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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으로 변한 광평대군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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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으로 변한 광평대군 묘역


변함없이 한 자리를 지킨다는 건 쉬운 듯 결코 쉬운 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이틀전 서울에 함박눈에 쏟아진 직후 광평대군묘역에서 하얀 눈을 온 몸에 두르고 있는 문인석을 보며 떠 오른 생각입니다. 꼭 작년 이 맘때 쯤에 살포시 내린 눈 때문에 광평대군묘역에 들른 이후<눈 덮힌 '광평대군' 묘역 다녀 왔습니다> 1년 만에 다시 찾은 광평대군 묘역은 모처럼 쏟아져 내린 폭설에 매우 평온한 모습이었습니다. 종중에 허락을 받고 다시찾은 이곳에는 아무도 다녀간 사람들이 없어서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 조차 조심스러웠는데요. 세상 모든 것을 덮어버린 듯 하얗게 변한 묘역을 보니 설국雪國이 이런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세상 모든 추함을 다 덮어 버리고 거룩하고 순결함이 지배하는 세상은 요원한 것일까요. 서울 수서동 궁마을의 나지막한 산 위 광평대군의 묘에서 바라 본 묘역의 모습은 '하얀나라'를 꿈 꾸는 보통사람들의 소박함을 위해 하늘이 내려준 큰 선물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사회적 지위 등에 따라 중간 위치를 점하고 있는 분들이라고 한다면, 그 자리를 지켜내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야장천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으며 운명 처럼 맡겨진 삶에 감사하며 사는 일 말이죠.

 다시찾은 광평대군 묘역에 눈에 띄게 도드라진 점이 발견되었는데요. 작년 이 맘때와 달리 묘역 주변에 서 있던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태풍 곤파스에 의해 많이 훼손되었다는 점입니다. 태풍에 훼손된 소나무들을 정리해 놓은 모습을 보니 줄기만 남아 앙상한 모습이었는데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래 광평대군묘역을 소개한 글과 같이 묘역은 약 500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는 모습 같지만, 이처럼 모진 풍파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모습 때문에 광평대군 묘 앞에서 묵묵히 서 있는 문인석이 더욱 돋보였습니다. 마치 우리네 보통사람들이 그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을까요. 자신의 존재나 사회적 위치를 지킨다는 것은 그래서 곁코 쉬운듯 쉽지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광평대군 소개글과 함께 묘역을 둘러본 사진과 영상을 통해 설국으로 변한 광평대군묘역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






광평대군묘역에는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과 그의 부인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신씨(申氏)의 묘를 비롯하여 태조의 아들인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그리고 광평대군의 아들인 영순군(永順君)을 비롯한 종문 800여기의 묘소가 같이 있다. 또한 이 곳은 종가 재실(齋室)의 오랜 가옥이 있는 공동묘역으로서, 이 때문에 마을을 궁말[宮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광평대군의 이름은 여(璵),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으로, 세종 7년(1425) 5월에 탄생하였다. 세종 14년(1432) 정월에 광평대군으로 봉해졌으며, 5년 후에는 세종의 명으로 후사가 없는 공순공[恭順公, 후의 장혜(章惠)] 방번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온 대군은 문장은 물론 활쏘기와 격구 또한 잘하고 음률과 산수에 밝아 특히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무안대군의 봉사손으로 입양된 후에는 안암동(사당말)에 양부의 사당을 짓고 그 후 7년간을 기거하였다. 동지중추부사 신자수(申自守)의 딸과 결혼하여 영순군 부(溥)를 두었으나 세종 26년(1444) 창진(瘡疹)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시호(諡號)는 장의(章懿)로 장(章)은 경신고명(敬愼高明)을, 의(懿)는 온유현선(溫柔賢善)을 의미한다. 광평대군의 묘는 처음에 경기도 광주 서촌 학당리(현 강남구 삼성동 선릉 부근)에 있었는데 연산군 원년(1495) 3월 이곳이 성종의 왕릉인 선릉(宣陵) 터로 정해지면서 광수산(光秀山)의 지금 위치로 이장되었다.

광평대군과 부인 신씨의 묘소는 높은 언덕 위에 각각의 무덤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단을 쌓은 위에 봉분이 놓여져 있고, 그 아래에 묘비와 낮은 받침돌을 둔 혼유석(魂遊石)이 갖춰져 있다. 하단에는 2기의 장명등(長明燈)과 우측에 신도비(神道碑), 그리고 또 한 단 아래 좌우로 문인석(文人石) 2구가 세워져 있다. 이와 같이 단을 쌓은 위에 봉분이 있는 양식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이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소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 조선 초기 대군묘(大君墓)의 규모나 규범을 참고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도비는 명종 7년(1574)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심의겸(沈義謙)이 짓고, 두전(頭篆)은 박렴(朴簾)이 썼다.

대군의 묘 아래에 있는 제각(祭閣)의 동쪽에는 '廣州治西光秀山李氏世葬記(광주치서광수산이씨세장기)'란 이름의 세장기비(世葬記碑)가 있다. 이는 숙종 21년(1695)에 조사한 186기 무덤의 위치를 조사한 내용을 평양부윤(平壤府尹)을 지낸 후손 이유(李濡)가 짓고, 이담(李湛)이 쓴 것을 비석에 새긴 것으로 가족 묘소로서의 오래고도 광대한 면모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묘역은 서울이나 근교에 현존하는 왕손의 묘역 중 가장 원형에 가까운 것이며, 분묘와 비석, 그리고 부속물들은 조선시대 분묘 내지 석비 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서울문화재 http://sca.visitseoul.net/korean/relics/i_mausoleum09003.htm


설국으로 변한 광평대군 묘역


































































































지난 한 해 각자의 위치를 잘 지켜내신 여러분들께 힘찬 응원과 격려의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아울러 '내가 꿈꾸는 그곳'을 성원해 주신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 드립니다.
신묘년 새해에도 변함없는 성원 있으시기 바라고요. ^^
가내 두루 평안하시길 소원하며 무엇 보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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