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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쓰레기와 함께 내던져 버린 '효심'...요즘 우리 모습?

쓰레기와 함께 내던져 버린 '효심'...요즘 우리 모습?


통영을 떠나며 눈에 띈 정당샘을 둘러 보고 나오면서 바로 앞에 흉물스러운 모습을 한 기와집이 눈에 들어 왔다.
2차로 건너편에는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

심상치 않아 보이는 기와집 근처는 가리게로 가려 놓았다.
외부에 노출되어서는 안되는 그 무엇이 이곳에 있나 보다하고 가까이 가 봤다.



그곳에는 한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 건물의 내력이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그속에는 '지극한 효심'을 기린 '효열조씨정려기'가 소상하게 설명되어 있고 100년도 더 된 오랜 우리의 문화유물이었다.




 孝熱趙氏旌閭記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孝熱趙氏旌閭記


 이 정문旌門은 증참판 贈參判 김귀반金貴攀의 아내이며 오위장五衛將 김시진金時鎭의 어머니 함안조씨咸安趙氏가효성을 다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정성을 다하여 남편을 받들었던 행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고종 20년(서기18883년) 왕명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함안조씨는 어렸을 적부터 성품이 유순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출가하고도 그 효성을 시부모님에게로 옮겨 극진히 모시므로 마을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855년(乙卯年), 그의 남편이 우연히 중병을 얻어  백가지 약과 기도도 효험이 없어 절명직전에 이르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먹였다. 다행히 조금 차도를 보이는듯 했지만 수일후 다시 병이 재발하자 이제는 왼쪽 허벅지 살을 베어 흐르는 피를 받아 먹였으나 끝내 보람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조씨의 나이는28세 였다.



근친이라고는 없고 네살되던 아들을 의지하고 지내던 중 시아버님이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실설증失性症을 일으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으로 혹은 바다로 뛰쳐 나가므로 그때마다 울면서 찾아다녀 모시고 돌아오기를 근일년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시아버님이 전신불수가 되자 10년을 변함없이 시탕侍湯을 올리고 온 정성을 다해 병간호를 했으나 끝내 돌아 가시자 몹시 슬퍼하였다.



그뒤 시어머님이 등창을 앓을 때는 대접같이 큰 부스럼의 농즙膿汁을 입으로 빨아내곤 하다가 입부스럼에 걸려 고부姑婦가 함께 고생을 하기도 했으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마침내 시어머님의 등창과 자신의 입부스럼이 모두 나았다.



조씨의 나이가 육순을 넘게되자 외아들 김시진이 이미 장성하였고 그의 자녀들이 입신양명하여 마침내 조씨는 자손을 거느리고 안락을 누리게 되니 주위의 모든사람들이 다 부러워 하였다.



1882년(壬午年) 2월 15일 왕의 행차때 주씨의 아들 김시진은 그 모친의 효열행록을 가슴에 품고 왕이 지나가는 길가에 엎드려 꽹가리를 치고 하소연하여(격쟁擊錚 ) 고종께서 그 사연을 들으시고 조씨의 지극한 효열행에 감동하여 관영으로 효열조씨孝熱趙氏 정문旌門을 건립하고 그 자손들에게는 모든 잡역雜役과 환상還上을 감면토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예조판서는 경상도 관찰사에게 지시하고 관찰사는 고성부사에게 정문건립을 명하고 이를 통제사에게 보고하였다.고종20년(1883년), 마침내 조씨의 자택앞에 정문이 서고 단청丹靑이 찬란하니 앞을 지나던 행인들이 눈물을 짓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이 정문旌門에 있는 현판은 오위장五衛將 김시진이  그의 어머니의 효열행상孝熱行狀을 판각板刻하여 영구히 전하고자 제208대 홍남주洪南周통제사에게 요청하여 통제사가 글을 짓고 성균관박사 김정우金正佑가 썻다. 



 나는 이 안내문 앞에서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안내문에 씌여진 사실들은 바쁘게 돌아서는나를 붙들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100년이 지나면서 많이도 달라져 있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일들을 눈을 씻고 찾아 볼래야 볼 수도 없지만
만에하나 이런일을 일부러 시키면 뛰쳐 나가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세상은 '孝'를 상실하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다.
忠孝를 덕목으로 삼으며 살아가던 우리의 옛모습은 이렇게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피붙이를 함부로 버리는 일이나 툭하면 이혼을 서두르는 오늘날의 풍경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들이건만
적지않은 우리선조들의 삶의 모습은 이러했다.



결혼을 하여(출가) 시댁에 온 몸과 정성을 다하고 시댁은 또 그 며느리를 친딸처럼 여기던 모습과
그 아들이 그 효심을 본받고 또 동네 사람들이 그 효열을 기릴 정도면 효열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 있는데
이렇게 다 쓰러져 가는 효열조씨孝熱趙氏 정문旌門을 바라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요즘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고 씁쓸한 생각이 자꾸만 든다.

마치 손발을 쓰지 못하는 어른을 팽개쳐 둔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바라건데 孝熱趙氏와 같은孝熱은 행하지 못할망정 최소한 다 쓰러져 가는 이 정문하나라도 제대로 세웠으면 한다.
이곳은 이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렬사 바로 코 앞에 위치해 있고
숭고한 이충무공의 뜻을 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하는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유래가 담긴 귀한 정문을 그동안 잘 관리해 왔을 것으로 여겨지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쓰레기더미와 함께 방치해 둔 정문은 빠른시일내에 제정비하고
우리들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다시 세워야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복지사회로 나가는 지름길이다.

 효열조씨孝熱趙氏의 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베스트 블로거기자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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