과 이브에게 경고한 대가를 즉각 실행에 옮긴 것이다.
"흠...내가 따 먹지 말라 그랬지...왜 따 먹었어?..."
아담과 이브는 조물주 앞에 무릎꿇고 앉아서 검찰 조서 꾸미듯 질문에 꼬박꼬박 답하고 있었다. 이브는 곁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는 배암을 가리키며 "쟤가 따 먹으라고 해서 요."라며 배암을 핑게댓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인류 최초의 재판은 '조물주 지 맘대로'였다. 조물주 혼자서 집행하는 재판에서 '항소'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 그 자체였다.(흠...난 조물주거든...)
조물주는 이브를 꼬드긴 죄목으로 배암한테 '배로 기어다니며 흙을 먹을 지어다'라는 형벌을 선고했다.(그 전 까지 배암은 두 발로 서서 다녔나?...오히려 더 무섭다. ㅜㅜ) 그리고 아담과 이브를 향해 늙어 죽을 때 까지 땀을 흘리고 일을 해야 하는 노동의 형벌과 함께 이브에게는 잉태하는 고통 즉, 출산의 고통을 형벌로 내리며 동산에서 퇴출시킨 것이다.
대략 여기까지 바이블 속에 나타난 천지창조 모습과 아담과 이브의 생애 등에 얽힌 기록을 재구성해 본 내용이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조물주의 창조적 노력과 실수에 의해 오히려 삶을 더욱더 윤택하게 해 주는 것인 지. 창동예술촌에서 펼쳐진 바디페인팅 퍼포먼스를 끝마치고 도시 속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니 태초의 동산에 살고있었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닮은 듯 했다.
그런데 조물주를 비웃는 듯 바이블에 기록된 아담과 이브의 생애는 보다 구속적이자 폐쇄적인 반면, 바디페인팅 퍼포먼스를 통해 두 남녀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음습했을 숲 속 에덴동산 보다 뽀송뽀송하고 깨끗한 환경의 도시 속으로 탈출 한 것 같은 느낌 말이다. 그게 한 예술가의 무의식 속에 녹아 흐르는 창조적 행위라고 하니 조물주를 단박에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나.
한 때 떠들썩 하게 번창했던 창동예술촌에 빈 점포가 늘어나고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는 창조적 행위를 통해 되살아나는 '천지창조'의 현장에서 도시 속으로 사라지는 두 남녀를 동시에 본 것이다. 어쩌면 에덴동산에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 스러운 애플 한 개를 따 먹고 퇴출 당한 아담과 이브는, 폐쇄적인 '조물주의 에덴동산'을 그리워한 게 아니라 '나와 우리들만의 자유로운 공간'을 꿈꾸며 조물주를 향해 한마디 날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건 무의식의 즉각적 표현이야. 난...조물주는 물론 세상 어느곳에나 얽매이고 싶지않아..."
태초에 조물주가 인간을 벌거벗게 만들어 에덴동산에 살게 만든 이유는, 거추장스러운 옷과 가식을 벗어야 보다 인간답다는 걸 가르친 것인 지. 창원시(옛 마산) 오동동 거리 속으로 사라지는 두 남녀의 벌거벗은 몸이 오래토록 기억에 남아있었다. 이 작품을 연출한 배달래 작가의 의도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의 프로필을 살펴보는 동안 그녀가 왜 정형화된 회화의 틀을 깨뜨리고 행위예술을 시작하게 됐는 지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두 사람을 통해 표출시킨 바디페인팅 퍼포먼스가 아닌가 싶다.
작가 배달래는 본래 회화를 전공해서 추상적인 작업을 해 왔었는데, 결혼 후 10년간의 공백기를 보내는 동안 대학시절 한 권의 사진집을 보고 감동받았던, '베르슈카 Verschka'라는 전위예술가의 뒤를 쫓아 몸그림 'Body painting'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때부터 지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작가는 동시에 세가지 방향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첫 째, 모델의 몸에 그림을 그린 후 그 이미지를 조합하는 과정을 거쳐 전체적인 화면을 재구성하는 방향이다. 둘 째, 첫 째 방향과 방법상 비슷하긴 하지만 첫 번째 작업이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인간의 몸을 캔버스로 사용한다면 여기서는 인간 그자체가 주제가 된다. 셋 째, 앞서의 작품들이 전시장에서 전시되는 것이라면 이쪽은 공연되는 것이다.
이른바 "바디페인팅 퍼포먼스"라는 장르로서 세계적으로도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작가만의 특별한 작업으로 작가에 의해 새롭게 개척되어지고 있는 실험적인 장르였던 것이다. 나와 우리가 창동의 오래된 골목길 한편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감상한 작품이 실험적 장르에 속하는 바디페인팅 퍼포먼스였다. 그 난해한 창조적 작품 속의 두 사람. 그들은 창동예술촌의 한 무대에서 하늘에서 날아온 오방색을 온 몸에 두르고 도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