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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MERICA

낮선 '땅' 더욱 낮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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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선 '땅' 더욱 낮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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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중앙 아메리카, 도미니카 이들 세 지역은 양키들과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혁명을 하자면 양키들이 방해할 것이 분명하지. 그래서 양키의 제국주의 영향력이 아직은 덜 미치는, 현재로는 양키의 즉각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볼리비아를 최적격지로 선정한 거야. 볼리비아는 너무 가난한데다 이곳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할 경우 인접한 아르헨티나 브라질 페루 우루과이 칠레 등에 혁명을 수출하기도 좋고,...그런데 볼리비아는 너무 지방색이 강한게 문제였어. 볼리비아인들은 좀 더 넓은 시각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범세계적인 게릴라운동을 받아들이지 못했어. 그들은 쿠바인이 아닌 볼리비아인 게릴라 대장을 원했어.이런 일에는 우리가 전문가인데도 그들은 듣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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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무더기는 San juan de Rosario 마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무덤이며 유적지다.

쿠바계 미국인인이자 전직 CIA요원 '펠릭스 로드리게스'는 '체 게바라'에게 담배를 주고 개인적인 존경의사를 표하면서 그의 말문을 열게하고, 죽음을 기다리던 체 게바라는 로드리게스가 "왜 볼리비아를 택했느냐"고 묻는 질문에 차분한 어조로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몇마디의 문답이 이어진 후 로드리게스는 감방을 나와 CIA본부에 무전기로 보고하려는 순간, M2 카빈 소총의 날카로운 총성이 두 발 울리는 걸 들었다고 그의 자서전에 소개하고 있다. 바이블이 만든 메시아 이후 또 다른 대륙에서 탄생한 '혁명의 메시아'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죽기직전 "피델(카스트로)에게 아메리카에서 영광스러운 혁명 성공의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해주게. 내 아내에게는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전해주게나."라고 하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나는 볼리비아를 미워하고 있었다. 생면부지의 볼리비아를 미워한 까닭은 다름이 아니었다. 침탈자들로 인하여 더욱더 가난해진 볼리비아가 혁명의 최후 보루로 삼았던 혁명 메시아를 죽음으로 이끈 장소가 바로 인디오의 땅 볼리비아였던 탓이었다. 체 게바라가 혁명의 실패를 거듭한 땅은 아프리카와 볼리비아 전선 때문이었고, 그는 아프리카와 함께 그가 너무도 사랑한 남미땅 볼리비아가 태초의 모습을 짓밟는 개발자들로 부터 안전하게 지켜지기를 학수고대했던 것이나, 그는 '카톨릭과 자유'을 내세우며 함부로 약소국을 침탈하는 '자본'에 대해서 최후 까지 저항하다가 낮선땅에서 단발의 총성으로 우리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는 이 낮선 땅에서 CIA와 내통하던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총살을 당하고 은밀히 매장된 후 가까스로 발굴되어 쿠바로 옮겨진 건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7년 7월1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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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 juan de Rosario 마을의 흙벽돌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유니 소금사막을 지나 '라구나 꼴로라도 laguna Colorado'로 향하던 중  'san juan de Rosario'의 낮선동네에서 휴식을 취하며 동네를 둘러보다가 용도를 알 수 없는 돌무더기가 내 앞에 놓여있었는데, 알고보니 돌무더기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죽어 간 사람들을 묻어둔 무덤이었다. 그들은 황량한 이 벌판에서 혹독한 자연환경과 싸우며 지친 끝에 생명을 다하고 그들 가족들과 이웃들이 지켜보는 마당 곁에 주검을 묻고 그를 기억하던 가족들과 이웃들은 그를 위하여 돌단을 쌓아 그를 추모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들은 이곳을 'San juan de Rosario'로 명명하고 태초의 천재지변이 가져다 준 운명을 고스란히 묻어두고 있었다. 내가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체 게바라가  M2 카빈 소총 앞에서 시거를 문 채 배신자 앞에서 증언을 하던 심정을 비로소 느꼈다. 체 게바라는 이 낮선땅에서 단발의 총성을 끝으로 그들이 원하지 않는 혁명을 시도하며 곧 다가올 미래의 혁명에 작은 밀알로 스스로 원치않던 땅 속에 묻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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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와 철저히 고립된 San juan de Rosario 마을은
투어객들 외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늘과 땅 뿐이다.


그리고 하늘은 그를 위하여 사후 30년이 지난 시점에 그의 유골을 발굴케 하고 다시 부활하게 했다. 볼리비아는 체 게바라의 혁명군에게 골고다와 같은 고난의 언덕이었고, '체'를 사흘만에 되살아 났다고 하는 예수와 같이 30년 만에 부활을 가능케 한 무덤이었다. 세상은 가끔씩 우리가 실수라고 칭하는 현상들에 대해서 기적과도 같은 은혜를 배풀기도 한다. 역사학자들은 체 게바라가 아프리카와 볼리비아 전선에서 패배한 사실을 두고 여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체'가 척박하고 가난한 아프리카와 볼리비아 전선에서 목숨을 건 투쟁을 전개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려진 땅에 누가 관심이라도 두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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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상에, in Google Earth (K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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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유니 투어를 끝으로 낮선땅 'San juan de Rosario' 마을에 쌓아둔 돌무더기 유적을 보면서 그의 유골 조차 화장을 시도하려던 미국과 근래 그의 앞잡이였던 볼리비아 당국의 만행을 떠 올렸다. 남미를 여행하는 목적은 개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세상의 '가치'처럼 여기고 있는 '바이블' 저 편에서 '사탄'처럼 버려진 '약속의 땅'을 두루 살폈던 체 게바라의 족적을 따라 발길을 옮기노라면 선善과 악惡의 개념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악은 늘 선을 향하여 총구를 겨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선이라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체'나 추종자들을 가리켜 '테러리스트'라 부르기를 서슴치 않고 있다. 낮선땅 남미나 볼리비아가 체 게바라에게 죽음을 준 땅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 땅에서 다시금 살아 숨쉬고 있다. 그에게 너무도 친근하지만 낮선땅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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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 juan de Rosario 마을 '행복한 집'에서 볼리비아나 여학생이 집으로 향하고 있다.

얼마전 다시금 '체 게바라 평전'을 읽는 내내 일반의 평가와 체에 대한 나의 생각들은 그의 죽음만큼이나 오래토록 아쉬움을 남기고 있었다. 로드리게스의 자서전에서 체가 말하고 있는 "볼리비아인들은 좀 더 넓은 시각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범세계적인 게릴라운동을 받아들이지 못했어. 그들은 쿠바인이 아닌 볼리비아인 게릴라 대장을 원했어."라고 혁명의 실패에 대한 원인을 말했다. 그가 남미 전역을 여행하며 곳곳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성향을 비교적 소상하게 잘 알 것 같았지만 그가 죽음에 이른것과 같이 '지방색'이 강한 것을 간파하지 못했다. 어쩌면 자본의 단맛에 빠진 볼리비아 정부군들은 체 조차도 침탈자로 여겼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500년 가까이 이 땅을 침탈해 간 서방에 대해서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2003년 볼리비아에서는, 대통령이 민중의 공공자산인 천연가스를 다국적 기업에 매각하려는 계획을 내놓으면서 거대한 봉기가 일어났다. 그들은 “다국적 기업도, 칠레인들도, 볼리비아 민중의 부를 탈취하여 이득을 볼 수 없다”고 외치며 “우리는 우리의 천연자원을 되찾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윽고 몇몇 민중단체의 지도자들이 “천연가스는 매각의 대상이 아니”라며 단식투쟁에 나섰고, Central Obrera Bolivia(COB) 등 노동조합이 전국 각지에서 총파업과 대규모 행진을 조직했다.


곤잘로 산체스 데 로사다 대통령은 시위대의 폭력진압에 나섰고, 희생자가 생기면서 민중의 분노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0월, 대학살이 벌어졌고, 라 파즈의 엘 알토에 모인 사람들은 막대기와 돌을 들고 최루탄과 총탄에 저항했다. 그리고 총파업으로 코차밤바, 오루로, 포토시 등을 마비시켰다. 2만 5천명이 거리를 점거했고, 볼리비아 서부의 거의 모든 도시들이 항의에 가담했다.

그들은 산프란시스코 광장을 점거하고 “the gringo"의 추방을 요구했다. (gringo는 외국인 특히 북미인을 폄하하는 표현으로, 여기서는 북미에서 자라 북미 액센트로 스페인어를 구사했던 로사다 대통령을 칭한다.) 대통령은 천연가스 매각에 대한 구속력 없는 국민투표를 제안하지만, 민중의 분노를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가 암살자와 대화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며, 대통령의 사임을 강하게 요구했다.


학자와 예술가, 언론인 등 중상계급도 민중의 편에 섰다. 전 국방위원장인 아나 마리아 로메로는 단식 투쟁을 하며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했고, 곧이어 6명의 학자, 인권활동가, 카톨릭 사제가 단식에 참가했다. 불과 10시간 후, 단식 참가자는 400명으로 늘었으며 그 구성은 매우 다양했다.


볼리비아 민중은 행진을 하며 소리높여 외쳤다. 일부가 “언제? (대통령이 사임해야 하는가)”라고 외치면, 다른 일부가 “지금!”이라고 받는 방식으로. 그리고 그들의 외침은 현실이 되었다. 80명이 죽고 400명 이상이 부상당하고 400명이 단식을 시작한 후에, 산체스 데 로사다는 그의 주소를 마이애미로 옮겼고, 2003년 10월 17일 결국 의회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만다. 그 날 볼리비아는 두 가지 승리를 축하했다.

하나는 걸프 석유회사의 국영화며, 다른 하나는 로사다 정권의 패배였다. 볼리비아 민주주의의 짧은 역사(21년) 동안, 20만 명이 모여 행진하고, 함께 자국의 미래를 논하는 대규모 집회란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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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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