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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나와 우리덜

착한 외모가 뿜어낸 화끈한 진검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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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외모가 뿜어낸 화끈한 진검무예
[수원 화성 답사기]수원 화성을 지킨 정조대왕의 친위부대 '장용영'의 위용

수원화성 신풍루 앞에서 화끈한 '무예24기'를 선 보인 장영용의 무사 최형국님, 그는 무술의 고단자(무술 합계 15단 이상)이다.


날선 진검의 위력은 어느 정도나 될까.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해주신 이 분...참 착하게 생기신 분이다. 옆구리에 칼을 차고 갑주를 둘렀지만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보면, 이웃에 살고있는 오빠나 삼촌 처럼 너무도 친근하다. 그러나 그가 수원 화성의 행궁 신풍루 앞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진검의 위력을 살펴보면 무시무시할 정도 이상이다. 진검의 위력을 알 수 있게 젖은 볏짚단을 세워두고 한 순간 기합과 함께 싹둑 잘려나가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과 탄성을 절로 짓게 만든다. 진검이 볏짚단 대신 가상적군의 몸을 향해 허공을 그었다면 미쳐 피하지 못한 적군의 사지 어느 한 부분은 졸지에 잘려나갈 수 밖에 없었다. 무시무시한 위력과 화끈함을 동시에 지닌 진검이었다. (아래 영상에 그 장면을 담았다.)





순식간에 진검으로 볏짚단을 싹둑 날려버린 화끈한 이 장면은 이틀전(11월 4일 오후), 수원 화성 행궁 신풍루 앞에서 재연된 '무예24기' 중의 한 장면이다. 1박 2일 동안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수원 화성을 둘러보는 동안 비통에 젖은 사도세자의 슬픔을 한 순간에 날려버린 매우 역동적인 장면이랄까. 수원 화성만 둘러보는 데 1박 2일의 시간이 빠듯하게 느껴졌는 데, 마지막으로 관람한 무예24기 퍼포먼스는 수원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행사가 아닌가 싶었다.





이날 신풍루 앞에서 무예24기 시범을 보인 용맹한 군사들은 정조대왕 당시 무예24기 퍼포먼스의 한 모습으로, 장용영은 1785년 조선 후기 국왕의 호위를 맡아보던 숙위소를 폐지하고 새로운 금위체제에 따라 조직.개편한 국왕 호위군대이다. 왕의 친위부대가 장용영이었던 것이다. 장용영의 창설은 당시 노론과 소론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조대왕이 왕권을 강화(물리력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장용영은 한양과 화성 두 군데 두었는 데, 그 중심부대는 화성을 지키게 하였고, 무예보통지(武藝譜通志)의 무예로 군사들을 단련시켰다고 한다. 수원 화성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진검으로 선 보인 무예24기가 그 중 한 장면이었던 것이다. 




무예24기는 무예이십사반(武藝二十四般)으로 불리기도 하는 데 조선 정조 때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普通志)>에 수록된 총24가지의 군사훈련기술을 말한다. 여기에 권법과 같은 맨손 무술과 창, 검, 도, 편곤등의 병기를 사용하는 기법, 그리고 말을 타고 병기들을 사용하는 기법, 마상재, 격구 등이 체계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한.중.일 동양삼국의 병기술과 기마술이 체계적으로 그림과 설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동양삼국의 무술 중 주로 장점만을 택한 게 또한 무예24기라고 현장의 해설사가 귀뜸에 준 이야기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84년 정조는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고 이를 축하하기위해 무과에서 2천명을 합격시켰다. 이듬해 홍복영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경과에 합격한 무사들을 장용위에 설치하고 약 500여 명을  5대로 나누어 편제하였다. 그리고 1788년에 장용영으로 개칭하고, 1793년에는 도성 중심의 내영과 그 외곽인 수원 성곽 중심의 외영으로 확대 편제하여 기존 5군영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수원박물관에서 만난 왕의 친위부대 '장용영'의 배치도 
 

또 1795년에 다른 군영의 군대를 흡수해서 5사 23초의 편제를 갖추었고 장용사(장용영 대장)가 이를 지휘하였으며 1802년(순조 2)에 폐지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수원 화성 등을 돌아보는 1박 2일 투어에서 마지막으로 관람하게 된 수원박물관에서 정조대왕의 친위부대 장용영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는 지 다시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림을 잘 살펴보시면 정조대왕이 자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수원을 행차하는 동안, 화성을 축조하는 등의 노력이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정도의 노력을 기울인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진검을 들고 무예24기 시범에 나선 장용영의 용맹한 무사


행궁의 규모가 필요 이상으로 커 보이는 게 그것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세종시 같은 역할을 수원이 담당하고 있었던 셈인 데, 주지하다시피 정조는 장용영이라는 용맹스러운 친위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살설'을 남기고 아버지와 같은 비운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와 함께 
갑작스러운 정조의 죽음에 따라 노론벽파들에 의해 장용영이 해체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수원 화성의 행궁 신풍루 앞에서 재연된 무예24기 재연을 통해 무력 보다 더 무서운 권력의 음모와 술수를 마주 대하고 있었던 것일까...<계속>

*1박 2일 동안 빠듯하게 다녀온 <수원 화성 파워소셜러 투어>를 통해  수원과 정조대왕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화보와 함께 몇 편으로 엮어 연재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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