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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이방원2.0' 마지막 길을 따라가다!



'이방원2.0' 마지막
 길을 따라가다!


"이런들 엇더며 져런들 엇더료/만수산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리/우리도 이치 얼거져 백년百年지 누리이라."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 시詩 '何如歌' 한편으로 우리역사가 순식간에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조선 3대왕 '태종'이 된 이방원이 고려의 충신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지은시다. 이에 정몽주는  丹心歌로 화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정몽주는 결국 단심가 한편으로 이성계의 문병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방원이 보낸 문객 조영규 趙英珪 등의 습격을 받아 죽음을 맞이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헌릉 '제실'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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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는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여, 이듬해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해지고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공양왕 옹립에는 정도전鄭道傳·이성계 같은 역성혁명파와 뜻을 같이했지만,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데는 반대했다.





그리하여 기회를 보아 역성혁명파를 제거하고자 했다. 마침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배웅하러 나갔던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병석에 눕게 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준趙浚 등 역성혁명파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이방원李芳遠이 이성계를 급히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고, 이어 정세를 엿보기 위해 이성계를 찾아가 문병을 하고 귀가하던 도중 죽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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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의 개국에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의 충신들을 제거하고 개국한 새왕조 '조선'이었기에 이방원의 야심은 당연히 왕권에 있었다. 세자世子였던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소생 방석芳碩을 제거한 제1차 왕자의 난과 형 방간芳幹을 제거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은 즉위 후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세종대世宗代의 성대盛代에 기반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역사를 접하신 분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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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태종 이방원의 '헌릉'을 방문 하면서 불현듯 '하여가'와 '단심가'가 떠 오르면서 새삼스럽게 '충신과 역적'이 머리속을 맴돌기 시작했고 마침내 국론이 심히 분열된 우리나라의 정치적 모습이 떠 올랐다. 그 속에는 전직대통령 노무현과 현직대통령 이명박이 등장한 것이다. 아마도 이 두사람은 하여가를 부를 입장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단심가를 부를 입장도 아닌것 같았다. 그래서 헌릉을 걸으며 혼자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는데 두사람은 하여가와 단심가를 동시에 부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인릉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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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봉하마을에서 열심히 잔디썰매를 타고 손녀와 자전거놀이에 열중인 노무현은 이명박정부가 자신을 홀대하던 말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대한민국 정치사 꼬인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헤매다 5년을 누렸도다'하고 전직대통령을 좌빨로 매도하던 측근을 족치던 태평스러운 날을 보내는 한편, 가만히 생각해 보면 괘씸하기 짝이없는 이李 정부에 대해서 단심가를 방불케하는 '봉하2.0'으로 시민들과 쌍방향 소통을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아마도 이 정부가 별의 별 수작을 다 부려도 고집을 죽어도 아니 꺽겠다는 뜻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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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집은 현직대통령에게도 예외는 아닌것 같다. 꺼진듯 되살아나는 촛불망령들은 불어도 보고 찬물을 끼얹어 보기도 하고 방송을 장악해 보기도 하고 수구보수파들을 총동원 했지만 마침내 범불교단체에 태클이 걸리면서 주춤하고 있다. 지지율을 끌어 올려보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리먼 브라더스인지 무슨 형제인지 악재들만 연일 터지고 거기다가 요즘은 중국발 황사같은 멜라민인가 하는 식품까지 말썽을 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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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광우병쇠고기 수입 이야기는 쏙 들어갔는데도 왜 이렇게 지지율은 뜨지 않고 부동산은 왜 또 그 모양인지 죽을 맛이다. 겉으로는 티비앞에서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사사건건 빈정대는(?) 봉하마을이 미워죽을 지경인 것 같다. 그래서 하여가를 끄집어 내 놓고 한 수 읊조리니 '이래도 죽을 맛 저래도 죽을 맛 봉하마을 탐방객 볼 때 마다 약올라 우리도 5년후에 저같이 될라나' 그러면서도 믿음이 굳건한 고소영내각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봉헌한다 고백한 서울시와 대한민국 하느님 향한 일편단심 복음화로 완성하세'하고 응원하며 단심가로 화답하고 있는 것이다.


태종 이방원이 묻힌 '헌릉'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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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들이 이방원을 생각하면서 제일 먼저 떠 올린 치적(?)이 불교에 대한 탄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불교를 지독히 싫어했던 태종 이방원은 건원릉과 제릉(신의왕후 한씨)에는 아버지를 생각해 마지못해 원찰(왕릉 근처에 명복을 빌게 하던 절)을 세우게 했으나 자신의 능에는 "내 잠들 곳에 더러운 중들이 가까이 하게 할 수 없다"며 절대 세우지 말라 엄명했다고 전해져 온다. 태종은 자신의 아내였던 원경왕후의 재를 지내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명나라에서 부처를 신봉하므로 없앨 수는 없다면서 간소하게 축소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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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왕후 국상에 재를 올리자 "이제 들으니, 왕후의 재를 올릴 때, 대소 관원들로부터 노복에 이르기까지 한데 섞여서 떠들어대어 거의 천 명이나 된다 하니, 부처에게 영이 없다면 몰라도, 만일 영이 있다면, 이런 일이 공경하여 섬기는 도리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영을 내려 왕과 왕비 이하 사대부와 서인에 이르기까지 수륙재水陸齋만 배설하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했으며 절에 나가는 인원도 일정한 수로 제한해버렸다한다. '천년 후에 이 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저희에게 달렸다'고 토를 달았지만 이후 조선왕릉 제사에 절에서 개입할 여지를 봉쇄해버린 것이 바로  태종 이방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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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불교의 타락상을 많이 보아왔던 태종은 '부처와 신선은 백성을 속이고 미혹하는 짓이라 허황하고 망령 된다'고 단정하고 사찰의 노비와 토지를 몰수해 유교국가의 기틀을 다지기도 했는데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최대 걸림돌이 된 '범불교'를 보는 시각이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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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역사를 뒤돌아 보면 위대한 역사 뒤에는 반드시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런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별로 다르지 않았다. 되짚어 보면 그런 위대한 역사를 일군 뒤안길에는 수도 없이 많은 백성들이 희생이 담보되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문명사속에서 사라져간 그들은 '민주'라는 '민字'도 모른채 사라져 갔던 것인데 위대한 인물들은 그런 희생을 치루고서 라도 훗날 나라와 백성들이 태평스러운 날을 맞이 하도록 한 예가 부지기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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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쌍방향 문화'를 이야기 하는 '토론문화'는 얼핏 최고의 문화를 만들수 있는 가치로 비쳐지지만 위대한 역사에 비추어 보면 한낱 시간낭비에 불과하거나 영웅들의 목숨을 위태위태하게 하는 기능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태종 이방원이 정몽주의 계략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방원 2.0'을 가동하여 백성들과 토론후에 즉위를 노렸다면 그가 오히려 선죽교에서 테러를 당했을지 모르며 '조선'이라는 국호는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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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뿐이겠는가? 나라의 지도자가 종교의 허와 실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허황되고 망령된 짓을 되풀이 하다보면 백성들로 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그 스스로 지지율의 늪에 빠져 허우적 대다가 세월을 보내고 말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일각에서 거론되는 서로 다른 주장들은 전직대통령의 부족함과 현직대통령의 부족함이 함께 도마에 오른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처남 넷을 죽이고 세종의 장인을 사형시키는 등 처가와 며느리 집안을 도륙하면서 외척의 힘을 완전히 눌러 원경왕후가 왕이 되기까지 자신을 도와 준 공을 모두 저버렸지만 세종이 펼칠 정사의 초석을 단단히 닦아놓는가 하면 관제 개혁을 해 왕권을 강화시키고 사병제도를 금했으며 군사제도 개편으로 국방을 강화했고, 조세제도를 정비해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 국가재정을 튼튼하게 했다. '고려사'와 '동국사략'을 편찬하고 계미자라는 동활자를 주조하게 한 것도 태종 이방원이었다. 그의 정사에는 사적인 치적도 포함되었겠지만 공적인치적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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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비정하고 냉혹한 왕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정작 불안정한 신생국 조선을 탄탄하게 반석에 올려놓은 뛰어난 정치역량을 발휘한 왕이라는 더 중요한 치적은 간과돼 왔는데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국가경영자의 정치력을 평가할 때 잣대를 어디에 두느냐는 다시금 생각해볼 문제다.
 
태종의 역량을 무서워했던 정적들에게 끊임없이 제거당할 위기에 처했던 이방원이 살아남기 위해서 싸운 결과 승자로 남았을 뿐인데, 오늘날 우리의 지도자들은 단지 자신이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한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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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향후 200여년 간 조선이 태평성대로 안정된 시대를 이룬 것은 태종의 업적이다. 정치가 시끄럽고 지도자가 능력이 없으면 그 등쌀에 죽어나는 것은 백성들 뿐이다. 태종의 평가 중 조선 백성이 평화로운 시대를 살게 해줬다는 것에 가장 큰 점수를 줘야 한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런 태종太宗(1367~1422)이 주검으로 마지막으로 실려 간 곳이 헌릉이며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왕위에 앉힌 1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원경왕후元敬王后(1365~ 1420)를 따라서 2년후 영면에 들어갔다.

헌릉은 그림과 같이 동원이봉同原異封의 쌍릉으로, 앞쪽에서 보아 왼쪽이 태종,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능이다. 그가 세운 조선이 500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와 오늘날 대한민국의 역사를 만들며 후세의 평가를 받고 있듯이 우리 지도자들은 짧은시간 주어진 통치기간에 너무 많은 것을 하려들지 않는지 반성해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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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마지막 휴일, 헌릉을 찾아가는 길 입구 왼편에서 먼저 헌릉의 제실을 둘러보며 당대 최고의 신분에 걸맞지 않는 소박한 제실에는 공익요원이 장작불을 지피고 있었다. 헌릉에 들어서자 인릉의 보수가 진행되고 있었고 능 곁에 늘어선 소나무들이 모두 릉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는데 헌릉이 있는 곳에는 인릉이 함께 있어 헌.인릉이라 부른다.

포스트 맨 윗쪽부터 제실과 인릉과 헌릉 모습을 그림으로 담았는데 위의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純祖 (1790~1834)와 왕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1789~ 1857) 김씨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합장릉合葬陵으로  혼유석을 1좌만 설치하여 외형상 단릉單陵과 같은 형식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부터 외척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순조의 개혁정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도의 문란, 매관매직 성행 등 정치기강이 무너져 사회가 혼란해졌고,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각종 민란이 일어났다. 또한 이 시기에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 탄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이른바 보수로 일컫는 정치세력이나 진보진영에서 개혁을 부르짖는 가운데서도 개혁에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되돌아 보게 하는 장면이다. 소통을 부르짖으며 불통에 이른것은 정작 '교감'을 뒤전으로 미루는 '아집'때문이 아닐까? 역사를 통해서 '2.0'을 배워야 할때다.
 
휴일이지만 헌.인릉을 찾는 사람들은 열댓명도 채 되지 않았고, 고즈녘한 릉 주변에는 가을냄새를 물씬 풍기며 마사토가 풍부한 오솔길에는  떨어진 도토리가 즐비했다. 조선을 건국하고 당대 최고의 왕이 영면하고 있는 릉 곁에서 팔짱을 낀 한쌍의 연인이 초가을 볕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었다.<헌.인릉 참고자료 문화재청, 다음백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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