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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게바라를 촬영한 코르다의 두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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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가 되라,불가능한 꿈을 가지라!
-체게바라를 촬영한 코르다의 두얼굴-


Be realistic, demand the impossible!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가지라!

...

체게바라와 코르다 사진전이 열리는 삼성동 코엑스 앞에서
체게바라(이하 '체'라 부른다)의 모습이 담긴 현수막을 보자마자 참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코엑스는 얼마전 G20 정상회의가 열렸던 곳인데
체가 살아있었다면 과연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이곳에서 전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들이었다.

그런 한편 체를 연상하면 절로 떠오르는 그의 명언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코엑스 1층 전시관에 마련된 코르다 사진전에
그의 명언이 뚜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가지라!...



코르다의 이름은 이렇게 탄생 됐다. 1928년 쿠바의 아바나에서 철도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알베르토 페르난도 디아스 구티에레스'는 상업학교를 나와 의약품 외판원으로 살아가다가 1954년 친구와 함께 광고사진 스튜디오를 열면서 코르다(Korda)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노르카(코르다의 아내) 등 최고의 모델들의 사진을 찍으며 쿠바 패션사진을 이끌던 코르다는 1960년 쿠바혁명이 일어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새로이 발간된 일간지 "혁명"의 취재단이 되어 혁명을 이끌던 피델 카스트로의 사진을 찍게 된 것이다.


이후 코르다는 1968년 까지 10여 년간 피델 카스트로를 동반하여 쿠바의 아바나, 시에라 마에스트라,오리엔테 지방은 물론 베네수엘라,소련, 미국 등지를 여행하며 사진으로 쿠바혁명을 국내외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진보와 이상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게릴레로 에로이코(Gerrilero Heroico)'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체의 사진은 1960년 아바나에서 찍은 사진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고  인용된 사진이다.검은 베레모를 쓰고 강렬하지만 우수에 찬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휴머니스트이자 혁명가의 모습을 코르다가 담은 것이다.
<자료: 체게바라와 쿠바 코르다 사진전 홈피에서 http://kordaphoto.co.kr/artist/ >


바로 이 모습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고  인용된 사진이며, '게릴레로 에로이코'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체의 사진이다. 그런 한편 1970년대 후반 이후 코르다는 해양 사진에도 관심을 가져 쿠바 해양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카리브해 깊은 곳의 풍경을 촬영하여 잠수하는 피델의 모습과 함께 남기기도 했다.


말년에 코르다는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뉴욕,파리,마드리드,밀라노 등 세계 각국에서 여러 전시를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널리 알리며 쿠바의 대표적인 사진작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코르다는 2001년 개인전을 위해 파리를 방문하였다가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알베르토 페르난도 디아스 구티에레스(Alberto Fernando Diaz Gutierrez)는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당시 쿠바에서 사진으로 가장 유명했던 코닥(Kodak)과 비슷하면서 한편으로 유명한 헝가리의 영화감독 코르다 형제(Alexander & Zoltan Korda)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예명을 코르다(Korda)라고 지었다. 


체게바라와 코르다 사진전이 열리는 삼성동 코엑스 전시관은
코닥필름을 연상케하는 짙은 노란빛이 부스를 감싸고 있었다.


그곳에서 두 대학생들의 모습을 만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부스 바깥에서 체의 모습을 카메라에 열심히 담고 있었는데
그 장면은 누가 봐도 체를 좋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들은 리얼리스트가 되고 싶은 학생들이며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고 싶은 젊은이들이었을까. 체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내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촬영을 부탁했다. 그런 학생들에게 내가 촬영한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위 3장의 사진들) 고마와 했다. 그러나 내가 더 고마웠다. 내가 고마워 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나도 체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체게바라와 쿠바 코르다 사진전이 열리는 부스 속의 모습은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어서 도록을 통해 코르다를 만나는 한편, 부스 바깥 풍경을 통해 체와 코르다의 흔적을 만나는 것으로 족했다. 코르다는 너무도 유명했지만 내겐 여전히 낮선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나의 욕심은 코르다의 작품을 카메라에 담아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스를 맴도는 동안 아이러니한 역사의 현장 앞에서 체의 존재감이 초라해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체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항상 부조리에 분노한다면 너는 곧 내 동료다.
If you tremble indignation at every injustice then you are a comrade of mine.


사회주의도 자유민주주의도 주의란 주의 내지 계급사회 모두는 저 만치 사라지고 있었던 것일까.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열강들이 사회주의를 짓밟고 존재감을 나타내려고 할 즈음 자유민주주의의 허상이 거짓말 처럼 속임수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 사회주의는 체 조차도 거부감을 들어내며 몸서리칠 정도로 자본을 닮아가며 휴머니티를 상실해 가고 있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체와 코르다의 사진전을 전하고 있는 커뮤니티에서 코르다의 사진전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는 이면을 재조명 해 보니 체의 '게릴레로 에로이코'는 입장객을 향해 1만원의 돈을 요구하고 있었다. 입장료 만원이 아까웠던 게 아니라 자본의 상징이 된 코엑스 한편에서 쪼구려 앉은듯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체는 철저한 상업주의 내지 자본의 논리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고 있었던 것이며, 체가 싫어했을 부조리가 내 앞에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체가 살아있었다면 결코 용서하지 못할 행위가 아니었을까. 체는 그저 미완의 혁명가의 아이돌로 코엑스에 전시되고 있는듯 했다.

나무토막인형을 안고있는 소녀 1959년 作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가지라!...

주지하다시피 체가 현실과 타협했더라면 오늘날 처럼 대학생들이 '체게바라의 평전'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본과 권력의 품에 안겨 그저 세상을 편안하게 즐기면 되었을 것이며 체는 얼마든지 그럴 능력이 있었다.

2관 앞 코르다 작품, '프롤로그(Prolog)'로 이름 붙여지다.

그러나...그러나 체 뿐만 아니라 자본과 권력이 합세하여 만든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면 누릴수록 더 많은 우리 이웃들이 한숨을 쉬며 피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다는 부조리 내지 불합리를 인식하는 순간 당신이 앉은 자리는 '가시방석'임을 느끼게 될 터인데 우리는 그저 그의 혁명적 초상 앞에서 그를 그리워만 하고 있어야 할까.


코르다의 작품을 전하는 연보를 살펴보니 코르다 또한 자본과 계급사회를 오간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10여 년간 피델 카스트로를 동반하여 쿠바의 아바나, 시에라 마에스트라,오리엔테 지방은 물론 베네수엘라,소련, 미국 등지를 여행하며 사진으로 쿠바혁명을 국내외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 동시에 그 자신의 명성 등을 위해 말년에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뉴욕,파리,마드리드,밀라노 등 세계 각국에서 여러 전시를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널리 알리며 쿠바의 대표적인 사진작가로 자리 잡았다. 코르다는 체의 검은 베레모와 강렬한 듯 우수에 찬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휴머니스트이자 혁명가의 모습을 사진에 담은 작가가 확실하다. 그러나 그를 통해서 체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자본과 의기투합하며 민중들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 했던 때문일까. 
 


코르다의 사진전은 다섯가지의 주제로 전시되고 있었는데 자연광을 이용해 사진찍기를 좋아하던 '코르다의 스튜디오'에서 부터 1959년 쿠바혁명을 담은 '지도자들' 모습과 혁명과정에서 마주친 '민중'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촬영한 민중들 모습속에서는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할 수 없다. 혹자들은 밝은면을 조명했다고 말하지만 그는 민중들과 어울릴 이유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사진을 통해 혁명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또 아름다운 여성들을 좋아한 코르다는 '여인들'을 주제로 삼는 한편 그의 아내 노르카도 사진을 통해서 만난 여성이었다. 또 정치적 이유 등으로 스튜지오를 압류당한 코르다가 '바다'를 주제로 작품을 남긴 점 등은 코르다가 체의 이미지를 담은 것과 별개로 체가 말한 리얼리스트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다. 또 코르다는 '네가 항상 부조리에 분노한다면 너는 곧 내 동료다'라고 말한 체의 명언 따위에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 내가 꿈꾸는 그곳 다음 블로그(내가 꿈꾸는 그곳.)에도 글을 싣고 있습니다. 성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그러나...그러나 코르다가 촬영한 체의 모습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헛헛한 세상에서 방황하며 살고 있었을까.

 체는 자유민주주의 허상을 잘 비출 수 있는 거울이자
여전한 리얼리티로 내 앞에 나타나 있었다.

Be realistic, demand the impossible!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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