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동에 그려놓은
10월의 '수채화'
내 나이 열다섯 살 때, 나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하는가를 놓고 깊이 고민했다.그리고 그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찾게 된다면,나는 비로소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먼저 나는 가장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방법부터 생각했다.그렇지 않으면,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문득, 잭 런던이 쓴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음에 임박한 주인공이 마음속으로 차가운 알래스카의 황야 같은 곳에서 혼자 나무에 기댄 채 외로이 죽어가기로 결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유일한 죽음의 모습이었다.
희운각에서 무너미고개를 너머 천불동계곡으로 향하는 길 곁에는 수채물감으로 발라 놓은 듯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귀품이 넘치는 단풍이 줄을 지어 그들 밑으로 통과하고 있는 손님들을 향하여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막 하산을 하고나면 한동안 만나지 못할 우리들을 향하여 마지막 배웅을 하고 나섰는데 정작 우리는 죽을 맛이었다. 나는 '체게바라'가 읊조린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Vida y muerte, violin, padre y madre/Canta el violin y Becho es el aire/삶과 죽음, 바이얼린, 엄마 아빠/바이얼린이 노래하면 베초는 감동하네 Ya no puede tocar en la orquesta/Porque amar y cantar eso cuesta/더 이상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할 수 없네/사랑도 노래도 힘들어졌네...
세상에서 위대한 삶을 살다간 인간들은 그들 모두 뚜렷한 '색깔'이라는 흔적을 남기고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 중 '체'도 그랬다. 그를 위해서 누구인가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피둥피둥 살을 찌우며 소시민들 위에서 군림해 간 그 어떤 위정자들 보다 더 위대했다.
희운각을 돌아 내려 오면서 무거워진 발걸음은 내리막길인데도 힘이 들었다. 아니 내리막길 일수록 더 힘들었고 어떤때는 작은 오르막이 그렇게 반가웠다. 내려가는 일은 오르는 일보다 결코 쉽지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체는 알래스카의 황야 같은 곳에서 혼자 나무에 기댄 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외로이 죽어가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그는 세상과 영합하며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설악의 나뭇잎들은 모두 알래스카의 황야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열심히 달과 해를 번갈아 보며 살찌운 잎을 모두 노오랗고 빨갛게 물들이며 길손인 우리를 배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들의 위대한 삶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들로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며 산그림자 속으로 자신을 파 묻고 있었다.
'내설악'의 가을 비경 -7부작-
마지막 편 천불동에 그려놓은 10월의 '수채화'
나는 반백이 넘어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그 꿈들은 허무맹랑한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촌음을 다투어야 할 소중한 것들인데 사람들은 내가 꿈꾸는 가치에 대해서 아직은 그저 그런 것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듯 하다. 어쩌면 나와 똑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있어도 그들은 너무 바삐 움직이고 있다.
내가 연필을 들고 아직 밑그림도 채 그리지 못했는데 그들은 서둘러 그들이 지을 집터에 말뚝을 박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굴삭기로 땅을 헤집고 있었다. 그정도는 봐줄만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올림픽 티켓을 거머쥐기 위해서 매표소 앞에 장사진을 치듯 텐트를 잽싸게 치는가 하면 아예 노숙자처럼 이불을 아무렇게나 깔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서 잘하는 일이라고 부추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찬이슬을 맞으며 하룻밤을 보낸 사람들은 매표소를 향해서 항의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거들떠 봐 주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들 스스로 그 행위가 최선인 것 처럼 행동하며 소중한 꿈을 패스트푸드 처럼 낭비하고 있었다.
양폭대피소로 이동하는 동안 다리가 천근만근의 무게로 피곤이 더해지자 나를 힘들게 했던 세상의 일들이 가끔씩 떠오르며 무게를 더했고 마침내 나는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했던 꿈들에 대해서 좌표를 잃은듯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체는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찾게 된다면,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는데 나는 내 몸둥아리 하나 부지하는 것 조차도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 새로운 꿈은 커녕 비렁뱅이가 되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판이었다.
천불동계곡으로 이어지고 있는 수채화 행렬은 끝도 없어 보였다. 어떤 곳은 샛노란 색깔을 한 모습도 눈에 띄었고 어떤 곳은 밑그림이 시원찮아 보이곳도 있었지만 그 어떤곳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한폭의 그림을 길다랗게 펴 놓은 모습이었다. 이 골짜기에 늘어서서 우리를 배웅하고 있는 10월의 수채화들은 그 어떤 수채물감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색감들로서 각 개체들은 서로다른 삶을 산 듯한 모습이었다.
땅거미가 서서히 천불동계곡을 감싸며 걸음을 재촉했지만 걸음은 점점 더 느려져 가고 오련폭포를 지나자 마침내 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한낮에 본 설악도 힘이들었는지 계곡사이로 흐르는 옥수에 목을 축이고 커튼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화채능선 너머에서 은빛가루가 흩날리며 누군가 손전등을 비추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희끄므레한 나뭇가지 사이로 그 빛줄기는 등산로 바닥에 깔아 둔 넓적한 바위덩어리를 비추며 은빛으로 빛나게 했고 졸졸 거리던 계곡의 물위에 은빛 비늘을 반짝이게 했다. 설악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은빛으로 빛나는 둥근 달 하나 뿐이었다. 설악이 10월에 마련한 수채화 전시회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인제를 향하여 자동차를 운전하며 한계령을 넘을 때만해도 의기양양 했는데 속초에서 진부령을 너머 백담계곡과 수렴동계곡을 차례로 오르는 동안 많이도 지쳤고 구곡담계곡과 봉정골 깔딱고개에서는 최선을 다하여 발을 내 디디며 소청산장까지 당도 했었다.
그곳에서 해마다 한차례씩 열고 있는 가을축제에 참석하고 천불동계곡으로 돌아오는 길은 왜 이렇게 힘든 여정인지...그 모습을 두고 체게바라는 쓸데없는 삶의 한 '사이클'이라 생각하며 재미없는 일상으로 치부하고 '이상'을 찾아 나섰던 것일까?
체는 세상에서 가장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아무도 모르는 알래스카와 같은 황량한 곳에서 마지막 호흡을 하고자 했던 것인데, 그때도 그의 초라한 주검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자 했던 그는 그가 원치않는 곳에서 죽고 만다.
그가 만약 볼리비아의 한 산지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지 않았다면 달빛가루가 흩뿌리는 이 아름다운 산하에서 홀로 피고 지는 나뭇잎과 같이 위대한 삶을 살았을까? 나는 설악이 만든 위대한 삶의 모습 앞에서 손전등에 의지한 채 절룩 거리며 비선대를 지나 목적지인 소공원에 도착했다.
설악이 품고 있는 천불동계곡의 아름다운 수채화는 오련폭포 까지 이어집니다.
아무런 설명이 필요없는 비경들입니다!!
누구인가 펫트병을...옥의 티군요.
천당폭포의 비경입니다.
양폭의 기묘한 모습입니다.
오련폭포 최상단 입니다. 이곳에서 아래로 물줄기가 떨어지는 곳이죠.
날이 어두워져서 더 이상 촬영이 불가능해 진 가운데 몇장의 그림을 더 얻었습니다.
비선대가 가까워지면서 어둠속의 '귀면암' 표정이 으시시 합니다. ^^
설악산을 다니면서 늘 소장하고 싶었던 풍경 중 하나가 수렴동계곡의 내설악 풍경과 소청봉에서 조망되는 설악의 모습과 천불동계곡의 가을모습이었습니다. 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누구나 이런 풍경들을 소장하고 싶었을 터이나 막상 산행을 시작하고 보면 최초에 품었던 계획들이 어느덧 사라지고 몇장의 사진만 남긴채 산행을 끝마치기 일쑤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모처럼 지난 10월 12일, 하루코스로 선택한 수렴동계곡과 천불동계곡을 12시간동안 이동하면서 그동안 제 블로그에 남기고 싶었던 그림 몇을 얻었는데 짬짬히 편집해도 시간이 부족하긴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림과 영상의 분량이 방대하여 7편으로 나누어도 제 성에 차지 않습니다.
어줍잖은 글을 통하여 설악을 소개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림 한장 한장 세세하게 소개해 드리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부족한 점 투성이인데도 잘 봐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
'내설악'의 가을 비경 -7부작- |
yookeun12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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