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의 화령전 운한각의 '생존비밀'을 엿보다
-목조건축물의 백미 수원화성의 화령전 운한각 -
두 얼굴은 어느곳에나 존재하는 것일까.
가을이 저만치 가고 곧 겨울이 코 앞에 다가오고 있다. 첫 눈 소식이 들려온 지 며칠 됐다. 곧 겨울이 다가와 알록달록했던 만추의 추억 전부를 하얗게 덮어버릴 것이다. 세상은 다시 겨울 속으로 빠져들며 가을은 그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할 것이다. 그런 전설이 한 두 번도 아니고 수 백 번씩 이어지면 우리 기억 속에 남는 건 말 그대로 '전설' 밖에 존재하지 않는 지. 지난 4일 <미디어다음>이 주관한 '파워소셜러팸투어'를 통해 수원 화성행궁 옆에 위치한 화령전 운한각을 둘러본 감흥 조차 아득해 보인다. 시간이 꽤나 흘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앨범 속에는 당시의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려줄 '민낯(화장을 하지 않은 본디 그대로의 얼굴)'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남아있어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글쓴이는 운한각을 둘러 보면서 요즘 '생얼'로 표현되는 화장기 없는 민낯의 목조 건축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운학각을 올려다 보며 혼자 중얼거리듯 "단청을 칠하지 않은 게 더 나아보이네..."라고 말하자 동행한 문화재답사 전문가 하주성님이 곁에서 짧막하게 대답해 주었다.
"단청을 칠 한 것 보다 목재의 원형을 그대로 살린(자연미를 보여주는) 게 훨씬 더 아름답지요."
1908년 일제는 먼저 정조의 어진을 덕수궁 선원전으로 이안한 후, 왕조의 상징을 헐어내기위해 화령전을 자혜의원으로 개원했던 것이다. 화가 치밀 정도로 안타까운 기록이었다. 수원 화성행궁과 화령전은 '잠저(潛邸, 임금으로서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와 사당의 관계였고, 정조대왕 사후 후대의 왕들이 왕실의 법도에 따라 예를 표했던 조선의 자존심과 다름없는 건축물이자 귀중한 공간이었다.
일제는 그런 조선의 권위와 표상에 흠집을 냄으로서 조선의 맥을 끊고자 해꼬지를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천만다행히도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던것이다. 지난 4일, 우리 일행은 민낯의 풍모를 지닌 운한각 처마 아래에서 200여 년 전의 전설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정조의 어진이 봉안된 운한각 만큼은 원형이 보존되었다니. 그렇다면 화령전의 사지가 다 비틀린 가운데서도 운한각만 본래의 모습을 갖추게 된 이유라도 있다는 말일까.
그 이유는 대략 한 두가지로 축약된다. 그게 운한각의 '민낯의 비밀'이자 정조대왕의 어진이 봉안된 어진봉안각의 '숨겨진 전설'이 아닌가 싶다. 나는 운한각 처마 밑에서 처마 위를 올려다 보며 정조대왕의 어진 '추사((追寫, 추사란 왕의 생존 시에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에 그 수용을 그린 그림)'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운한각을 단단히 떠 받치고 있는 기둥은 물론, 운한각을 짓기 위해 사용된 목재들이 '대목장(나무로 궁궐, 사찰, 비각, 종각 따위의 규모가 큰 건축물을 짓는, 대목 일에 능한 장인)'의 손길을 거쳐 실로 아름답고 반듯한 모습으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앨범 속에는 당시의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려줄 '민낯(화장을 하지 않은 본디 그대로의 얼굴)'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남아있어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글쓴이는 운한각을 둘러 보면서 요즘 '생얼'로 표현되는 화장기 없는 민낯의 목조 건축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운학각을 올려다 보며 혼자 중얼거리듯 "단청을 칠하지 않은 게 더 나아보이네..."라고 말하자 동행한 문화재답사 전문가 하주성님이 곁에서 짧막하게 대답해 주었다.
"단청을 칠 한 것 보다 목재의 원형을 그대로 살린(자연미를 보여주는) 게 훨씬 더 아름답지요."
그랬다. 화성행궁 옆의 화령전 운한각은 자연미인과 같은 민낯으로 200여 년을 버티며 우리 일행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운한각은 안타깝게도 온전한 민낯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운한각도 일제의 만행을 비켜가지 못했던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1910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수원화성의 심장 화성행궁과 함께 화령전의 수난이 시작된 것이다.
1910년 10월 경기도관찰부가 서울로 이전하면서 노천진료를 했던 자혜의원이 장소의 협소함을 들고 화령전으로 옮긴 게 수난의 시작이었다. 그나마 하늘의 노여움과 백성들의 민심이 걱정되었던 지. 운한각 만 남기고 좌우건물은 모두 병원으로 활용됐다. 그리고 이듬해(1911년) 다시 병원을 화성행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봉수당 정전은 병원본관으로 삼고, 주변의 부속건물까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증.개축됨으로서 결국 낙남헌 만을 남긴 채 '경기도립수원의원'으로 바뀌게 됐다는 것.
1908년 일제는 먼저 정조의 어진을 덕수궁 선원전으로 이안한 후, 왕조의 상징을 헐어내기위해 화령전을 자혜의원으로 개원했던 것이다. 화가 치밀 정도로 안타까운 기록이었다. 수원 화성행궁과 화령전은 '잠저(潛邸, 임금으로서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와 사당의 관계였고, 정조대왕 사후 후대의 왕들이 왕실의 법도에 따라 예를 표했던 조선의 자존심과 다름없는 건축물이자 귀중한 공간이었다.
일제는 그런 조선의 권위와 표상에 흠집을 냄으로서 조선의 맥을 끊고자 해꼬지를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천만다행히도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던것이다. 지난 4일, 우리 일행은 민낯의 풍모를 지닌 운한각 처마 아래에서 200여 년 전의 전설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정조의 어진이 봉안된 운한각 만큼은 원형이 보존되었다니. 그렇다면 화령전의 사지가 다 비틀린 가운데서도 운한각만 본래의 모습을 갖추게 된 이유라도 있다는 말일까.
그 이유는 대략 한 두가지로 축약된다. 그게 운한각의 '민낯의 비밀'이자 정조대왕의 어진이 봉안된 어진봉안각의 '숨겨진 전설'이 아닌가 싶다. 나는 운한각 처마 밑에서 처마 위를 올려다 보며 정조대왕의 어진 '추사((追寫, 추사란 왕의 생존 시에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에 그 수용을 그린 그림)'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운한각을 단단히 떠 받치고 있는 기둥은 물론, 운한각을 짓기 위해 사용된 목재들이 '대목장(나무로 궁궐, 사찰, 비각, 종각 따위의 규모가 큰 건축물을 짓는, 대목 일에 능한 장인)'의 손길을 거쳐 실로 아름답고 반듯한 모습으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수원박물관에서 만난 대목장의 가르침과 운한각의 생존비밀
그 모습은 노송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장인들의 조각품이었으며, 그 조각품들은 한 땀 한 땀 정성을 드린 장인들의 손길과 함께 한 배 두 배 이어진 '사람사는 세상'을 향한 기도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 정성이 얼마나 깊었으면 최소한 20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조금도 뒤틀리지 않고 원형을 보존한 가운데 목재 본연의 품위를 간직하고 있는 지.
민낯의 운한각의 비밀이 드러난 건 우리 일행이 운한각을 떠나 수원박물관으로 이동한 후였다. 운한각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생얼을 간직한 이유라고나 할까. 때마침 수원박물관에는 '한.중.일 전통목조건축 대목장의 세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운학각의 생존비밀을 엿 볼 수 있는 일본의 대목장 '니시오카 스승의 가르침'이 눈에 띄었다. 니시오카 스승의 가르침은 이랬다.
니시오카 스승의 가르침
"신불(神佛)을 숭상하지 않는 자는 사두가람(社頭伽藍)을 논하지 말라.
가람 조영(造營)에는 사신상응(四神相應)의 땅을 찾아라.
당탑(堂塔)으로 쓸 목재는 나무를 사지말고 산을 사라.
나무는 생육 방위에 맞춰 사용하라.
당탑의 성질은 나무의 성질을 살펴서 맞추라
나무의 성질 맞추기는 목수들의 마음 맞추기와 같다.
목수들의 마음 맞추기는 동량이 목수들에게 가지는 따뜻한 마음이다.
백 명의 목수가 있으면 백 가지 생각이 있다. 이것을 하나로 통솔하는 것이 동량의 기량이다.
백론(百論)을 하나로 고정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백론을 하나로 모으는기량이 없는 자는 동량의 자리를 떠나라.
여러가지 기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상신의 은덕이니 조상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수원박물관에서 니시오카 스승의 가르침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그 비밀 속에는 대목장의 자격에서부터 대목장의 마음가짐이나 대목장이 나무를 어떻게 다루는 지 등에 대한 기록이 솔직 담백하게 적혀있었다. 이 기록을 참조하면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눈에 비친 화령전의 운한각은 나무랄 데 없는 걸작품이자, 니시오카의 가르침 이상의 명품중에 명품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퍼뜩 드는 것이다. 운한각은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조금도 뒤틀리거나 목재 본연의 빛깔을 퇴색 시키지 않고 우리를 굽어 살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몰랐던 대목장의 목조건축술이 운한각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운한각이 민낯으로 생존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운한각의 목조건축술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화령전에 해꼬지를 가한 일제가 운한각을 마주 대하면서 차마 훼손할 수 없는 걸작이었을 것이며, 그곳에는 조선의 자존심과 다름없는 정조의 어진이 봉안된 곳이 아니었나. 운한각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자칫 조선인의 자존심을 건드려 화를 자초하는 한편, 이들이 소중하게 여기던 진귀한 예술품이 훼손되는 걸 달갑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테면 운한각은 조선의 얼이 깃든 모습이자, 더도 덜도 보태거나 빼지않은 순수함의 극치를 보여준 목조건축물이자 조선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그 자존심이 잘 조각된 운한각 처마 밑에서 살펴본 모습은 이랬다.
수원박물관에 소장된 '니시오카 스승의 가르침'이 담긴 원문
민낯의 운한각의 비밀이 드러난 건 우리 일행이 운한각을 떠나 수원박물관으로 이동한 후였다. 운한각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생얼을 간직한 이유라고나 할까. 때마침 수원박물관에는 '한.중.일 전통목조건축 대목장의 세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운학각의 생존비밀을 엿 볼 수 있는 일본의 대목장 '니시오카 스승의 가르침'이 눈에 띄었다. 니시오카 스승의 가르침은 이랬다.
니시오카 스승의 가르침
"신불(神佛)을 숭상하지 않는 자는 사두가람(社頭伽藍)을 논하지 말라.
가람 조영(造營)에는 사신상응(四神相應)의 땅을 찾아라.
당탑(堂塔)으로 쓸 목재는 나무를 사지말고 산을 사라.
나무는 생육 방위에 맞춰 사용하라.
당탑의 성질은 나무의 성질을 살펴서 맞추라
나무의 성질 맞추기는 목수들의 마음 맞추기와 같다.
목수들의 마음 맞추기는 동량이 목수들에게 가지는 따뜻한 마음이다.
백 명의 목수가 있으면 백 가지 생각이 있다. 이것을 하나로 통솔하는 것이 동량의 기량이다.
백론(百論)을 하나로 고정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백론을 하나로 모으는기량이 없는 자는 동량의 자리를 떠나라.
여러가지 기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상신의 은덕이니 조상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수원박물관에서 니시오카 스승의 가르침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그 비밀 속에는 대목장의 자격에서부터 대목장의 마음가짐이나 대목장이 나무를 어떻게 다루는 지 등에 대한 기록이 솔직 담백하게 적혀있었다. 이 기록을 참조하면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눈에 비친 화령전의 운한각은 나무랄 데 없는 걸작품이자, 니시오카의 가르침 이상의 명품중에 명품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퍼뜩 드는 것이다. 운한각은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조금도 뒤틀리거나 목재 본연의 빛깔을 퇴색 시키지 않고 우리를 굽어 살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몰랐던 대목장의 목조건축술이 운한각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운한각이 민낯으로 생존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운한각의 목조건축술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화령전에 해꼬지를 가한 일제가 운한각을 마주 대하면서 차마 훼손할 수 없는 걸작이었을 것이며, 그곳에는 조선의 자존심과 다름없는 정조의 어진이 봉안된 곳이 아니었나. 운한각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자칫 조선인의 자존심을 건드려 화를 자초하는 한편, 이들이 소중하게 여기던 진귀한 예술품이 훼손되는 걸 달갑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테면 운한각은 조선의 얼이 깃든 모습이자, 더도 덜도 보태거나 빼지않은 순수함의 극치를 보여준 목조건축물이자 조선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그 자존심이 잘 조각된 운한각 처마 밑에서 살펴본 모습은 이랬다.
목조건축술의 백미를 보여준 화령전 운한각의 모습
운한각의 처마 밑에서 얼쩡거린 보람이 있는 지. 운한각을 잠시 둘러보는 데 선조님들의 손길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 중에서도 운한각을 짓기 위해 공을 들인 대목장 등 장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만한 목조건축물을 지으려면 손길이 여간 많이 가는 게 아니었다. 그 수고를 확인해 준 게 수원박물관의 '한.중.일 전통목조건축 대목장의 세계' 전시회였던 것이다. 그곳에는 전통목조건축물이 어떤 과정을 통해 지어졌는 지 등에 대해 축소모형 등을 통해 일반에 알리고 있었다. 전시장에 소개된 '목조건축의 총책임자,대목장'에 대해 살펴보면 이러하다.
"19세기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 건축을 설계하고 집을 지어나가는 주체는 목수나 석공으로 대표되는 장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대목장은 전체과정을 책임지는 건축가로서 다른 어떤 직종의 장인보다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고종 때의 서울 동대문의 상량 기록을 보면 목수편수(木手遍手)휘하에 12개 분야의 편수가 속해 있었다. 궁궐건축에 있어서 편수 한 명이 거느린 일반 장인이 대략 30명 정도이니, 목수편수 한 명이 360명 정도의 장인을 통솔하며 건축물을 완성하는 셈이다. 비록 궁궐건축의 모습은 아니지만 <단원풍속화첩>에 수록된 '기와이기'에 대목장과 여러 목수가 등장하고 있다. 장척을 들고 건축을 지휘하는 대목장, 대패질을 하는 목수, 먹통으로 다림보기를 하는 목수 등 다양한 건축장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운한각은 궁궐이 아니라 정조의 어진을 모신 '어진봉안각'이어서 궁궐에 비교할 만한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목조건축물의 건축과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었다면, 운한각의 풍모를 보는 즉시 보물처럼 여겼을 게 틀림없다. 운한각은 단순히(?) 어진봉안각이 아니라 조선의 목조건축술이 집약된 거대한 조각품이라고나 할까.
수원박물관의 '한.중.일 전통목조건축 대목장의 세계' 전시회를 둘러보는 동안 운한각의 빼어난 건축술을 엿 볼 수 있는 한 축소모형(구인사 대조사전 공포 모형)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 시대 최고의 대목장(大木匠)으로 알려진 신응수 씨(무형문화재 74호)가 출품한 모형이었다. 그는 빼어난 목조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는 '구인사 대조사전' 건축을 직접 지휘한 대목장이었는 데, 구인사 대조사전 건축 과정을 참조해 보면 운한각의 가치를 단박에 알 수 있을 거 같다. 그 과정은 이랬다.
구인사 대조사전의 건축은 대략 10년의 기간이 소요됐다. 이 건축물의 높이는 국내에서는 제일 높은 27m의 3층 다포집이다. 건평은 1층 85평을 포함해 3층을 합하면 167평이며 겉에서 보면 3층이지만 속에서 보면 한 층으로 터져있다. 중심기둥은 높이가 무려 16.5m이고, 둘레는 어른들이 양팔을 벌려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굵고 높아서 이같은 건축 양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주목해야 할 게 있다.
이 건축물에 쓰인 10개의 중심 기둥은 태백산 소나무(춘양목)로 수령이 350년 된 목재다. 따라서 당분간 국내에서는 이런 건축물이 지어질 수 없다는 관측이 쉽게 나온다. 350년 된 소나무 10그루를 어떻게 장만하겠는가. 이 건축물에 쓰인 나무는 용케도 경복궁 보수에 쓰려고 베어 두었던 나무가 궁궐보수가 취소 되는 바람에 구인사가 취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건물에 사용된 목재는 총 50만재에 이르고, 목재들은 3년 이상 건조시키는 건 기본. 모든 작업은 수공으로 하고 못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짜 맞추어 지었다고 한다. 바로 이 시대 최고의 대목장(大木匠)으로 알려진 신응수 씨가 맡아 시공한 목조건축물이다.
주초석.주춧돌 및 기단에 사용된 돌들은 국내 최고의 돌로 인정받는 강화 애석을 사용했고, 모든 목재는 방충.방염을 위해 원주산 옻으로 12번에 걸쳐 덧칠을 했다고 한다. 옻칠을 하면 목재 속에 숨어있는 갖가지 벌레들이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밖으로 기어나와 소나무가 썩지않는다는 것. 또 나무 속에 남아있는 진을 보존할 수 있어서 1000년이 지나도록 떠 받칠수 있는 힘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조선시대)목조건축술에 사용된 기술 등은 일제강점기 당시 화령전 운한각을 둘러보던 사람들의 눈에 띄지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게 글쓴이가 주장하는 운한각의 생존비밀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움은 누가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또 목조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대목장이 될 필요나 이유는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칠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라 미스뜨랄'은 그녀의 저서를 통해 '아름다움은 신의 그림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마음 속에 신의 그림자가 드리운 사람들의 눈에는 아름다움이 절로 느껴지는 게 아닌가. 정조의 어진이 모셔진 운한각 처마 밑을 거닐다가 눈을 들어 팔달산의 서장대를 올려다 보면 정조가 꿈꾸던 아름다운 세상이 절로 느껴지게 된다.
운한각이 지어진 지 어느덧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지만 운한각을 떠 받치고 있는 기둥과 처마 등을 살피면 200년의 세월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생생하다. 세월을 느낄 수 있는 건 녹 쓴 철제 장식물 뿐이다. 1801년에 지어진 건물로 보기엔 너무도 생생한 민낯의 목조건축물이었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정조(재위 1776∼1800)의 어진을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조선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순조가 직접 아버지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했다는 곳이다. 화령전 안에는 제향에 사용하던 제정(우물)이 남아있었다. 우물에서는 여전히 맑은 물이 조금씩 넘쳐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정조의 어진이 목이 마를때 이곳을 다녀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역사는 우물물 처럼 조금씩 조금씩 우리들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지만, 민낯의 운한각을 둘러보니 어제가 오늘 같기만 하다. 전설은 그렇게 우리들 곁에 남아있는 것 같다.
<Never Ending Story...수원화성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세기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 건축을 설계하고 집을 지어나가는 주체는 목수나 석공으로 대표되는 장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대목장은 전체과정을 책임지는 건축가로서 다른 어떤 직종의 장인보다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고종 때의 서울 동대문의 상량 기록을 보면 목수편수(木手遍手)휘하에 12개 분야의 편수가 속해 있었다. 궁궐건축에 있어서 편수 한 명이 거느린 일반 장인이 대략 30명 정도이니, 목수편수 한 명이 360명 정도의 장인을 통솔하며 건축물을 완성하는 셈이다. 비록 궁궐건축의 모습은 아니지만 <단원풍속화첩>에 수록된 '기와이기'에 대목장과 여러 목수가 등장하고 있다. 장척을 들고 건축을 지휘하는 대목장, 대패질을 하는 목수, 먹통으로 다림보기를 하는 목수 등 다양한 건축장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운한각은 궁궐이 아니라 정조의 어진을 모신 '어진봉안각'이어서 궁궐에 비교할 만한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목조건축물의 건축과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었다면, 운한각의 풍모를 보는 즉시 보물처럼 여겼을 게 틀림없다. 운한각은 단순히(?) 어진봉안각이 아니라 조선의 목조건축술이 집약된 거대한 조각품이라고나 할까.
수원박물관의 '한.중.일 전통목조건축 대목장의 세계' 전시회를 둘러보는 동안 운한각의 빼어난 건축술을 엿 볼 수 있는 한 축소모형(구인사 대조사전 공포 모형)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 시대 최고의 대목장(大木匠)으로 알려진 신응수 씨(무형문화재 74호)가 출품한 모형이었다. 그는 빼어난 목조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는 '구인사 대조사전' 건축을 직접 지휘한 대목장이었는 데, 구인사 대조사전 건축 과정을 참조해 보면 운한각의 가치를 단박에 알 수 있을 거 같다. 그 과정은 이랬다.
구인사 대조사전의 건축은 대략 10년의 기간이 소요됐다. 이 건축물의 높이는 국내에서는 제일 높은 27m의 3층 다포집이다. 건평은 1층 85평을 포함해 3층을 합하면 167평이며 겉에서 보면 3층이지만 속에서 보면 한 층으로 터져있다. 중심기둥은 높이가 무려 16.5m이고, 둘레는 어른들이 양팔을 벌려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굵고 높아서 이같은 건축 양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주목해야 할 게 있다.
이 건축물에 쓰인 10개의 중심 기둥은 태백산 소나무(춘양목)로 수령이 350년 된 목재다. 따라서 당분간 국내에서는 이런 건축물이 지어질 수 없다는 관측이 쉽게 나온다. 350년 된 소나무 10그루를 어떻게 장만하겠는가. 이 건축물에 쓰인 나무는 용케도 경복궁 보수에 쓰려고 베어 두었던 나무가 궁궐보수가 취소 되는 바람에 구인사가 취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건물에 사용된 목재는 총 50만재에 이르고, 목재들은 3년 이상 건조시키는 건 기본. 모든 작업은 수공으로 하고 못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짜 맞추어 지었다고 한다. 바로 이 시대 최고의 대목장(大木匠)으로 알려진 신응수 씨가 맡아 시공한 목조건축물이다.
주초석.주춧돌 및 기단에 사용된 돌들은 국내 최고의 돌로 인정받는 강화 애석을 사용했고, 모든 목재는 방충.방염을 위해 원주산 옻으로 12번에 걸쳐 덧칠을 했다고 한다. 옻칠을 하면 목재 속에 숨어있는 갖가지 벌레들이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밖으로 기어나와 소나무가 썩지않는다는 것. 또 나무 속에 남아있는 진을 보존할 수 있어서 1000년이 지나도록 떠 받칠수 있는 힘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조선시대)목조건축술에 사용된 기술 등은 일제강점기 당시 화령전 운한각을 둘러보던 사람들의 눈에 띄지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게 글쓴이가 주장하는 운한각의 생존비밀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움은 누가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또 목조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대목장이 될 필요나 이유는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칠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라 미스뜨랄'은 그녀의 저서를 통해 '아름다움은 신의 그림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마음 속에 신의 그림자가 드리운 사람들의 눈에는 아름다움이 절로 느껴지는 게 아닌가. 정조의 어진이 모셔진 운한각 처마 밑을 거닐다가 눈을 들어 팔달산의 서장대를 올려다 보면 정조가 꿈꾸던 아름다운 세상이 절로 느껴지게 된다.
운한각이 지어진 지 어느덧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지만 운한각을 떠 받치고 있는 기둥과 처마 등을 살피면 200년의 세월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생생하다. 세월을 느낄 수 있는 건 녹 쓴 철제 장식물 뿐이다. 1801년에 지어진 건물로 보기엔 너무도 생생한 민낯의 목조건축물이었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정조(재위 1776∼1800)의 어진을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조선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순조가 직접 아버지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했다는 곳이다. 화령전 안에는 제향에 사용하던 제정(우물)이 남아있었다. 우물에서는 여전히 맑은 물이 조금씩 넘쳐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정조의 어진이 목이 마를때 이곳을 다녀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역사는 우물물 처럼 조금씩 조금씩 우리들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지만, 민낯의 운한각을 둘러보니 어제가 오늘 같기만 하다. 전설은 그렇게 우리들 곁에 남아있는 것 같다.
<Never Ending Story...수원화성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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