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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바보대통령 영결식 지켜 본 '향원정' 비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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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대통령 영결식 지켜 본 '향원정' 비 내리다!
-명성황후 시해 지켜 본 향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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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시는 건청궁 앞 향원정 모습은 참 슬픈 모습이었다.
곧 쓰러질듯 겨우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낡은 모습의 '취향교 醉香橋'를 보니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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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일) 아침 오전 9시30분 경,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보딩패스를 앞둔 딸래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녀석은 미국의 모대학 초청으로 짧은시간 공부를 하러 떠나는 여행이었지만
지애비와 달리 미국을 늘 동경하는 딸래미였다.

향원정에 비가 오시던 날 딸래미와 함께 경복궁을 둘러 보면서 향원정을 걸었던 것인데
최근 녀석을 만난 장소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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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만 해도 노 전대통령은 김해 봉하마을에서 아침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검찰과 언론 등이 흠집내기를 하고 있어도 별 탈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복궁 향원정에 내리는 굵은 빗줄기가
선조님들의 '통곡의 눈물'이라는 걸 알아차린 때는 이틀 후 였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경복궁에 내리던 그 빗줄기가 노 전대통령의 서거를 암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딸래미와 향원정을 걷는 내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떠 올리며 기분이 울적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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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래미가 좋아하는 미국은 한때는 내게 동경의 나라이기도 했지만
그 동경의 마음이 생겼던 것은 그들이 의도적으로 생산한 '서부영화' 때문이었고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본 서부개척사를 그린 그 영화속에서
나는 아메리컨 인디언을 미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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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한편 그들의 '개척정신'을 본받을만 하다고 여겼던 것인데
머리가 점점 커지면 커질수록 '아니다'라는 생각이 지배하며 미국은 '망각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들의 영화속 적들은 우리와 피를 나눈 몽골로이드 였고
그들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아메리카 땅을 침탈한 역사를 영화 등으로 포장하며 미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명성황후를 일본의 자객에 의해 잃은 후 겨우 해방을 맞이했건만
해방 후 우리나라는 다시금 미국에 의한 문화적 침탈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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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정에 내리는 비는 오늘날 과학적 잣대로 보면 일기의 한 현상일 뿐이지만
오감이 극대화 될 수 있었던 아나로그 시대에 있어서 이런 현상은
 나라에 곧 무슨일이 닥칠 것이라는 암시하는 현상이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정부와 검찰과 보수언론등이 앞장서서
노 전대통령과 민주시민들을 힘들게 하고 있던 참이어서 예사롭지 않았던 빗줄기였는데
나나 우리들은 까마득히 곧 닥쳐 올 미래를 모르고 산 것이었다.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는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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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직전 조선과 조선을 둘러싼 정국의 모습은 이러했다.<자료 다음백과,네이버 지식 등>

명성황후는 대원군 실각 후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먼저 개화사상가인 박규수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과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를 차례로 파면.유배했다.개화를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조선책략>의 연미론이 유포되자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수교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개화승 이동인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대미수교의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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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한편, 청에 군대를 요청하여 임오군란 후 집권했던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한 뒤 정국을 다시 장악했다.그녀를 비롯한 민씨척족은 이때부터 친청사대로 기울었고, 개화파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1884년(고종 21)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자, 다시 청의 도움으로 이들을 제거했다.1885년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영국이 거문도사건을 일으키자, 묄렌도르프를 통해 영국과 교섭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했다.이에 청과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의 환국을 주선하여 민씨척족 세력과 정권다툼을 벌이도록 유도했는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 정계에 압력을 가해오자 그녀는 친러시아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일본에 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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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의 조선병합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던 명성황후와 그 척족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으로 하여금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에서 살해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그녀는 곧이어 세워진 친일정권에 의해 폐비되었으나 곧 복위되었고,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명성황후로 추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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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자료를 살펴보면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은 일제강점기의 신호탄이 된 셈이고 이후 우리는 일본에 의해 36년간 나라를 잃고 혹독하고 굴욕적인 역사를 지니게 되는데 팍스아메리카의 미국이 등장하기전 외세가 우리를 침탈하여 조선의 국호를 빼앗으며 일장기를 나부끼게 했던 슬프디 슬픈 역사적 장소가 경복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국모였던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 향원정에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명성황후는 자신의 죽음을 어느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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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일본의 낭인 '고바야가와라'라고 하는 자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상체에는 짧은 하얀 속옷을 입었을 뿐이며
 허리 아래는 하얀 속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무릎 아래로는 맨살이었다.
위를 행한 채 이미 숨이 끊어졌고 주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잘보니 자그마하고 마른편으로 피부색이 하얀
아무리 보아도 25,6세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 였으며
죽었다기 보다는 인형이 쓰러진 듯한 모습으로
영원히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방안에는 유해를 지키는 사람 한 명도 없이 참으로 처참하기
그지 없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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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의 시해현장 목격 진술이다.

"새벽 5시경 궁정 서쪽에서 총소리가 들려
황후의 처소로 급히 가니 25명 가량의 일본 낭인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 중 절반 가량이 황후의 방으로 들어갔다.
일본 낭인들이 황후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궁내 신하들이 막자 칼로 팔을 베어버렸다.
황후가 상궁 옷을 입고 상궁 무리 안에 섞여있어 누가 황후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일본 낭인들은 한 명씩 끌어내
250cm 높이에서 아래로 떨어뜨렸다.
두 명이 떨어진 뒤 황후가 복도를 따라 도망갔고
일본 낭인들이 쫓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가슴을 세번 짓밟고
칼로 가슴을 난자했다.
몇 분 후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으며 얼마 후 그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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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명성황후의 시해장면을 담고 있는 <신동아 2001년 10월 호 빌따알 드 라게리, 1898년 파리에서 출간한 '한국. 독립이냐, 러시아 또는 일본의 손에 넘어갈 것이냐'의 제4부 '현재 한국의 실정' 중 제5절 한국 왕비의 암살' 부분 번역본에서 발췌>분의 내용은  이러하다.

왕비의 거처에서 문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두 번의 총소리가 들렸다.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진실을 가려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입구 하나를 재빨리 찾아낸 파렴치한 일본 무법자들이 왕비를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왕비의 피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궁녀들의 머리채를 쥐고 질질 끌고 다녔다고 한다.
왕비는 첫번째 경내의 이중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일본 무법자들은 궁내대신 이경직을 찾아 학살했다.
위층에는 여러 궁녀가 피신해 있었다. 
암살자들은 우선 왕세자 빈을 붙잡아 머리채를 쥐고 끌고 다니다가
사정없이 때려 상처를 입힌 뒤 마루에서 안뜰로 내던졌다.
위층에 있던 네 궁녀 중 누가 왕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왕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비열한 악한들은 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궁의 한 시녀가 이 네 궁녀 중 한 사람이 민왕비라고 확인해 주었다.
흡사 식인종처럼 잔인한 일본인들은 왕비를 마구 때려 까무러치게
한 뒤 일본도로 여러 번 쳐서 마침내 숨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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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인 비극적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살고있는 한편
 마치 남의 나라일 처럼 살아왔던 건 아닐까?

참여정부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정권에 오른 이명박대통령은 이런 뼈아픈 우리 역사에 대해 일본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나를 괴롭힌 친구가 있었다. 얼마나 나를 괴롭혔던지 혼내주고 싶었지만 세월이 흐르자 그 친구를 잊게 되었고 우연히 만난 그 친구를 보니 너무 반가웠다. 한일관계도 그러한 면에서 보면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의 음성이 담긴 '유튜브의 영상'을 보며 그가 우리나라 사람인지 우리나라 대통령인지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자 노력했던 것인지 국가관이 조금이라도 있긴 한 것인지 등 대통령의 입으로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함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명성황후가 당신의 어머니였고 궁녀들이 당신의 딸이라고 해도 그들을 시해한 살인자를 만나 반가워 하며 공식적으로 최소한의 진정한 사과표명도 없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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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 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이의 처리방안으로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를 변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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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히라야마 이와히코 등 13명이 민비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는 내용이 공소장에 실려있어 일본 수사당국이 황후시해의 진상을 알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특히 살해범들은 "궁녀들이 서로 자신이 민비라고 하는 바람에 이들의 옷을 벗기고 유방을 살펴 당시 민비 나이인 44세가량의 여자를 칼로 살해하고 이를 제지하던 궁내부 대신 이경식을 총과 칼로 살해했다"고 진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을 뿐더러 2차세계대전 당시 위안부 징발 등 우리나라에 가한 만행에 대해서 사죄는 커녕 무시로 독도를 괴롭히는 일본에 대해 감히 '용서'운운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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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근.현대사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경복궁 향원정에 쏟아지는 빗줄기는 원통하게 빼앗긴 목숨보다 우리 민족을 침탈하며 억압한 일본에 대한 명성황후의 눈물로 보였지만, 이틀 후 청천벽력같은 노 전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자 마자 향원정에 내리던 비는 다시금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한 대통령의 죽음을 예견하는 선조님들의 통곡의 비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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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정권이 들어선 이후 우리정국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앞서 언급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의 경우와 흡사한데 우리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대상이 일본이 아니라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고, 일본의 낭인에 의해 살해된 명성황후의 모습은 친미정권의 검찰과 언론 등이 민족주의자였던 노 전대통령을 벼랑끝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한 모습만 달라,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일제가 우리땅을 침탈하기 직전의 모습과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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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러한데 미국이 좋다며 미국으로 떠난 딸래미를 향해 내 입장을 전달하며 '미국은 나쁜나라야'라고 말 할 수도 없어서 나는 그저 경복궁 향원정에 내리는 억수같은 빗줄기를 피해 다니며 우산을 받쳐들고 셔터만 찰칵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녀석은 미국이 기독교를 앞세워  세계를 향해 저지르고 있는 문화적 침탈에 대해 몽골로이드의 입장에서 그들의 만행을 되새길 것이며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마음으로 부터 먼나라 일본이 우리 선조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기억하는 한편, 한 대통령의 비뚤어진 사관으로 인해 다수 국민들이 흐느끼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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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정이 있는 경복궁의 후원에 속하는 향원지는 세조 2년(1456)에 조성되어 취노정(翠露亭)이라는 정사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세조실록"에 남아있고 못의 넓이는 4,605평방미터이며, 모를 둥글게 죽인 방형의 연지에는 연꽃과 수초가 자라며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연못가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배나무, 산사나무,서나무, 버드나무, 느릅나무, 말채나무가 숲을 이루고,향원정이 있는 섬에는 철쭉, 단풍 등 관목류가 심어져 있다. 현재의 취향교는 목교로서 1873년에 설치되었고, 원래는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도록 북쪽에 있었던 다리지만 6.25전쟁 당시 파괴되어 1953년 남쪽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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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정육각형으로 장대석으로 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1.2층을 관통하는 육각기둥을 세웠다. 1층에는 평난간을, 2층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가 있다. 겹처마이며,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지붕의 중앙에 절병통(節甁桶)을 얹어 치장한 향원정의 취향교는 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로 전해지고 있다.그 역사적인 장소에서 지난달 29일 노전대통령의 영결식이 거행되었는데, 근.현대 들어 손꼽을 만한 나라의 슬픈 소식을 접한 경복궁 향원정과 종묘 사직에서 바보대통령의 서거를 놓고 통곡의 눈물을 흘렸을 법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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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딸래미는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을 것이지만 서울에는 비가 오시고 있다. 일제에 굴하지 않고 죽음으로 '조선의 자존심'을 지킨 명성황후와 같이 우리 현대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 대통령의 죽음이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되살리고 있지만, 이 땅에서는 여전히 외세의 힘에 의존한 무리들이 동족을 짓밟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일기예보와 달리 남쪽에서 시작된 장맛비가 향원정에 내리던 비의 의미와 달라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비는 언제쯤 내 가슴속에서 멈출 수 있을런지...!

베스트 블로거기자
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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