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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

인혁당사건, 사형집행 목격자 증언

Daum 블로거뉴스
 


인혁당사건 사형집행 목격자 증언
-사형수 증언,언젠가 이 더러운 정권은 망한다- 



우리들 중 누구인가 억울하게 교수형틀 앞에 선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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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인혁당사건의 가해자는 대통령이 돼 보겠다며 뻔뻔스러움 이상의 가증스러운 모습인데, 피해자 가족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니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억울한 누명으로 생사람을 잡은 사법부의 오판이자,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권력을 유지해 보고자 저지른 피도 눈물도 없는 끔찍한 만행이었다.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2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의 사형집행 때 군종참모로 입회한 박정일 목사의 증언은, 사형집행장을 직접 목격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아연실색한 장면이었다. 우리들 중 누구인가 억울하게 교수형틀 앞에 선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런 장면을 뻔히 알면서도 얼마전 '사형제 존속'을 유지하고자 했던 '유신의 딸' 박근혜('그녀'라 한다)의 발언을 참고해 보니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인혁당사건에서 보듯 정적 등 반대자를 제거할 수 있는 법적제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그녀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었던 것인 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초가을 아침.  2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의 사형집행 때 군종참모로 입회한 박정일 목사의 증언을 천천히 읽어보니 글쓴이가 이들 피해자 곁에 서 있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러니 한 건 유신의 딸이 새누리당 대통령후보로 나서면서 인혁당사건이 부활한 것이다. 조작질한 인혁당사건으로 얼마나 억울한 죽음이었으면 이분들의 영혼이 구천을 맴돌며 우리들을 향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이런 사실 등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진 데,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은 물론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그녀는 지금 당장 석고대죄하고 대통령후보직을 사퇴해야 마땅할 것 같다. 교수형틀 옆에서 사형집행을 지켜본 박정일 목사의 증언은 이랬다.

인혁당 사건 사형집행 목격자의 증언 

 "1975년 4월8일 오후 5시 육군 제1교도소 군종실장 박 목사는 “본부로 올라오라”는 교도소장의 연락을 받았다. “내일 사형에 종교 담당으로 참관하게 됐다. 비밀 유지 때문에 육군교도소 인원이 차출됐다. 집에도 알려서는 안 된다”고 교도소장은 말했다.  교도소장은 군용 지프차를 내줬다. 박 목사는 군의관과 함께 경기도 성남시 육군 제1교도소를 출발했다. 소장은 출발 직전에야 “인혁당 사형 집행일이니 임무수행 잘하고 오라”고 박 목사에게 귀띔했다. 

저녁 7시께 박 목사는 서울 서대문에 있던 당시 서울구치소(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근처 여관에 도착했다. 다음날 새벽 4시 서울구치소 사형집행장으로 들어갔을 때는 육군본부 법무관과 검찰 수사관 등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4시30분 흰색 죄수복을 입은 첫번째 사형수가 들어왔다. 백열등이 환하게 켜진 방안으로 들어온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주위를 둘러본 그가 물었다. 법무관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형을 집행한다는 판결문을 읽고 유언을 물었다.  “난 억울해. 하지만 언젠간 모든 일이 밝혀질 거요.” 사형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행관은 사형수의 머리에 검은 복면을 씌웠다. 목에 밧줄도 감았다. 잠시 뒤 버튼을 누르자 사형수 발밑의 송판이 열렸다. 군의관이 다가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주검을 치웠다. “한 사람당 30분씩 걸렸다”고 박 목사는 회고했다. 뒤이어 들어온 사형수들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기도를 요청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도 답하는 사형수는 없었다.  






박 목사 역시 사형수들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저도 너무 긴장해서…. 마음속으로만 기도했지요.”  어느 사형수는 마지막 소원이라며 “아들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법무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담배 한 개비 피우고 싶다”는 소원도 허락되지 않았다. “새장에 갇힌 새가 날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는다”, “언젠가 이 더러운 정권은 망한다.” 마지막 소원조차 들어주지 않는 이들에게 남긴 사형수들의 마지막 말을 박 목사는 기억한다.  

그 가운데서도 박 목사는 이수병씨를 잊지 못한다. “나는 유신체제에 반대한 것밖에 없고,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것밖에 없는데 왜 억울하게 죽어야 되느냐! 반드시 우리의 이번 억울한 희생은 정의가 밝힐 것이다!” 그렇게 외친 이씨가 교수대에 올라가는 모습을 박 목사는 뇌리에 새겼다.  8명의 사형집행이 끝난 아침 8시, 밖으로 나온 박 목사는 흰 봉투를 받았다. 특별근무수당으로 3만원이 들어 있었다. “죄책감이랄까…. 이런 일을 하고서 이런 걸 받아야 하는가 갈등을 느꼈죠.” 구치소 정문에서 유가족들이 거칠게 항의하고 있었다. 박 목사를 태운 지프차는 흐느끼는 유가족을 지나 구치소를 빠져나왔다. “그 뒤로 저는 사형제 반대론자가 됐지요.” 박 목사가 말했다

역사는 '만약'의 경우를 용인하지 않지만, 만약 유신의 망령이 아직 까지 살아있었다면 오늘날 인터넷에서 특정 정권의 실정 등을 고발하려면 목숨을 담보해야 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글쓴이 등 특정 정권에 대해 반대를 하며 비판을 일삼는 누리꾼들이라면, 또 한 사람의 군종목사 등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  “난 억울해. 하지만 언젠간 모든 일이 밝혀질 거요.”  라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위 글은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양심적인 한 목사에 의해 증언된 사실이다.

대선을 앞 둔 2012년 가을 아침에 다시 들여다 보게 된 인혁당사건의 교수대 모습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었다. 만약, 유신의 잔재들이 교수대에 서게 되면 어떤 말을 남기게 될 지 모르겠다. 그건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역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역사는 밝혀졌다. 권력 유지를 위해 생사람 잡은 유신독재자와 그의 딸.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다. 당장 무릎 꿇고 유족들과 국민들 앞에 석고대죄하는 일 밖에 없다. 대통령후보는 무슨...!!


** 오늘(13일) 오전에 발행한 관련포스트  
인혁당사건, 5.16 처녀보살의 '한풀이'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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