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잘린 불상들 무슨 사연있을까?
-왼손 인지를 쥐고있는 특별한 불상-
목 잘린 불상들 무슨 사연있었을까?...
잔설이 곳곳에 남은 지난 2월 20일,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백제 무령왕릉의 유물 등을 돌아본 후 박물관 바깥에 전시되고 있는 목잘린 불상을 둘러보게 됐다. 공주 공산성에 이어 송산리 고분군을 둘러본 직후였다. 석조물의 목을 자르면 영혼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일까.
충남 일대의 절터 등지에서 수집된 불상들이 전시된 옥외 전시장 풍경은 우리 역사가 우여곡절을 겪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인 연대 등은 표시되지 않았지만 목 잘린 불상들의 모습 하나만으로 종교가 정치적 탄압 등을 받을 경우 어떤 지경에 이르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찰 곳곳에 모셔졌을 석불들의 목을 자른 사람들의 인심을 헤아려 보니 가히 인면수심이 아닌가 싶었다.
목 잘린 석불들을 돌아보다가 참 희한하게도 한 석불이 눈에 띄었다. 왼손 인지를 꼭 쥐고 있는 석불이다. 불자가 아니어서 매우 정교하게 조각된 석불의 인지는 왜 붙들고 있는지 이해가 안갔지만 당시에도 좌파 우파를 따지던 시절이었을까. 참 묘한 생각을 하게 된 조각상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학교에서 역사시간에 배웠던 억불 정책 (抑佛政策) 또는 배불 정책(排佛政策)은 조선 왕조(1392-1897)가 500년 내내 불교를 탄압한 정책이다. 무슨 악연의 고리가 있었는지 참 길게도 탄압한 정책이다. 고려 말 및 조선 초에 정도전이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여 억불론을 주장했고, 무학대사 등 조선 건국 세력이 태조 이성계에게 주청하여 대대적인 불교 탄압을 전개했다.
억불정책의 배경에는 고려말 불교 세력이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와 역성 혁명에 방해가 되는 문벌 귀족 세력과 결탁하여 고려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조선 왕조를 위협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정책이었다. 목 잘린 불상들은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었을까.
고려 왕조에서 사찰 및 승려에게 주어진 혜택이 모두 철폐되었고, 사찰도 정리되었으며 남은 사찰은 모두 산으로 쫓겨들어갔다. 그러나 왕실은 개인적으로 불교를 계속 믿었고, 일반 민중들도 불교를 계속 믿었다고 전하고 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억불 정책은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정책과 더불어 숭유억불정책으로 진행되어 조선 사회에서 학문의 다원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다른 학문을 인정하지 않는 독단 독선의 그릇된 예를 남겼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로의 개혁을 둔감하게 만들었으며 국력을 약화시키는 문제를 낳았다는 데 오늘날 현대의 역사를 대입해 보니 토속 종교가 여전히 외세에 의해 침탈된 흔적이다. 한 때는 불교가 정치세력과 합세하여 기득권을 누렸고 또 요즘은 출처불명의 개신교 정치세력에 의한 종교적 반목과 대립이 최근 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참 좁은 땅덩어리 속에서 무수한 반목과 대립과 공존이 이어져 내려온 땅
그곳에 다시금 삼국을 백제라는 이름으로 쪼개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 현장을 목잘린 석불들이 지키고 서 있는 곳이 국립공주박물관의 모습이다.
인면수심의 정치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석불의 목을 잘랐다고 해서 백성들의 신앙심 마저 자르지 못했다는 걸 지금쯤 알기나 할까. 종교는 그저 종교 자체만으로 지켜지고 신앙될 때가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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