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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AGONIA/Puerto Montt

내가 만난 최고령 여행자와 꼬챠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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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최고령 여행자와 꼬챠유요
-볼수록 신기한 '꼬챠유요' 돼지 껍데기 닮아-



할아버지는 무사하실까...

전화 버튼을 누르면서 괜한 걱정이 됐다. 할아버지를 만난 시간은 어느덧 햇수로 3년 째 2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2011년 10월 24일, 우리는 지구반대편 뿌에르또 몬뜨의 한 민박집에서 우연히 한 할아버지와 만나게 됐다. 할아버지 존함은 김자, 정자, 출자,를 쓰시는 분(김정출). 나이는 81세. 경북 영천시 고경면 창하리에 사시는 분이셨다. 전화기에서 신호가 이어지고 있었다. (띠~~~띠~~~)혹시 안 받으시면...ㅜ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때였다.

"(또~깍~)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틀림없는 할아버지 목소리였다. 그러나 혹시나 하여 할아버지를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봤다.

" 안녕하세요. 할아버지...저...뿌에르또 몬뜨에서 만난..."

"누구시라고요?...기억이 잘 안나...누구신지..." 

"아..할아버지께서 남미여행 하실 때 뿌에르또 몬뜨에서 만난..."

"누구신지...기억이..."

"할아버지 남미여행 때 뿌에르또 몬뜨에서 만난 부부 있잖아요. 꽁지머리 하고..."

"아...아...그래요. 그렇군요. 기억 납니다. 하하..."

할아버지는 그제서야 우리를 알아차리시고 웃음을 지으셨다. 참 오랜만에 연결해 본 전화였다. 여행기를 끼적거리면서 이제나 저제나 피일치일 시간을 미룬것도 할아버지에 대한 안부가 두려웠던 게 사실이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나이 여든 한살이시면 하루 하루 촌음을 따지실 나이이며, 이 세상에 대해 큰 미련을 갖지않을 연세가 아닌가 싶다. 필자의 머리 속에는 할아버지께서 전화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우리가 뿌에르또 몬뜨에서 만났던 그 때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너무 반가웠다.





"기억나시죠? 할아버지!!...너무 반갑습니다. 어떻게 잘 지내셨는지요.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반가운지요..." 

"아 알다마다요. 부부가 같이 여행다니시던 분...좀 전에 산에 갔다가 돌아와서 조금 바쁘네요.(점심식사 시간 쯤 됐다). 이따가..."

"그럼...나중에 다시 통화하기로 하고요. 안녕히 계십시오." 

할아버지는 뿌에르또 몬뜨에서도 이런 식(?)이었다. 상대를 불편하지 않게 하면서(사실은 그게 좀 불편했다.진심어린 호의를 주로 거절하셨다.) 자기의 프라이버시는 절대 지키시는 분이셨다. 자존심이 센 분이시랄까. 할아버지는 오래전 월남전 참전용사에 오랜 직업군인 생활에 익숙하신 분이셨다. 




우리가 할아버지와 함께 '마리아 후레시아'가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이틀 동안 함께 머무는 동안 할아버지와 뿌에르또 몬뜨 터미널과 앙헬모 어시장에 함께 간 게 전부였다. 또 민박집으로 돌아와서 아내가 할아버지를 위해 끓여들인 누룽지가 전부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장이 나빠 음식을 잘 못 드시면 설사를 하신다고 했다. 그래서 당신께선 늘 여행 중이나 외출하실 때 마다 보온병에 끓인 물을 넣어 다니며 마신다고 했다. 할아버지께선 그런 몸으로 남미일주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참 대단하신분이라는 생각이 들며 향후 여행길에서 이런 분을 다시는 못 만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필자가 여행길에서 만난 최고령의 여행자이자, 여행의 참 모습을 보여준 분이 아닌가 싶어 우리는 감탄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얼마든지 편하게 다닐 수 있었지만 홀홀단신 혼자 먼 길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께선 처음부터 혼자 남미여행을 떠나신 건 아니었다. 또래의 친구들과 뻬루의 꾸스꼬에서 마츄피츄를 돌아보는 동안 친구들은 고산증으로 낙오되어 한국으로 귀국하고, 자기 혼자 몸으로 물어 물어 계획된 여정을 마무리 하고 있었던 것. 그래서 일정 등에 대해 아는대로 말씀해 드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당신께서 계획하신대로 밀어부칠 요량. 

할아버지께선 뿌에르또 몬뜨를 떠나 뿐따 아레나스 등지를 돌아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상파울로 등지를 통해 귀국길에 오르겠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일정은 일반적인 여행 코스였지만, 필자는 두 번 다시 쉽게 떠날만한 여행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왕이면 명승지를 돌아보시라고 권유하고 있었던 것. 그러나 할아버지의 성격상 필자의 권유에 귀 기울일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여태껏 할아버지 방법대로 자유롭게 살아오셨는데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건 무리였던 것일까.




할아버지께서 우리와 민박집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이틀. 우리와 함께 뿌에르또 몬뜨를 다녀오면서 나눈 이야기와 숙소로 돌아와서 케리어(가방) 손잡이가 고장나 수리할 수 있는 곳이 어딘지 물어본 것과 빠따고니아의 정보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였다. 그리고 이튼날 할아버지께선 어디론가 떠나셨다.

왕복 비행기표의 날짜가 촉박하여 먼 길을 나서지 못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쪽으로 이동하시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어디로 가시던지 물어보는 게 부적절해 보여 우리는 그냥 인사만 건네고 말았다. 그런 분과 용케도(?) 통화가 된 것이다. 그리고 첫 통화를 끝낸 후 대략 3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나 할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여기 대굽니더..."

"안녕하세요. 할아버지...전화 주셨네요. 너무 반갑습니다.^^ " 
 

할아버지께선 사정상 전화를 할 때 먼저 문자메세지를 보낸 후 통화를 하자고 하셨는 데 필자는 그걸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용케 통화되었다는 사실은 그런 것.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정오 때 보다 무척이나 밝았다. 기분이 좋아지신 모양인 듯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고 웃음이 끊이지 않으셨다.




"먼저 전화 받으신 분이 아주머니시죠?...안부 전해드리고요.ㅎ"

아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필자를 바꾸어준 때문에 통화를 못하신 데 대한 인사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오랜만의 대화를 통해 놀랄만한 소식을 다시 듣게 됐다. 할아버지는 우리와 헤어진 이후 곧바로 아르헨티나를 들러 그곳에서 잠시 계시다가 한국으로 곧바로 귀국하셨다. 그리고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무용담 같은 '나홀로 여행' 소식은 필자와 곁에 있던 아내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니까 벌써 작년이네요. 아르헨티나서 귀국해가(귀국한 후) 얼매 있다가...저기 머꼬...멕시코로 갔심더..."

"그때가 언제쯤이지요?..."

"그 때 가...작년 4월달이었지요. 멕시코로 가서...먼저 상파울로에 들러서 멕시코로 가서 그 다음에 쿠바로 갔습니다. 거서(거기서) 한 일주일 있다가...그 담에 거 어디고 땅끝..."

"아 우수아이아 말씀이시군요. 띠에르라 델 푸에고..."

"인자(이제)...생각이 가물가물 하네요.하하...거서 한 일주일 정도 있다가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들러 (민박집)아는 사람들 하고 고기 좀 구워 먹고...이과수(폭포) 들렀다가 한국으로 왔심더. 하하"




참 대단하신분이셨다. 뿌에르또 몬뜨에서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만 해도 할아버지의 건강을 많이도 걱정했다. 할아버지께 죄송한 말씀이지만 건강 때문에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할아버지께선 우리와 함께 앙헬모 어시장을 다녀오는 데도 힘들어 하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터미널에서 숙소로 이어지는 경사가 낮은 언덕길에서 조차 숨을 몰아쉬셨다. 그런 나의 생각을 아셨는지 전화기 너머에서 할아버지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하...내가 죽은 줄 알았을 겁니다. 하하...그라고 또 갔심더. 남미에 다시 댕겨온 후로 이번에는 스페인으로 갔심더. 이번에는 혼자 간 게 아니라 패키지로 다녀왔고요. 12일 동안 스페인에 있다가 댕겨온 후로 여행중에 만났던 사람들하고 대구에서 만나(할아버지 주소지는 영천시 였지만 대구에서 생활) 밥도 먹고 그랬습니다. 그분들 중에 나이가 많은 분이 자기 나이가 칠십 몇이라 카덩가...나 한테 비하면..."

"하하 할아버지...할아버지에 비하면 나이를 들먹일 수 조차 없으시군요. 하하 대단하십니다."

"언제 대구로 내려가는 일이 있으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 동안 서울에 올라오실 기회가 닿으면 꼭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할아버지와 통화내용은 대략 이랬다. 할아버지는 우리의 여정에 대해서도 물으셨다. 우리는 빠따고니아 투어를 마치고 산티아고에 머물며 대략 10개월을 보냈다고 말씀드렸다. 할아버지께선 놀라셨다. 그러나 우리는 할아버지의 전화 속에서 들려온 열정 때문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선 올해 설이 지나면 여든 셋의 연세가 되신다. 83세의 나이에 세계를 안방 드나들 듯 하시는 열정의 원동력이 무엇이겠는가.

필자의 포스트에서 가끔 언급하지만 할아버지께선 보통 사람들이 손 쉽게 택하는 <관광상품> 보다 발품을 팔아 힘들여 느끼는 <여행 삼매경>에 푹 빠져 계셨던 것이다. 아마도 할아버지께선 돌아가실 때까지 길 위를 다니실 게 아닌가 싶었다. 내가 만난 최고령 여행자의 모습을 보며 '여행이란 이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것.




여행이든 인생이든 연습은 없다. 단 한 번 밖에 없는 기회를 통해 삶의 기쁨을 누리는 건 물론, 길 위에서 도를 깨우치면 언제 어느때든 죽어도 그만이라는 게 여행자들이 가질 공통적인 생각은 아닌지 모르겠다. 세상의 법칙은 참 희한하여 목숨을 걸고 도전한 용감한 자에게 세상 모두를 주는 법이며,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용감무쌍한 자의 실상은 세상의 넉넉한 품에 안긴 소박한 한 인간일 뿐인 거. 내가 만난 최고령 여행자이신 할아버지는 그렇게 '통큰' 분이셨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분...그런 분을 어느날 지구반대편의 한 항구도시 민박집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와 만나 앙헬모 어시장으로 갈 땐 만조 때였다.




할아버지의 옷차림에서 느껴지듯 뿌에르또 몬뜨의 봄은 음산한 날씨의 연속이었다.




그런 날씨 속에서 봄꽃들은 곳곳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만조 때나 간조 때나 참 아름다운 풍경의 뿌에르또 몬뜨 항구...




뿌에르또 몬뜨 항구 저 편으로 잔뜩 찌푸린 하늘이 이곳의 봄날씨가 어떤 것인지 말해주고 있다. 할아버지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앙헬모 어시장을 둘러보며 숙소로 돌아왔다. 그 장면을 기념으로 슬라이드쇼와 사진으로 담아둔 것. 사람들은 말한다. 수도원과 감옥의 공통점은 세상과 단절된 곳이며,두 곳은 '불평과 감사'라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어쩌면 '관광과 여행'을 둘로 나누면 위와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집 떠나 고생하는 건 매한가지지만 불평이 더 많은 곳이 관광쪽이 아닐까 싶은 생각. 여든 셋 할아버지의 투혼과 같은 여행을 목격하면서 더욱더 굳어버린 '여행의 가치'다. 마치 바닷물이 다 빠져나간 간조 때의 뿌에르또 몬뜨 항구에 바닷물이 꽉 찬 모습을 보는 것 처럼 말이다. 무엇이든 비우면 다시 차게 되거나 채울 수 있게 된다. **영상을 열어보며 보너스를 즐기시기 바란다. ^^
 
뿌에르또 몬뜨 '앙헬모' 어시장 풍경<칠레산 바닷게 철갑을 두른 듯>
 



 


 
내가 만난 최고령 여행자와 꼬챠유요

-볼수록 신기한 '꼬챠유요' 돼지 껍데기 닮아-





뿌에르또 몬뜨의 앙헬모 어시장에 들르게 되면 이런 풍경은 예삿일.칠레의 해산물이 모여드는 시장에서는 흔히 보는 풍경이다.




큼직한 홍합살이나 조갯살을 잘 발라 두름에 엮어 둔 풍경. 보기만 해도 눈요기 거리다. 이런 해물은 각종 요리에 다양하게 쓰일 수 있는 식재료이며 향이 독특하다. 그 어떤 요리에도 어울리는 조갯살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앙헬모 어시장에서 가까운 곳에 머무르고 있었으므로 말린 조갯살 보다 싱싱한 홍합살을 애용했지만, 만에 하나 이곳에 오래토록 머무르게 된다면 해산물을 좋아하는 우리는 말린 조갯살에 눈독을 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두름에 줄줄이 엮어둔 조갯살 외 우리에게 낮익은 풍경 하나가 보인다. 그림 왼쪽...




마치 돼지 껍데기를 말려놓은 듯한 짙은 갈색의 낮익은 물건(?)...


Panoramica de la aldea y el cochayuyo secando al sol. (칠레 북부 'Antopagasta'의 한 어촌에서 볕에 말리고 있는 꼬챠유요)


이 식품의 이름이 '꼬챠유요(cochayuyo )'라고 알게 된 건 시간이 꽤 지난 다음이었다. 꼬챠유요를 파는 상인들에게 이름을 물어보고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본 다음이었다. 생김새도 희한한 꼬차유요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다시마 같은 해조류였다. 그래서 이해를 돕기 위해 꼬챠유요 자료사진을 구해 보여드리고 있는 것. 산티아고에서 한 방송을 보니 꼬챠유요는 학교급식의 수프로 제공되고 있었다.
 




뿌에르또 몬뜨로 여행하시는 분들이 '이게 뭔가'하고 자주 문의해 오셨다. 그 분들은 색깔이나 생김새 때문에 꼬챠유요가 돼지 껍데기 (말린)정도로 알고 있었던 것. 누가 봐도 꼬챠유요를 처음 보시는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거 같다. 생활이 나아짐에 따라 비만 걱정을 하게 된 것도 칠레였다. 농업국가인 칠레에도 어느덧 문명병이 찾아오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먹는 량 보다 움직임이 적거나 정적인 일이 이들을 서서히 지배하고 있었던 것. 보다 편리하고 보다 쉽게 살고자 하는 건 인간들의 장점이자, 동시에 크나 큰 단점인 욕망이 부추긴 허상 아니던가.




앙헬모 어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날 수 있는 뿌에르또 몬뜨 터미널 근처의 풍경은 이런 모습. 당도가 진한 과실 옆으로 꼬챠유요가 보인다. 이곳에서 대략 10분 정도 걷게 되면 할아버지와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에 도착하게 된다. 작은 언덕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 그곳에는 풀꽃이 지천에 널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을 할아버지와 함께 걸었다.




할아버지께선 이 나지막한 언덕을 오르시면서 숨을 내몰아 쉬셨다. 그 순간 얼굴빛은 창백해 보였다. 두 손으로 배낭끈을 부여잡고 언덕길을 오르고 계셨던 것. 그런 모습을 보며 할아버지의 안녕을 빌고 또 빌며 무사히 건강하게 잘 귀국하셨으면 하는 바람을 하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반가웠던 이유는 그것 하나 뿐. 




필자가 여행길에 만난 분 중에 최고령의 연로하신 분과 뿌에르또 몬뜨의 한 낮선 민박집에서 만난 것이다. 할아버지께선 나와 함께 뿌에르또 몬뜨의 오래되고 색바랜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여행자만 느낄 수 있는 풍물...색바래고 오래된 풍경 속에서 뿌에르또 몬뜨와 풀꽃은 여전히 아름답다.



베스트 블로거기자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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