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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숭례문 소실 후 폐쇄된 '광평대군묘' 알고보니 잘된듯 싶기도

숭례문 소실 후 폐쇄된 '광평대군묘'
알고보니 잘된듯 싶기도


 숭례문이 눈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그 광경을 지켜본 우리 국민들의 안타까웠던 심정은 이루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나
벌써 과거의 한 사건으로 묻혀가고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숭례문소실을 너무도 안타까워한 한 사람으로써 숭례문을 잃고 나서
비로소 우리나라에 산재해 있는 우리 문화유적지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는 사람일 뿐입니다.


廣平大君墓域에 있는 종가댁의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입니다.


숭례문 소실의 책임이 특정인에게 있다는 남의 탓도 이제는 거두어 들일때도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두번 다시는 숭례문소실과 같은 안타까운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만전에 만전을 기하여 길이 후손에 물려줄 자산이 우리 문화유산임을 깨닫도록 해야 겠습니다.


광평대군묘역廣平大君墓域을 알리는 안내문입니다.


오늘 치과를 다녀 오면서 병원 가까운 곳에 있는 광평대군묘역廣平大君墓域을 찾아가 봤습니다.
봄을 재촉하는 빗방울 몇이 흩날리는 오후였습니다.



강남구 수서동 산10-1번지 속해있는 광평대군묘역일원廣平大君墓域一圓은  '시도유형문화재48호'로 지정된 문화재로써
초장지初葬地 학당리-지금의 강남구江南區삼성동三成洞-에서 연산군燕山君 원년元年(1495)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광평대군묘廣平大君墓의 사당으로 가는 입구입니다.


광평대군(1425∼1444)은 세종대왕의 다섯번째 아들이며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이며 시호는 장의章懿입니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에 힘썼고 국어·음률·산수에도 밝았다고 전하고 있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총명하였으며 서예와 격구에 뛰어났으나 아깝게도 세종 26년(1444),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고 합니다.



아울러 기록에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 째 아들로 1432년 광평대군으로 봉해지고
1436년에 신자수 의 딸과 결혼했으며, 그 해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광평은 '효경', '소학', '사서삼경', '좌전' 등에 능통하였고
 이백, 두보, 구양수, 소식 등의 문집을 읽고 국어 , 음률, 산수에도 밝았다.



 1437년 태조의 일곱 째 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첫번 째 소생인 방번에게 봉사손으로 입양,
 아버지 세종과는 오촌지간이 되어 왕가의 종실이 되었다.



이듬 해에 새로 개척한 북방 육진의 국방 강화 및 풍속 교화를 위하여 한양에 경재소를 두고
 종친으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할 때 종성을 맡았다."고 전해져 옵니다.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광평대군 묘역이 있는 일원은
 서울 근교에서 현존하는 왕손의 묘역 중 원형原形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써


광평대군묘역廣平大君墓域 도청입니다.


총면적 413,300㎡의 산에 광평대군의 묘소를 비롯한 그 종문宗門 700여餘기基의 묘소가 일대 장관을 이루고,
종가재실宗家齋室의 고옥古屋이 있는 공동묘역입니다.
묘역 아래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에도 소화기 한대만 달랑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밖에 할수 없는 모양...


오후2시가 넘어서 도착한 광평대군묘소 주변에는 너무도 조용했습니다.
평일이어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묘역 입구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열린 문으로 보인 묘역은 너무도 깨끗했습니다.(혹시 이곳은 원래 출입이 제한된 곳이 아닐까?)


광평대군묘역廣平大君墓域 도청에서 바라 본 사당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아파트가 시야를 방해...


묘역 출입구 곁에 있는 안내소를 방문하여 광평대군묘역을 둘러보고 촬영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직원의 답변은 너무도 단호했습니다.

"...안됩니다!...숭례문이 불타고 나서 이곳은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잠깐이면 되고 신분도 확실..."



"...안된다니까요!...문제가 생기면 제가 책임질 수도 없는 없는 일 아닙니가?...'

"...아니 잠시 좀 둘러 보겠다는 것도 안됩니까?...소지품검사라도..."

"...허...안된다니깐요..."



"...혹시...이곳에 책임자라도..."

"참...저쪽으로 한번 가 보세요. 엄명이 있어서 제가 허락할 수 없습니다."


광평대군묘역에 있는 무안대군묘 입니다.


  저는 직원이 가리키는 곳으로 갔습니다.
직원이 허락할만한 상황이 아니란걸 모르는 바 아니어서 책임있는분을 만나서 허락을 얻어 낼 심산이었습니다.
직원이 물끄러미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참 그양반 고집도...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무안대군묘에서 바라 본 광평대군묘역의 사당입니다.


제가 찾아간 곳은 종회당이었습니다. 이곳 묘역을 돌보는 종친들의 사무실이죠.
닫힌 문을 통하여 사람을 찾고 마침내 허락을 얻어냈습니다. 촬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
그리고 위의 그림과 같이 광평대군의 묘역을 통과하여 광평대군을 만나러(?)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광평대군묘역 뒷 봉우리에서 바라 본 묘역입니다.


 저는광평대군묘를 향하여 걸음을 옮기면서 속으로 씨익 웃고 있었습니다.
(...아니...내가 김씨도 아니고 박씨도 아니며 더군다나 이 묘역의 주인인 전주이씨는 더더군다나 아닌데...왠 난리?...ㅎ)


주변이 너무도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묘역 봉우리 입니다.


그어떤 성씨를 가졌다한들 저도 이 나라의 한 시민으로써 응당 가져야 할 권리와 의무를 생각하며
제가 이곳을 찾아 갈 권리도 있고 잘 보호해야 할 의무도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곳은 남의 묘역이 아니겠습니까?
분명 저의 선친들이 잠들어 계시는 종묘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묘역 봉우리에서 내려다 본 광평대군묘역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을 있게한 우리 선조들중 한분 이상이 누워 계신 곳입니다.
성씨는 달라도 우리선조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었던 분들이고 설령 그들이 부귀영화를 누렸거나
남들이 겪는 고초를 겪지 않았다고 한들 그들은 이 땅의 자손이 아닐 수 없고
이름없이 산하에 잠든 우리선조들 까지도 오늘날의 우리들을 존재케 한 선조님들 입니다.


이곳이 광평대군묘 입니다.



이 묘역의 주인은 전주이씨 종파지만 설령 이병박대통령의 경주이씨의 묘역이라 한들 제가 찾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모두가 자신의 집안의 일과 관계 없는(?)이런 문화재를 혹 업신여기고 있지나 않은지요?...) 
다만, 이명박대통령도 세월이 지나면 그의 치적이 그대로 神道碑에 적힐것인데,



그의 神道碑에

 '...서기2008년 2월 26일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하고 선조들이 명명한 금수강산에 삽질을 가하여 상채기를 내고
한반도대운하라는 명칭을 붙이며 작업을 계속하다가 백성들의 거센저항에 부닥쳐 대통령취임후 1년 반만인
서기 2009년 8월경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었다. 그가 탄핵된 이유는 삽질 때문이었고 건국이래 유래없는 홍수가
삽질로 흠집낸 한강수계는 물론 이거니와 낙동강수계를 휩쓸고 가면서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를듯 했다..."

와 같은 神道碑가 세워지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 할 것 입니까?...


 광평대군묘역廣平大君墓域에 세워진 비문입니다.


광평대군은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다가 불과 2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
그가 21세에 요절 할 줄 그누가 알았겠는가 말입니다.



광평대군묘역을한바퀴 돌아 보았다. 한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사가들이 쓰기 나름이겠지만 최소한 겉으로 드러난 치적들은 그대로 쓰여지기 마련이고
그 역사는 영광의 역사든지 치욕의 역사든지 이 땅에 고스란히 남아서 후손들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하고
또는 부끄러움을 남겨주는 역사가 되기도 합니다.




뻔한 결과를 놓고 자신의 업적만 드높여 보려는 얄팍한 생각들은 마침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과 후손들에게 까지 대대손손 폐를 끼치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광평대군을 알리는 비碑의 내용은 그를 칭송하는 글들 뿐이었고 요절을 아까워하는 글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광평대군묘비 한쪽이 누군가에 의해서 훼손되었습니다.


봄을 재촉하는 빗방울이 몇방을씩 흩날리는 광평대군의 묘역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런날 광평대군이 혼유석에 나와서 바람이라도 쇨까 싶어서 비석과 혼유석을 번갈아 보았으나
그곳에는 까만 이끼들만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광평대군묘에서 바라 본 광평대군묘역입니다.


  숭례문 소실후의 외양간 고치기와 같은 술회입니다만  광평대군의 묘역을 돌아보면서 제가 느낀 것은
이곳 광평대군묘역이 원형을 잃지 않고 잘 보존된 배경에는 이와 같이 출입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민들을 의식하여 시민들에 야합(?)한 인기몰이로 개방한 숭례문은 결국 노숙자들의 아지트가 되고 말았고
함부로 드나든 중요한 보물에 대한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한채 한 정신병자의 손에 방화될 때 까지
그 과정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찔한 순간들이너무도 많았음에도 그 누구하나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광평대군묘역에 유일하게 보수해야 할 곳이 눈에 띄었습니다. 방책이 다 썩었습니다.



숭례문이 소실된 후 소실 책임을 진 사람은 서울특별시 중구청의 담당직원 3명 뿐이었고
그들이 받은 징계는 입건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정부나 지자체장들이나 관련 공무원들은 무책임하여 발뺌하는데 선수가 되었습니다.



도청의 단청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동안 바라보다.



나라의 기강을 허물대로 다 허물어 놓고 책임을 지게 만든다며 기강을 세우려 한들
실추된 도덕성으로 그 기강들은 쉽사리 잡히지 않을 것 같기에 광평대군묘역과 같이 사전에 사고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제한적으로 페쇄하는 방법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이곳은 영순군묘 입니다.



영순군묘에서 바라본 광평대군묘역 입니다.


저도 여러 고궁과 문화유적들을 둘러 볼 기회가 많았지만 이처럼 단아하고 조용하게 잘 보존된 묘역은 처음 보았습니다.
지척에 두고도 자주 찾지 못하는 선조들의 얼이 담긴 이런 문화유산,...
 정말 소중하게 느낀 하루였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우리 문화재(또는 문화유산)에 대한
제한적입장 내지는 폐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광평대군묘역 입구에 있는 종가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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