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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활주로에서 만난 '바람'같은 아파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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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주로에서 만난 '바람'같은 아파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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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주로를 따라 이리 저리 발가는 대로 축제장을 돌아보다가 활주로 중간쯤에 낮익은 명칭이 보였다. 천막 한가운데 아파치 Apache...라고 쓰여진 글이었다. 그곳에는 작은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무대위에는 마이크와 인디언(또는 인디오)들이 주로 사용하던 각종 악기들이 공연준비를 위해 놓여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마이크에 작은 악세사리가 달려있었다. 그건 오래전 몽골로이드 샤먼들의 복장에 장식으로 달려있던 것들이었고 작게 만들어져 마이크에 걸려있는 모습을 보니 공연에 나선 사람들의 분장 모습이 샤먼의 후예 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언제 부터인가 샤먼들의 정체를 쫒아 다니고 있었고 까마득한 선조들의 흔적을 안데스에서 산자락에서 겨우 발견했을 뿐이었다. 지금으로 부터 약 1억년전 후 어느날 바람같이 나타나 구석기시대를 청산하고 신석기시대를 열며 자연과 함께 태고의 세상을 지배한 그들이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로 지구상에서 가장 용맹한 부족으로 명성을 떨친 자손들이 아파치족 모습이었다.

Apache festival & 2009 제천 한방건강축제





나는 즉각 악세사리들이 상징하는 주술적인 의미와 함께 그들이 사냥에서 돌아와 부족들과 함께 축제를 여는 모습을 상상하며 천막 뒤편에서 쉬고있는 인디언들을 만났다.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아파치가 아니었고 엘살바도르에서 온 인디언들 이었다. 하지만 아파치 등과 피를 나눈 사촌과 다름없었고 그들은 나의 유전자와 가장 많이 닮은 사람들이었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98.2%정도로 매우 가까운 유전인자를 구성하고 있다는 게 아메리카대륙의 인디언들이었다. 물론 지금은 혼혈로 그 마저도 퇴색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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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한반도로 진출한 몽골로이드 였고 최근 학계에 보고된 요하문명의 주역들일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곰과 호랑이를 숭배한 기록이 담겼고, 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 大野勃'이 719년(무왕 1)에 썼다고 하는 '단기고사'의 선조들 보다 더 오랜 시간전에 만주벌판 북방을 지배한 사람들이었다. 광개토대왕의 호연지기를 떠 올리면 이들의 용맹스러움은 금방 기억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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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반가워 천막에서 축제 준비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이역만리 먼 곳으로 되돌아 온 그들은 그들 선조들이 살던 언어는 모두 잊고 살며, 인류최대의 침탈자며 살륙자들인 에스파냐인 등의 문화침략으로 스페인어를 구사하며 나와 대화하는 동안 행사 시작전에 공연 모습 일부를 보고 싶다고 말하자, 아파치공연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인 단장의 허락을 얻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인디언축제의 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은  
'2009 제천 한방건강축제 http://www.jcfestival.or.kr/~jcfestival/f_..'가 열리고 있는 제천시 제천비행장 활주로 위에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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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공연 준비에 나서며 악기를 다루고 춤을 추는 동안 내 마음속은 환희와 희열로 들떠 있었고 덩실 덩실 그들과 함께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난 카메라를 들고 소중한 그들의 춤사위와 노래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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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나의 마음은 최고로 용맹한 아파치 후손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 됐다. 그들이 잃어버린 드넓은 아메리카 대륙은 모두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등 침탈자들의 손에 넘어갔고, 마지막 까지 북아메리카 침탈에 저항한 그들에게 허락된 곳은, 좁은땅 한반도의 변방과 다름없었던 제천의 어느 활주로 위 너댓명이 겨우 서서 연주할 수 있는 작은 공간만(?) 남았으므로 속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처럼 드넓은 공간에서 춤과 노래로 활주로를 금방이라도 이륙할 태세의 독수리 처럼 날개짓을 힘차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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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막 활주로를 이륙하는 비행기 처럼 먹이 앞에서 최고의 에너지를 끌어 올리며, 사냥을 마친 후 부족들 앞에서 그들에게 만찬을 허락한 하늘의 신께 감사를 표현하는 한편, 늑대가죽으로 만든 북을 두들기며 신명나게 소리를 지르며 흥에 겨워 아무 막대기나 집어 들고 춤을 추는듯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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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지르는 괴성은 동물들의 그것과 별 다를 바 없었고 활주로를 내딛는 발은 용수철 처럼 튀어 오르며 샤먼의식의 진수를 보여주는듯 했다. 이들의 모습이 그토록 용맹한 아파치 모습이었고 영상에서 확인된 아파치들의 춤사위 였다. 이들은 페루등 잉카문화권에서 건너 온 잉카뮤지션들과 달리 지극히 동적動的이었으며 샤먼의 지휘에 충실한 샤머니스트들이자 한마리의 용맹스러운 호랑이나 사자처럼 드넓은 대지를 달리며 포효하는 가장 자연스러운(Nature)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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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를 중심으로 한 안데스의 잉카 뮤지션들에게 대단히 미안하지만 ,그들이 지구상 최고最故의 국가중 한 나라인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보여주는 공연한 음악들이나 몸짓들은, 마치 동물원에 갇힌 맹수들이 밥을 달라며 보채는듯한 나약한 모습이었고, 혹자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지하철공연단'이라며 폄하 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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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도시 마츄피츄가 있는 페루의 잉카유적지 어디를 가나 'El condor pasa'라는 슬픈 음악도 따지고 보면 '펄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이 부른 곡을 개사한 것일 뿐, 그들의 노랫말 어디에서도 잉카의 용맹스러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 현대에 사는 잉카인들은 여전히 서구의 현대 음악에 문화적 지배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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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들은 신세를 한탄하는 듯한 '한恨의 문화'로 자신들의 처지를 위안하고 있었는데 그것 또한 잉카인들이 스스로 원했던 게 아니라 잉카제국이 멸망한 이후 400년 이상 계속 이어진 지배자들의 핍박에 따라 마침내 맹수 처럼 용맹스럽고 대자연 처럼 인자한 모습은 어느덧 사라지고, 그들의 문화를 보러 온 관광객들에게 손을 내미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남미대륙의 잉카인들의 현재 모습이 그렇다면 북미 대륙의 터줏대감이었던 아파치는 어떤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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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치족들이 살았던 북아메리카의 영토는 지금의 미국 애리조나 주 중동부와 동남부, 뉴멕시코 주 남서부와 동부, 텍사스 주 서부, 멕시코의 치와와 주 북부와 소노라 주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지역적 분포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아파치족의 언어가 캐나다에서 쓰이는 '아타바스카어'와 약간의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바호족'의 선조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선조도 멀리 북쪽 지역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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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북쪽이란 알라스카 지역을 끼고 있는 베링해며 빙하기와 간빙기를 거듭하는 동안 걸어서 이동할 수 있었던 베링해는 몽골로이드가 아메리카대륙으로 이동한 지역이었던 것이며 그들이 살던 고향은 대체로 바이칼 호수 부근이었던 것이다.

나는 단지 아파치 분장을 하고 나선 이들의 모습만 봐도 반가워 했는데, 아메리카 대륙을 침탈한 침략자들은 아메리카대륙의 침략을 정당화 하기 위해 '서부영화'를 만들어 배급하면서, 적반하장 격으로 자신들의 영토를 인디언들이 침범하는 인디언들의 왜곡된 모습을 그려 세계도처에 침략의 정당성(?)을 알렸던 것이다. 그런 모습은 최근 물러난 전쟁광 부시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니 기막힌 도적질 역사다. 남의 땅을 빼앗는 일이 개척사며 프론티어 정신인가? 도둑질이나 강도질이며 미친너미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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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아무런 비판없이 재미있게 본 그 영화들은 머리가 커지고 야물어지자 침략을 정당화 하기 위해 세계적 여론을 만들고 있었던 문화적침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들의 몸집은 아파치들이나 세계의 인종이나 국가 모두가 덤벼야 싸움에 이길 정도로 비대해 져 있었다. 아파치족들은 평원에서 농사를 짓거나 들소 사냥을 하는 인디언들과 달리 리오그란데 강 서쪽의 아파치족 중에서 호전적인 부족으로 유마 인디언들과 함께 자주 약탈을 한 사나운 인디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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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치 전쟁은 스페인이나 프랑스 영국 등이 '개척지'라는 이름으로 인디언들의 영토를 빼앗으며 일어난 전쟁 가운데 가장 치열한 전쟁이었는데, 아파치족은 스페인인, 멕시코인, 후에는 미국인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려고 했지만 1861년 추장인 코치즈가 전쟁을 일으킬 때 까지 평화가 유지되었다. 아울러 말이 우호였지 침탈행위에 배알이 뒤집힌 아파치 추장 코치즈가 일으킨 전쟁은 미국 연방군과 남서부 인디언 사이에 25년 동안 계속된 아파치 전쟁과 나바호 전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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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국 연방군의 우수한 무기 등에 압도당할 수 밖에 없어서 아파치 전쟁은 결국 1886년 제로니모와 소수의 추종자들이 항복함으로써 끝이 나고 말았다. 물론 아파치족들은 동물원에 갇힌 사나운 맹수처럼 보호구역에 갇혀 뱃살만 키우며 하늘만 바라봐야만 했는데,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한 공연이 아파치 복장과 악기 등으로 구성된 인디언들의 음악이었고 샤먼의 의식과 닮은 축제 모습이었다. 미국인들이 본  아파치들이 얼마나 싸움에 능란했으면 '아파치헬기'와 같은 전투헬기 이름을 지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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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출귀몰의 대명사가 아파치였으므로 아파치헬기 조차 그 이름을 땃을 정도다. 그러나 사진에서 보는 것 처럼 그들의 복장 전부는 자연에서 얻은 것이며 동물들의 가죽과 깃털이나 나무열매나 식물등을 소재로 쓰였다. 그들의 문화는 이제 착한 공연자가 되어 축제장 곳곳을 다니며 잃어버린 아파치 문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나는 그들 복장 등을 보며 까마득한 과거의 우리 선조들의 원형을 아파치 복장에서 찾고 있었으며 이들 복장은 대체로 부족의 리더자 영계의 신과 소통을 담당하고 있는 샤먼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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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한반도에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제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며, 제천의 상징과 같은 제천 제1경인 의림지 앞 제천비행장 활주로에 선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충북 제천시 모산동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중 하나인 '의림지 義林池' 둑 아름답고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솔 숲에서 바라보면 지척에 '2009 제천 한방건강축제 http://www.jcfestival.or.kr/~jcfestival/f_..'가 열리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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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 제천 한방건강축제 http://www.jcfestival.or.kr/~jcfestival/f_..'가 열리고 있는 제천 제1경 의림지의 신비스러운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는 전북 김제의 벽골제와 경남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의림지이지만 현재도 수리시설에 이용하고 있는 저수지는 의림지가 유일하다. 의림지는 빼어난 경관과 더불어 저수지 둑에 균열을 염려하여 심지않는다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저수지 주변을 신비롭게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륵 선생'이 가야금과 함께 말년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우륵대(일명 연암,용바위)가 있는 곳이다.

 

참고로 의림지 영상을 담아 봤습니다.

신라 진흥왕 때 우륵于勒이 처음 방죽을 쌓은 '임지'로 알려진 의림지는  700여 년 뒤인 고려시대에, 고을현감 박의림朴義林이 다시 견고하게 쌓으면서 '의림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니 우리 농경문화 발상지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는 곳 또한 제천의 모습이다. 아마도 바이칼 호수 주변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이동한 신석기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하여 남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또는 북서쪽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반도로 이동한 사람들이나 아메리카대륙으로 이동한 사람들 모두 곰과 호랑이에 얽힌 전설을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었고, 우리는 '단군신화'로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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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파치를 꽁꽁 묶으며 그들의 호연지기를 자른 사실과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인디언들을 대부분 살륙한 그들은, 중남미 인디언들을 지배하면서 '엥꼬미엔다'제도를 통해 수탈을 거듭하며 그들의 신앙을 말살한 것과 같이 이 땅에도 다시 바이블을 들이밀며 신화는 신화일 뿐 실체도 없는 대상을 예배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파치족들이나 잉카인들 모두 그들이 대를 이어살고 있던 땅에서 쫒겨났고 샤먼을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던 그들의 신은 어느덧 미신으로 전락하며 '원시原始종교'의 이름에 걸맞지않는 '샤머니즘'으로 분류되며 단지 신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의 연구대상이 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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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축제가 시작되기도 전 짧은 시간, 적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펼쳐진 리허설 겸한 공연은 신명나는 한판이었고, 그들의 아파치 분장이 펼치는 카리스마로 인하여 갇혀있던 나의 마음이 아파치 머리에 쓴 장신구가 깃털에 하늘 거리는 것 처럼 가볍게 나부끼며 깊숙한 엑스터시를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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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주로를 힘차게 맴돌던 그들은 무대위에서 간간히 활주로로 내려오기를 반복하며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들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던 내가 보기엔 단군 할아버지 이래 약 5천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제천에서 펼치는 행사 중 가장 큰 행사가 금번에 열리므로 농경문화를 처음 연 조상님들이 기뻐 날뛰며 좋아하는 모습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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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각으로 아파치 공연을 바라보면 이들은 얼마전 공연기획자의 놀이감으로 전락한 유진박의 비애 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개척'의 이름으로 침탈을 거듭한 족속들이 내세운 가치가 바닥난 가운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남겨둔 종자씨 같다는 생각도 아울러 들었다.

 따라서 나는 제천의 활주로에서 거행된 축제 준비 모습을 보면서  축제 개막에 앞서 시연한 아파치들의 축제와 더불어 자연이 내려준 식물을 먹고 살던 우리가 식물을 이용하여 무명장수를 꿈꾸었던 선조들의 모습을 유지하고 발전 시키려는 모습이 아파치로 분장한 인디언 뮤지션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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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농경사회의 특징 처럼 정적으로 살아오던 제천 사람들에게 주어진 동적 축제의 기회가 우연히(?) 활주로 위에서 거행되고 있는 것이므로 제천시가 내륙의 지자체 중에서 제일 먼저 활주로 위로 비상하는 독수리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비상을 돕기 위해 상승 바람과 같은 기운을 불어 넣는 게 아파치들의 한판 축제인 인디언 페스티벌로 생각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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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축제라는 말이 낮설기 시작했는데 외래 문물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음악이 없으면 흥겹지 않았고 술이 없으면 흥겨울 일이 없었다. 샤먼들이 두드리며 연주하던 타악기나 관악기는 어느덧 서양의 악기들로 채워졌고 클래식으로 포장된 음악을 모르면 예술인의 범주에 들지도 못하는 세상이 됐다. 기분좋을 일이 흔치 않지만 기분이 좋으면 좋은대로 노래하며 춤을 추고 기분이 나쁘면 내 잘못으로 여기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는 일 조차 쉽지 않아, 늘 속절없이 누구에게 구속 당하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생긴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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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음악이나 미술 등 문화의 원형도 아파치들의 축제 모습과 같거나 비슷한 곳에서 시작되었고 격식을 갖춘 것만이 가치는 아니었는데, 우리가 서양의 문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동안 마치 우리 몸에 잘 맞지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한 불편과 동시에, 우리가 먹는 음식들도 어느새 우리 몸이 거부하는 음식들로 채워져 동양인도 아닌 서양인의 모습은 더더욱 아닌 모습으로, 정체성을 찾지 못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지 중환자의 모습으로 제천의 한 활주로 까지 찾아나서 문화의 원형을 만나며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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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인은 아파치들이 어느날 바람처럼 활주로에 서 있는 것 처럼 마음따라  끄적이고 있다. 아파치들의 축제가 시작되기전 아파치의 모습이 담긴 작은 악세사리를 보며 생겼던 별의 별 상념들은, 정말 어느 한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바람과 같았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까마득한 과거의 시간을 박제해 둔듯한 샤먼의 카리스마가 담긴 표정들 앞에서 과거의 시간들이 다시금 현재로 회기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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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치들의 축제는 그래서 내 마음속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나(我)를 흔들어 깨우는 신성한 의식이기도 했다. 이들이 섬긴 신들은 자연이었고 그들은 자연의 일부였으며 신은 자연 속에 인간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그 인간들은 바람이 불 때 마다 바람에 실려 나부끼는 깃털처럼 흔들렸는데 제천의 의림지 앞 제천비행장 활주로에 기분좋은 새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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