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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나와 우리덜

장도빈 선생이 전하는 시국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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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도빈 선생이 전하는 시국 메세지
-꿀단지고서방의 보물 장도빈의 민중일보 원본-

▲ 창동예술촌 '꿀단지고서방'의 지킴이 김영철 씨가 <민중일보> 원본을 들어보이고 있다.


2012년 대선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진정한 쟁점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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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말이 있다. 볕이 안 드는 깜깜한 쥐구멍에 볕들 날 있다는 말 뜻은 '고생 끝에 낙이 있다'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이유 등으로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던 사실이 역사적 조명을 새롭게 받으며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얼마전 마산의 창동예술촌을 다녀오면서 그곳에 있는 '꿀단지고서방'에서 오래된 신문을 친견하는 행운 조차 그랬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책방을 다녀갔지만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있는 서재필의 '독립신문'이라든지 장도빈 선생의 '민중일보'와 구한말 1898년 9월 5일에 창간된 '황성신문' 등 주옥같은 보물들은 그냥 지나쳐버린 듯 했다. 100년도 더 된 그 신문들은 누렇게 퇴색되고 너덜너덜 하게 변해 꿀단지고서방 지킴이 김영철 씨가 비닐봉투에 담아 보관하고 있었다. 손만 대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이 오래되고 낡은 신문이었다.
 




 장도빈 선생이 창간한 '민중일보' 원본 만나다

 
그나마 그 신문들은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 오래된 골목길과 함께 쇠퇴해 가는 도심의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을만도 했다. 또 오늘날 최첨단 기술이 깃든 스마트폰 등 새 것을 좋아하는 세대가 골동품에 열광할 리가 없었으므로, 독립신문이나 민중일보 등 중요한 사료들은 헌책방 내지 고서적방 한 구석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글쓴이 포함 일행들이 꿀단지고서방에 들러 이것 저것 오래된 물건들에 관심을 보이자, 깊은 잠에 빠졌던 오래된 신문들이 기지개를 펴며 카메라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김 씨가 글쓴이 앞에 끄집어 내 보인 신문들 중에는, 정체불명의 친일파 서재필의 독립신문에 이어 독립운동가 장도빈 선생이 창간한 <민중일보>가 눈길을 끈 것이다. 김 씨는 귀찮을 법도 했지만 깊은 관심을 보이자 신이난 듯 카메라 앞에 귀한 사료들을 펼쳐보였다. 그런데 이 귀한 사료들이 2012년 대선을 앞 둔 우리들에게 요긴한 자료로 쓰이게 될 줄 누가알았던가. 먼저 장도빈 선생의 자취를 살펴보면 대략 이러하다.
 



장도빈 선생은 어떤 인물인가 
 


"장도빈 선생은 1888년 10월 22일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신읍리에서 장봉구(張鳳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산운(汕耘)이다. 선생의 가계는 사대부 집안이었으나, 조부 장제국(張濟國) 때에 이르러서는 출사하지 않고 재야 유림으로 향리에 묻혀 살았다. 그것은 조선 말기의 파행적 정치형태인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매관매직이 자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중앙 관직에 진출하기 보다는 차라리 재야에서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 사대부로서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선생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우리나라의 자주적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이듬해 2월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까지 간섭하면서 식민지화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갔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그 해 7월 19일 광무황제를 강박하여,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한다"는 양위 조칙을 반포케 하였다. 그런 다음날 일제는 경운궁 중화전에서 신·구 황제가 참석하지도 않은 채 양위식을 거행케 하여 당시 반일 구국운동의 정신적 지주이며 식민지화 정책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하였던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이어 일제는 '이완용(李完用) 매국 내각'으로 하여금 같은 해 7월 24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인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제1조, 조선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조선정부의 법령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받을 것. 제3조, 조선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 제4조, 조선 고등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은 다음에 시행할 것. 제5조, 조선정부는 통감이 천거하는 일본인을 조선관리로 임명할 것. 제6조, 조선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는 외국인을 조선관리로 초빙하지 아니할 것. 제7조, 광무8년 8월 22일 조인된 조일협약 제1항은 폐지할 것.->을 체결케 한 뒤, 대한제국 정부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이들로 하여금 국정을 운영하는 이른바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자행하였다. 

나아가 7월 31일에는 일제가 작성한 군대해산 조칙을 새 황제 순종(純宗)으로부터 재가 받는 형식을 취한 뒤,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결국 일제는 이 같은 일련의 침략 책동으로 한국 정부의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국가 보위의 국방력을 말살함으로써 대한제국을 형해화(
形骸化, 내용은 없이 뼈대만 있게 된다는 뜻)하여 갔다.





이같은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자 선생은 1908년 봄 위대한 정치가가 되어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세우겠다는 결심으로 상경했다. 우선 선생은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정치가가 되기 위해 학업을 닦는 한편, 황성신문사 주필인 박은식(朴殷植)의 소개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논설을 담당했다. 특히 이 때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인 신채호(申采浩)가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선생이 주로 논설을 작성하였고, 1909년부터는 신채호와 일주일씩 교대로 논설을 썼다고 한다.

1904년 광무황제의 후원으로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치외법권을 갖고 있던 영국인 베델이 발행인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정책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었다. 따라서 선생은 각종의 애국적 논설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일제 침략의 실상을 고발함으로써 당시 각계각층에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구국계몽운동을 확대 지원하여 갔다. 아울러 선생은 이 시기 이미 역사학자로 명망 있던 신채호와 동고동락하면서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필요성을 체득하여 향후 국사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
 
1930년대에 들어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침략, 1937년 7월 중일전쟁,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이른바 총후(銃後)의 안정과 전시 인력 및 물자 동원을 목적으로 본격적인 ‘황민화’정책을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순차적으로 일본어 상용(1937. 3), 신사참배(1937. 7), 황국신민 서사(1937. 10), 창씨 개명(1939. 11) 등을 강요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는 민족지도자들을 갖은 방법으로 변절시켜 침략전쟁에 협력케 하는 한편, 이들을 황민화정책의 앞잡이로 삼아 한국 청장년들을 전쟁터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 때에도 선생은 끝까지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산간벽지로 피해 다니며 국사를 연구하면서 조국 광복의 날을 기다렸다.  

8·15해방이 되자 선생은 조국을 위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한 끝에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선생이 해방 공간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가 국민계몽을 통한 민주국가 건설에 있음을 인식한 결과였고, 또 한말이래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해 줄기차게 실천해온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활동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민중일보(民衆日報)>를 창간하여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활동으로 민족의 진로를 밝히며 민주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는 선생은 교육계에 투신하였다. 그것은 선생이 시종일관 주장해온 민족교육을 통해 민주국가의 동량을 육성하고, 나아가 그들의 애국심을 함양함으로써 민족·민주 국가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고 <국가보훈처> 자료 등에서 말하고 있다.




장도빈 선생의 자취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전후 사정을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이때 선생이 하신 일은 주로 국사를 바로 세우는 일과 함께 일제에 강점당해 빼앗긴 우리 민족의 정체성 회복 등이었다. 대략 100년 전후에 전개된 역사를 살펴보고 있노라니, 2012년 현재 친일.숭미 극우주의자들이 들끓는 대한민국의 대선 시즌과 너무도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이완용 매국 내각으로 하여금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인 '정미7조약' 등 친일행위자들의 면모를 떠올리자 고아처럼 방황하는 정체불명의 친일.숭미세력들이 눈 앞에서 어른거리며,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상황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오늘날 국사편찬위원회가 친일 유신독재자를 옹호하게 된 희한한 상황과 닮은 꼴이랄까. 

 민중일보와 오늘날의 언론

이들이 나라를 어지럽힌 주된 요인 중 하나는 
조선 말기의 파행적 정치형태인 '세도정치(왕의 신임을 얻은 신하나 외척이 강력한 정치적 권세를 잡고 나라를 다스리던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로 매관매직이 횡행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오늘날 친일.숭미 주의자들이 당명을 바꿔가며 변신을 시도하고 있었던 이유가 부정부패의 대명사인 '차떼기당'으로 드러난 것 처럼, 매관매직 등 부정부패가 극도에 달하여 나라와 민족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그들만의 이익을 도모한 결과 을사늑약이라는 치욕적인 역사를 맞이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소한 100여 년 전의 상황이 2012년 현재 상황과 맞물린 게 장도빈 선생의 민중일보 창간 경위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 장 선생이 민중일보를 창간한 이유는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초래는 온통 친일색이었던 언론이 국민들을 우민으로 격하 시킨 때문이었을까. 이명박 정권이 불과 4년 반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대한민국은 
이완용 매국 내각과 흡사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완용이 처럼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내 준 건 아니지만 친인척.측근비리 등 이른바 공구리정권이 '4대강 죽이기' 토건사업으로 인해 국토는 황폐화 되었다. 장사꾼에게 나라를 맞긴 결과 때문이었다. 4대강에 투입된 돈은 자그마치 23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었다. 지금 그 돈은 다 어디로 갔으며 4대강은 어떻게 변했나. 이같은 문제 등이 방치될 수 있었던 건 여론이었으며 여론을 무마시킨 언론 때문이었다. 소수의 진보적 매체를 제외한 다수의 언론들이 본질을 회피하고 엉뚱한 사실만 다루는 동안 나라 전체가 썩은 냄새로 진동하게된 것이다.

그게 오늘날 친일.숭미세력들이 정치판에서 생산한 산물이자 코를 찌르는 악취인 것이다. 정치가 장사판으로 변한 것이며, 정치가 조직을 위한 제도로 변한 것이며, 정치가 나라와 민족과 별개의 제도로 변신을 거듭해 온 결과였던 것이다. 이들을 견제해야 할 언론들이 한 패거리가 되어 망국에 이르게 한 결과 2012년 대선은 다시금 장 선생이 도모하고자 했던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과 별반 다르지 않게된 것이다. 선생은 이런 상황을 최소한 100여 년 전에 간파하고 1908년 7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 논설에 이렇게 쓰셨다.


 "국가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국민을 모아 이룬 것이오. 국정이란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국민이 그 일 <국정>을 자치(自治)하는 것이오. 애국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국민이 그 몸<국가>을 스스로 사랑하는 것이라. 고로 민권이 흥(興)하면 국권이 세워지고 민권이 멸(滅)하면 국권이 쓰러지니 윗사람이 압민(壓民)하는 권리를 힘쓰면 그 나라는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오, 국민된 자가 그 권리의 신장에 힘쓰지 아니하면 그 몸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2012 대선을 앞 둔 요즘 야권의 두 주자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약진이 눈에 띈다. 여론조사 결과 등에 따르며 여권의 박근혜 후보는 일찌감치 대선레이스 밖으로 사라진 느낌이다. 이유가 있었다. 박 후보는 물론 그녀가 소속된 새누리당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은 게 그 이유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이명박 정권을 계승한 사람들이었으며 친일.유신독재자 박정희의 통치스타일을 그대로 답습한 정당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5.16군사쿠데타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인혁당사건 등 과거사에 발목이 붙들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일련의 과거사는 민족 내지 동족이었다면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과 조차 불분명하게 한 결과 시민들의 눈 밖에 벗어나고 만 것이라 판단되는 것이다. 그 모든 행위를 장 선생이 남기신 논설 한 쪽에 비추어 보면 '국가와 국정'이 모두 실종된 '장사꾼스타일'의 정치가 4년 반 정도 이어지며 나라와 민족을 풍전등화에 이르게 한 것이라 사료되는 것이다.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에게 바라는 정치  

선생께서는 이런 일 등에 대해 "...
민권이 흥(興)하면 국권이 세워지고 민권이 멸(滅)하면 국권이 쓰러지니 윗사람이 압민(壓民)하는 권리를 힘쓰면 그 나라는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오, 국민된 자가 그 권리의 신장에 힘쓰지 아니하면 그 몸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의 지난 4년 반 동안의 정치는 국가의 공권력을 강화하여 '압민의 권리'에 몰두하며 '민권이 흥하는 국권'의 의무를 방치하거나 탄압한 결과 국권이 쓰러질 위기에 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언론들이 입을 다물거나 딴청을 피운 결과 '국민된 자가 도리를 다 못하며' 국난의 위기를 자초하게 되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  

오늘날 국민들이 정치에 또는 정치판에 환멸을 느끼며 안철수 신드롬에 집착하는 게 주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 사료되는 바, 최근 야권의 두 후보간 단일화 기싸움이 만만치 않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당정치를 주장하는 문재인 후보측과 무소속을 고집하는 안철수 후보측의 거리감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글쓴이는 두 후보의 주장이 다 옳다고 여겨진다. 다만, 두 후보가 가진 단점만 보완된다면 야권후보 단일화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은 전망도 된다. 반드시 정당의 족수(의석수)가 많다고 해서 선정을 펼칠 수 있다는 논리는 새누리당을 통해 확인된 바 불가능한 상태이며, 그간 민주당의 정치적 행보를 통해서도 국민들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정당정치를 하는 민주국가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대통령이 국정을 펼치기란 결코 쉽지않은 일이다. 특히 언론이 권력으로 변해있는 이상한 제도권에서 국민들의 지지만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판단된다. 마치 촛불시위가 단말마에 그치며 역사속으로 묻힌 것과 같다고나 할까. 국민적 열망을 담아내 다 쓰러져 가는 나라와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대통령 한 사람만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 두 후보는 너무도 잘 알것이다.

어느날 쥐구멍에 볕든 하루 때문에 우리는 5년의 황금같은 세월을 빼앗긴 뼈저린 경험을 했다. 그리고 다시금 이 땅에 민주정권을 세울 수 있는 정권교체의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다시 쥐구멍에 볕들 기회를 주지않으려면 두 후보는 야권에 반드시 필요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축하기 바란다. 그건 일방적인 양보가 아니라 쌍방의 소통에 의한 새로운 권력의 창출이다. 두 후보가 추구하는 목적과 방향이 같다면 버릴 건 과감히 버리는 게 국민을 위한 일 아니겠나.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 지 서로 나누며 충분히 절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바란다. 그 일을 위해 야권의 두 후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격려와 성원은 필수적 조건이자, 괴물같은 정권을 키워낸 편파적 언론을 막아내는 힘이다. 마산 창동의 한 골목길 헌책방에서 만나게 된 장도빈 선생의 민중일보가 일깨운 작은 메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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