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남한산성!!...
학교에 다니면서 여러 과목중에서 제일 싫어한 과목이 '역사'내지는 '국사'였습니다.
이 과목은 연대표에 따라서 이해하고 외워야 할 내용이 너무도 많은 반면 '점수'도 변변찮은 것이었습니다.
이 과목을 잘해봐야 '입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과목을 제가 싫어한 이유가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남문 모습입니다.
이 과목 속에는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록들은 '영광의 역사'보다 '치욕의 역사'가 더 많았던 것이며 그 치욕의 뒤안길에는 늘 간신배들이 등장하며
간신배들의 등살에 충신들이 사라져가는 안타까운 모습이 그려져 있기도 했습니다.
좁은 나라안에서 늘 편갈라 싸우길 좋아하고 서로 잘났다며 삿대질 하는 모습도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재 모습은 유사이래 처음으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으나
아직도 강대국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면 자립하지 못할 것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일제로 부터 독립은 했으나 여전히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친미'를 버리지 못하며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또한 그들의 후원을 등에 업고 국제무대에 서 있는 것이므로 언제인가 그들로 부터 버림을 당한다면
'병자호란'과 같은 국가의 치욕스러운 날들이 우리의 앞에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형의 힘을 믿고 까불어대는 아이들 같은 생각이 든 것도 최근입니다.
우리가 대내외적으로 '독립국가'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외유내강'의 힘을 길러야 함에도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함이 여간 우려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남한산성을 방문했을 때, 그곳 남문에는 봄볕이 너무도 따사로이 비치고 있었고 바람이 적당히 불고 있었습니다.
남문위에 올라서자 함성이 들리는 듯 했고 분주히 움직이는 성안의 모습들이 절로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병사들의 표정은 밝지 못했고 성안을 분주히 움직이는 아낙들과 아이들 표정도 어두웠습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고 며칠째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청나라 군사들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었고
성안에 있는 군량미나 식량은 두달을 버틸 수 있는 1만 4천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먹이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사태의 결과는 어떨지 아무도 몰랐고 요청해 두었던 원병들이 포위망을 뚫어주길 기대했으나 깜깜 무소식이었습니다.
12월의 남한산성은 혹한으로 거의 동사지경에 빠져있었습니다.
이하 제가 쓰는 역사적사실들은 사실에 입각하여 '재구성'한 것이므로 혼란이 없길 바랍니다.
시간을 360년정도 과거로 돌려서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상황의 병자호란 당시의 모습입니다.
때는 1636년 12월, 겨울이었고 조선에서는 '인조'가 신하들과 함께 짐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전하!...속히 차비를 끝마치고 길을 떠나셔야 합니다!..."
청태종은 명의 조선지원을 끊게하고 압록강을 건너서 조선으로 쳐 들어 오고 있었다.
"...야!...부시에게 전화 때려봐!...어떻게 됐어?..."
"...전하!...부시도 코가 석자라 하옵니다!...ㅜ"
인조는 짐을 챙기며 연신 그의 최고 후원자였던 부시를 떠 올리고 있었으나 그도 아라비안나이트전쟁 때문에 힘이 쇠잔되었고
마침내 오바바정권에 의해서 퇴출직전에 있었다.
인조를 힘들게 했던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백성들을 경제적으로 잘먹여 보자는 신하들의 충정에 따라서 한강에 화물선을 띄워보고자 했던 것인데
혹독한 추위와 명나라의 지원이 끊김에 따라서 공사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이 공사로 인하여 외채에 시달리며 빚독촉을 한 청나라가 채무이행을 독촉하며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
"...츠암!!...야! 홍보수석은 뭐하고 있냐?...블로거뉴스 함 열어봐!..."
"...전하!...블로거뉴스에는 온통 대운하반대를 외치는 백성들의 글 뿐입니다...ㅜ"
"...내가 어전회의를 할 때...누군가 말렸어야 했는데...아무도 그러하지 않았잖냐...ㅜ"
"...그때는 전봇대 뽑으라 명하시고 톨게이트직원이 너무 많다고..."
"...시끄럿...그땐 그때고..."
인조는 급한김에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우고 오린지로 후식을 한 다음 마포나루로 향했다.
마포나루에는 상수대신과 재섭대신이 고개를 떨군 채 재오대신과 함께 서 있었다.
인조가 눈을 흘기며 그들을 보자 그들은 땅바닥을 내려다 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리털 파카는?...이렇게 추울수가!..."
마포나루는 꽁꽁 얼어있었다. 나루에는 배들이 얼음속에 박혀있었다.
얼음위로 가마니를 깔고 말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했다.그러나 멀지않은 곳에 청군이 와 있다는 보고를 듣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급히 몸을 피하고 있었다.
"...이럴뗀 말타고 오지말고 핸드폰으로 때려!..."
"...전하!...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핸드폰요금을 내지 못해서 끊긴지 오랩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명분은 맹약을 위반한 조선을 문죄問罪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켜서 후일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될 때 후환을 없애기 위한 대비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므로,
청나라의 선봉인 마부태馬夫太는 이 길을 피하고 서울로 직행하여
선양瀋陽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개성을 지나서 서울 근교에 육박했던 것이다.
남한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추위에 떨고 허기에 지쳐 반은 죽은 목숨이었다.
이때 봉수대를 지키던 병사로 부터 수어장대로 급히 전갈이 왔다.
"...대장님! 한강 어귀에서 부터 횃불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청나라군대가 오고있는 게 아닌지...요?"
"...이런 멍청한 졸개가 있나? 왕께서 행차하시는 거야..."
인조는 야음을 이용하여 몸을 피하고 있었다.
인조가 대신들과 함께 남한산성에 도착했을 때 산성은 꽁꽁 얼어있었다.
한밤중의 청량산은 칼바람이 불고 있었고 인조의 판단은 이곳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강화로 갈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길은 온통 얼어있었으므로 할 수 없이 남한산성에 머물게 되었다.
"...방은 왜 이렇게 추워?!..."
"...전하!...아뢰옵기 황송하오나...시중의 기름값이 너무도 많이 올라서 보일러를 떼지 못하고 장작 몇조각를 떼긴 했는데..."
"...그래도 그렇지...내가 명색이 왕 아닌가?..."
"...백성들은 라면도 먹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밀가루값이 천정부지로...통촉하..."
인조는 하는 수 없이 꽁꽁 언 샌드위치로 저녁을 겸한 야식으로 배를 채웠다.
오린지는 돌덩이처럼 얼어서 이빨도 들어가지 않았다.
산성을 지키던 훈련대장등은 저녁도 먹지 못했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 어영대장 이서, 수어사 이시백, 어영부사 원두표 등에게
성 안의 군병 1만 3,000여 명으로 성을 지키도록 하고,
8도에 교서를 내려 도원수·부원수 및 각 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다.
그런 한편, 매탄처에 묻어 두었던 숯을 더 많이 사용하여 성을 지키는 병사들과 이곳의 아낙과 아이들이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했다.
병자년 겨울은 추위가 너무도 혹독하여 공기조차 얼어 붙어 거의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백성들의 고통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하며 또다시 정든 명나라에 구원을 청했던 것이다.
"...프레시던트!...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자유무역협정은 변함이 없을 것이오니 우리 맺은 동맹관계는 학실이(확실히)..."
"...그건 그렇고 빨갱이들이 있는 한..."
"프레시던트!...그들은 지금 모두 봉하촌으로 떠났는데..."
"...밀어부치라 하잖았소!...내가 힘쓴다고 했는데..."
부시는 끝내 모른척 할 심산이었다.
청나라의 선봉은 매우 빠르게 한양으로 쳐들어 왔다. 병자년 12월 16일이었다.
그들은 잠실올림픽경기장 옆 탄천변에 진을 치고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을 쳐들어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청군의 병사숫자는 12만명이나 되었고 남한산성을 지키는 조선의 병사들은 겨우 1만4천 뿐이었다.
청군에 저항을 하며 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병사들의 숫자였고 떨어진 사기는 다시 오를 줄 몰랐다.
강화로 피신한 세자들은 이미 청군에 의해서 모두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원군을 청한 곳에서는 청나라병사들과 이렇다할 싸움도 하지 못한 채 패퇴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도원수·부원수, 감사(監使)·병사(兵使)의 군사는 대개 도중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흩어졌다.
그중에서 전라병사 김준룡의 군사가 용인에서 적장을 죽이고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역습을 당하여 후퇴했다.민간에서도 의병이 일어났으나, 거의 무력하거나 진군 도중이었다.
조선이 기대했던 명나라의 원병은 국내의 어려운 사정으로 적은 수를 보냈는데, 그나마 풍랑 때문에 되돌아갔다는 소식이었다.
"...아!...'믿을맨'이 이토록 없단 말인가?...나의 신화는 여기서 끝나는도다!..."
"...전하!...블로거뉴스에 올라 온 백성들의 소리를 들었어야..."
"...이게?...누구 약올리느냐?...그래도 백성들 몰래 대운하계획은 계속하랬잖아..."
"아니되옵니다...전하!...이미 전하의 계획이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시끄럿!!...그 만큼 쪽팔렸음 됐지...난 밀어부칠거야..."
"...그러다 총선에서 백전백패하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야!...넌 누구편이냐?...4월 9일날 결과를 잘 보고 판단해도 늦지않아!..."
"...안된다니까!!...요."
남한산성은 청군에 의해서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매탄처에 묻어 두었던 숯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서 추위를 견디는 것 조차도 힘든판에 식량도 바닥이 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모두 동사와 아사를 면하지 못할 것 같은 형국이었다.
10여 만 명의 청군에 포위당한 채 고립되자,
성 안의 조선 조정에서는 차차 강화론이 일어났으며, 주전파도 난국을 타개할 별다른 방도를 내놓지 못했다.
"...재오대신...니 탓이야!..."
"...그 무슨 망발이요. 재섭대신이 공천을 그 따위로..."
"...상수대신!...그네대신 말 들어보오...말 함부로 하지 말랬잖소!..."
"...그러니...상수대신 탓이오!..."
"...푸~ㅎㅎㅎ...잘들 노는구나...니들이 아침형 인간을 알기나 알어?...푸~ㅎㅎㅎ"
인조는 며칠을 버티지 못했다.
청은 조선이 청과 개전할 준비를 하는 등 맹약을 깨뜨렸으므로 출정한 것이라는 등의 매우 강압적인 답서를 보냈다.
그뒤 20일에 청나라는 인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하되 먼저 주전의 주모자 2~3명을 가두어 보내라는 국서를 보냈다.
이틀 후에는 청군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남한산성에서 바라다 본 서울의 모습입니다.
강화에는 세자빈궁과 두 대군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피난해 있었고 안찰사 김경징과 유수 장신 등이 방비를 맡고 있었는데,
결국 패전하여 빈궁과 대군 이하 2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호송되었다.
병자년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 숯을 구워서 묻어둔 '매탄처'에 아직도 검은재가 보입니다.
"...아!...정말 쪽팔려!...내가 왕인데 공무원들이 말을 안들어 먹어서 나라가 이꼴이니..."
"...전하!...인촌대신이 말을 잘못햇던 게 아니었던가요?..."
"...내가 동영상파문을 잠재우고 떡값특검도 다 잠재웠는데...여전히 백성들은 나를 믿지 못하고..."
"...전하!...그게 아니라 운하 때문에..."
"...시끄럿!...이게?..이쯤되면 막가자는 게요?..."
이곳이 남한산성의 지휘부인 '수어장대'입니다. 너무도 장엄하며 수려하고 위풍당당한 아름다운 곳이죠
인조에게 들리는 소식은 너무도 참담했다.
인조가 청한 원병들이나 강화로 피신시킨 세자조차도 모두 청군에 의해서 나포되었다.
인조의 선택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 뿐 다른방도가 없었다.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항복할 결심을 하고
1월 30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
항복의 조건은 이러했다.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고, 명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 바칠 것,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고, 만수·천추·동지·원단과 그밖의 경조사에 조헌의 예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어 봉포하되
이들 의절은 명나라에 하던 것과 같이 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이며
청군이 돌아가면서 가도(椵島)를 정벌할 때 조선은 원병과 병선을 보낼 것,
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가며 대신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통혼(通婚)으로 화호(和好)를 굳힐 것,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조선 안에 있는 올량합인(兀良哈人)을 쇄환할 것,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고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나라에 내조하게 할 것,
매년 1번씩 청나라에서 정하는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었다.
인조는 눈물을 머금고 통한의 '항복문서'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정묘호란때 받았던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것 보다 더 가혹한 요구를 했다고 <다음백과사전>은 전하고 있다.
"...아이고ㅜ...대이고...ㅜ...위장전입 도장은 별 거 아니었구나!...ㅜ"
"...전하!...눈물을 거두시옵소서!...내년 4월이면 운하를 착공할 수도 있잖습니까?..."
"...그런 날이...올 ...수...있을까?...ㅜ...그래...그대가 충신이로다!ㅜㅜ...계속 밀어부치도록..."
"네...전하!...분부 받잡겠사옵니다!..."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대해서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朝貢 관계가 유지되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주요임무는 세폐와 방물(方物:황제나 황후에게 따로 보내는 조선의 공물)을 바치는 일이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
사행(使行)의 내왕시 일정한 한도 내에서의 교역이 공인되어 개시開市와 후시後市가 행해졌는데,
이 또한 조선 정부에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이외에 전쟁 때 청으로 잡혀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데 드는 속환가가 비싸서 속환문제가 심각했다.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숭명배청의 사상이 전쟁 전보다도 굳어져갔다.
그리하여 강화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대해서는 1639년에 거절한 바 있으며,
이듬해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임경업에게 전선 120척과 병사 6,000명을 주어 출전하게 하고 군량미 1만 포를 조운하게 했는데,
임경업이 중도에서 일부러 30여 척을 파괴하고 풍운을 만나 표류한 틈을 타서 명나라에게 청나라의 사정을 알렸다.
1643년에는 조선이 명나라와 통교한 사실이 드러나 최명길과 임경업이 선양에 붙잡혀갔다.
이듬해 청은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하고
1645년에 선양에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최명길, 척화론자인 김상헌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인조는 인평대군을 보내어 사의를 표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전후처리는 일단락되었고,
종전 직후 무리하게 책정되었던 조공품목들은 조정되었으나 조선에게 불리한 조공관계와 무역은 계속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1649년에 즉위한 효종의 주도 아래 강한 배청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이 대두되었다.
'연주봉 옹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가 남한산성을 방문했던 날은 날씨가 너무도 좋았습니다.
구비구비 펼쳐진 성벽을 따라서 잠시 이곳에서 피눈물을 흘렸던 선조들을 떠 올리며 그분들을 기억하려 애썼지만 그분들이 남긴 흔적은 오래된 성벽에 남은 이끼들 뿐이었고 바람만 한가로이 불 뿐이었습니다.
산성의 병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곳입니다.
우리의 치욕스러운 역사가 깃든 남한산성과 같이 우리는 유사이래 단 한번도 태평성대를 구가하지 못했습니다.
늘 외세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안으로는 조정의 대신들이 늘 실익도 없는 논쟁을 거듭하며 국가의 녹만 축냈습니다.
그들의 논쟁이 백성들을 위한 일이 아니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백성들은 늘 헐벗고 굶주렸는데도 그들 탐관오리들은 배를 불리고 있었던 것인데
그때와 형편은 다르다고 하지만 오늘날 치솟는 물가고에 등록금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서민들의 애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들 조정대신들이었고 지방의 토후들이었습니다.
이틀전 발표된 고위 공직자들이나 국회의원들의 재산내역을 보면 그들이 어떤 수단으로 재산을 증식했는지 보이긴 하나
누구하나 그들을 탓할수 만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대로 합법적인 수단으로 돈을 벌여 들였기 때문입니다.
입법활동들은 대부분 서민들을 위한 법이 아니라 재산을 치부하기 위한 위정자들을 위한 법일까요?
남한산성에서 제일 높은 곳(청량산)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등록금이 없어서 공부를 하지못하는 우리 학생들의 호소를 막기위한 경찰들의 숫자는
청군으로 부터 우리의 자존심이 걸린 남한산성을 지키기 위해서 주둔한 병사들보다 더 많은 숫자였습니다.
누구를 위한 공권력인지 너무도 헛갈립니다.
필시 이런 모습은 훗날 역사로 기록될 것인데 그 책에 쓰여질 이름이 두렵지도 않은가 봅니다.
남한산성을 돌아내려 오는 길에 목이 말라서 성 안의 촌락에 있는 한 주막에 들렀습니다.
짐을 내려놓고 막걸리 한통을 탁자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천원에 목숨을 걸고(?)있는 작은 가게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무도 싫어했던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떠 올렸습니다.
지금 우리의 역사며 나의 역사이기도 한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상밖의 일들은
훗날 어떤 모양으로 우리 후손들에게 미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는 한편,
우리의 위정자들도 저와 같은 형편으로 '역사공부'를 소홀히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남한산성의 함락과 같은 민족의 자존심 무너지는 일이 더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아!...남한산성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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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그곳-Boramirang
제작지원:그린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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