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썩어자빠진 정치판 튈 껴 찌를 껴?..."
대략 한 달 전이었다. 단감축제가 열리고 있는 창원시 북면의 한 국밥집에서 임현철 선생(소셜 디자이너 대표)으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받았다. 일행 여럿이 장터국밥을 먹는 데 한 번 읽어보시라면서 책을 건넨 것이다. 책을 건네받자마자 책 표지를 보니 <비상도>라고 쓰여져 있었다. 언제인가 임 선생의 블로그에 연재된 글이 문득 떠올랐다. 책 표지를 보자마자 그때 느낌이 머리를 스쳤다.
당시엔 비상도의 조각조각을 읽고 있던터라 어느 암자에서 스님과 선문답을 주고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몇 마디 때문에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글이랄까. 그 후로 비상도는 '알콩달콩'한 사는 이야기 보다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국밥을 먹다 말고 받아든 책 한 권의 제목이 비상도...
비상도라면...(非常道 혹은 非常刀?...)비상탈출구 혹은 비상시에 필요한 은장도 같은 칼?...둘 다 아니었다. 비상도는 조선 건국 이후 한반도에서는 맥이 끊긴 고려왕실의 전통무예 '비상도(非常道)'를 가리키는 것으로, 책의 주인공 비상도가 600여 년 만에 무술을 이어받은 적통자였다. 책은 꽤 두꺼웠고, 446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이었다.
단감축제를 다녀온 후 대략 1주일 후부터 비상도 일독에 들어갔다. 비상도의 저자(변재환)는 지난해 1월 19일 타계한 분이었는 데 우연한 기회에 임 선생이 저자로부터 비상도 원고 두 권을 입수하면서부터 비상도는 날개를 단 듯 시중으로 전파된 것이다. 임 선생이 저자 변재환 씨를 처음 만난 때는 3년 전이었는 데 경남 창원에 있는 성불사의 주지 청강 스님이 툭 던진 세 편의 단편소설이 인연이 된 것. 작가를 대신하여 쓴 머리말에서 임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상략)...처음에는 별반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빠져들고 말았다. 원고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우리나라 정치,경제,교육, 속에 뿌리박힌 친일 잔재와 부정부패에 대항하는 활약을 그린 의협소설이었다. 실제로 저자의 조부 역시 창원에서 이름을 날린 독립운동가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에게 쌓인 울분도 많았으리라...책을 읽는 도중 감탄이 쏟아졌다.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이 뻥 뚫림으로 다가왔다. 재미를 넘어 감동까지 일었다...(하략)"
보통의 장편소설과 달리 비상도의 도입부 전개가 오래된 암자에 올라 발 아래로 펼쳐진 세상을 조망하는 듯 신선한 느낌으로 발을 들여놓게 됐다. 일단 책을 펴자 단숨에 절반을 읽어 내려갔다. 임 선생이 '저자를 대신하여' 쓴 글에서 나타난 감흥처럼 재미도 쏠쏠하고 답답함이 뻥 뚫릴 정도도 극적인 장면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비상도를 연마한 비상도는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홍길동이 도적의 두목이 되어 부정부패에 찌든 탐관오리나, 백성들의 재물을 간교하게 빼앗은 자들의 재물을 탈취해 가난한 사람을 구재한 풍경이 비상도로부터 발현되는 것. 그러나 비상도의 시대적 배경은 그리 멀지 않았다. 비상도의 배경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정리하지 못한 근현대의 친일파가 주 대상이었다. 저자는 그들을 '신매국노'로 정의하고 비상도를 통해 응징하며 나라의 정체성 등 '우리의 얼'을 되찾으려 하는 것.
비상도를 읽다 보면 소설의 개연성 이상으로 다큐멘터리를 읽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허구가 아니라 팩트를 그린 듯한 전개 내용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비상도를 읽는동안 가슴에 작은 칼(비상도)을 하나 품고 있었던 데 즈윽이 놀라고 있었다. 어쩌면 임 선생이 원고를 받아들고 차근히 읽어내려 가는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상도의 저자 변재환 씨가 타계를 할 당시 혹은 그로부터 1년이 경과한 대한민국의 현실은 비상도의 저자가 응징하던 '어둠의 자식들' 보다 진화해 비상도가 무색해지는 것이다. 정치판은 이미 다 썩어자빠져 피아를 가릴 수 없게 됐다. 자국민 304명이 수장돼 목숨을 잃어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공직자가 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희희낙낙하는 모습들. 자고나면 거짓말로 국민들을 속이는 데 혈안이 된 게 정치판의 모습이었다.
대략 사정이 이러한 때 비상도가 나타나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답답한 일이었다. 비상도가 신출귀몰한 무술을 연마해 단 번에 수 십명의 상대를 제압한다해도 달라질 정치판은 아니었다. 상식이 무너진 세상에서 제아무리 진실을 외쳐도 짝퉁 저널리스트들과 방송과 언론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여전히 밥통만을 위해 정치판에 구걸을 일삼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비상도의 저자 변재환 씨는 그런 사정을 누구 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 당장 그들을 때려 눕히고 싶었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것. 그들은 그들 스스로 만든 법망 속에 숨어서, 매일같이 국민을 세금이나 보태는 봉으로 여길 게 틀림없을 거라 판단했을 것이다. 필자는 저자 변재환 씨의 죽음의 원인을 잘 알지 못할 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비상도를 읽어내려 가면서부터 그의 가슴 속에서 한(恨)맺힌 응어리를 보고 있는 것. 어쩌면 2014년 오늘을 사는 우리 이웃들의 가슴 속에서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불덩어리 같은 게 그런 건 아닐까. 저자는 비상도를 통해 자기의 가슴을 찢어보이며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를 끄집어 내 대리만족을 시켜주고 있는 것. 비상도를 읽으면 한 여름에 빙점에 가까운 차디찬 냉수를 마신 듯한 느낌이 폐부를 찌르게 된다. 그리하여 나라를 좀 먹는 버러지들을 향해 비수를 품게 만드는 것.
다 썩어자빠진 정치판으로부터 튈래야 튈 수 없고 멀어질래야 멀어질 수 없다면, 가슴에 비상도 하나쯤 오롯이 품고 살아야 하는 세상일까. 비상도는 소설이자 소설속 주인공 이름이며 무예의 한 종류이지만, 비상도를 통해 '비상구와 비수'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 저자의 통찰력 없이는 불가능 했을 설정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아끼는 사람들이 정치적 갈등과 갈증을 느낄 때 일독하면 가슴이 뻥 뚫릴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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