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사이 대한민국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폭우 때문에 폭염은 누구러뜨려졌지만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의 '유신'에 온 몸으로 맞선 故장준하 선생님의 유골(그림출처 한겨레) 때문이다. 장준하 선생님의 두개골 사진을 보면 법의학(法醫學- 응용 의학의 한 부문. 법률상 문제되는 의학적, 과학적 사항을 연구하여 이를 해결함으로써 법 운영에 도움을 주고 인권 옹호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사체(死體)에 대한 검안, 부검 및 출생, 사망, 혼인, 이혼, 친자 관계, 연령 및 정신 이상의 유무 등의 판단에 근거를 제공하여 합리적인 법 운영에 기여한다.-)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한 의혹을 가져야 마땅한 모습이다. 두개골이 동그란 원형의 망치 같은 물체에 가격 당해 움푹 패인 모습이며, 그 충격으로 주변의 두개골이 동시에 균열이 간 상태이다. 장준하 선생님이 의문사 한 지 37년 만에 세상에 드러낸 충격적인 모습이다.
장준하 선생님의 유골 모습 등을 맨 먼저 단독으로 전한 <한겨레>에 따르면 "37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장 선생의 두개골에는 벼랑에서 추락했다고 보기 어려운, 지름 6㎝가량 원형으로 파인 상흔이 매우 뚜렷했다. 진황색 두개골은 머리뼈 형태나 치아 상태도 그다지 썩지 않은 채로 꽤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두개골 오른쪽 원형으로 금이 간 상처 부위는 깊이 1㎝가량 들어간 상태였다. 상처 오른쪽 위 45도 각도로 금이 가 있고, 위쪽과 아래쪽으로도 갈라져 있었다."고 말했다. 보통사람들의 눈에 비친 모습이 주로 이러하다. 그러나 법의학자의 눈에 비친 장준하 선생님의 (의문)사인은 조금 다르다.
법의학자의 눈에 비친 장준하 선생님의 '직접 사망 원인'은 "후두부 골절 부위가 해부학적으로 추락으로 인해 손상당하기 어려운 부위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해부학적으로 추락으로 인해 손상당하기 어려운 부위'라며 추락사를 부인하고 있는 모습이다. 법의학자의 소견 등에 따르면 장준하 선생님은 유신 시절 경기도 포천 이동면 약사봉에서 등산 중 추락사 한 게 아니라, 누구인가로 부터 테러를 당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요 며칠 사이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실체가 장준하 선생님의 의문사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똑같은 사실을 놓고 취재를 한 언론(기자)에 작은 차이가 드러나고 있었다. 다음은 <한국일보>에서 취재(촬영)한 장준하 선생님의 두개골 모습이다.
맨 처음 본 장준하 선생님의 두개골 모습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지만, 사진을 촬영하는 각도(위치 등)에 따라 사실이 왜곡된 모습이다. 한겨례가 촬영한 모습과 적지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정도의 차이는 얼마든지 눈감고 넘어갈 수 있다. 언론사 마다 똑같은 자료를 공유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사 내용을 들여다 보면 작은 차이 이상의 괴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일보는 서울대 법의학연구소(주임교수 이윤성)소견서에 따라 "머리 손상이 가격에 의한 것인지 또는 넘어지거나 추락하면서 부딪쳐 생긴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고 한 내용을 통해 향후 장준하 선생님의 의문사 의혹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참 알 수 없는 소견이 서울대 법의학연구소로 부터 나온 것이다. 법의학자라면 최소한 자신의 전문지식 등에 따라 '가격'에 의한 것인 지 넘어지거나 '추락'에 의한 것인 지 등에 대해 알 수 있을 텐데 그는 향후 이 사건이 미칠 파장에 대해 일찌감치 탈출구를 마련해 놓은 듯 하다. 이번에는 사람들로 부터 조중동 내지 찌라시로 평가받는 <조선닷컴>을 통해 장준하 선생님의 두개골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조선은 그나마 장준하 선생님의 유골 사진 한 장도 올려놓지 않고 기존의 주장만 되풀이 하면서 서울대 법의학연구소의 소견에 매달리고 있었다. 지난 37년 동안 장준하 선생님의 사인이 의혹 속에 갇혀지낸 게 차마 언론이라 부를 수 없는 이런 집단 때문인 지도 모른다. 사실을 가장한 부정적 시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억울한 누명 속에 가두어 두었을까. 장준하 선생님의 두개골을 보는 순간 보통사람들의 눈에도 우연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며 분노가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장준하 선생님의 장남 장호권(63) 씨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유골)은 어땟을까. 그는 "누군가 망치 같은 것으로 부친의 뒷머리를 가격한 것이 너무나도 분명해, 보는 순간 이를 악물 정도로 분노가 솟구쳤다"고 전하고 있다. 이게 인지상정이다. 법의학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마음 말이다.
글쓴이 또래의 사람들은 장준하 선생님이 운명할 당시 사정을 너무도 잘 알 텐데. 학창시절이었다. 그 땐 박정희가 유신헌법으로 독재체재를 강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때이다. 누구 하나 입을 잘 못 열면 안기부 등으로 끌려가 목숨만 겨우 부지할 정도로 초죽음이 될 정도로 서슬이 퍼랬다. 그런 시절에 '사상계' 등을 통해 드러내 놓고 반독재 투쟁에 나섰던 장준하 선생님을 가만히 놔 둔다는 것 자체가 그들 스스로 용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도우심으로 장준하 선생님의 유골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운명 당시 선생님께서는 말 한마디 소리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했을 텐데, 37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날 선생님의 유골이 우리에게 큰소리로 말씀하시는 것 같다.
박근혜의 애비 박정희의 유신 독재는 그로 부터 4년 후에 총성으로 막을 내렸다. 젊은 여자를 품에 안고 술을 마시던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총살된 것이다. 장준하 선생님은 운명하기 직전 거사를 준비중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거사는 선생님께서 운명하시기 사흘 전이었는 데, 사건 전후를 미루어 보면 김재규 등을 통한 (박정희)사살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비록 그 시기가 4년 정도 늦추어지긴 했지만, 이 땅의 민주 혁명은 결국 장준하 선생님으로 부터 김재규로 이어지는 거사 시나리오에 의한 게 아닐까. 따라서 장준하 선생님은 당시 어느 조사실에서 그 사실을 비밀에 부치며 취조 중에 운명하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 54세 되던 때 마지막으로 "나는 혁명은 결행하였으나 혁명과업은 다른사람의 손에 의하여 수행될것이며,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요"라고 말했다. 유신의 심장을 제거한 후 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반쪽 짜리 민주주의만 맛 보고 살고 있다. 이 땅에는 여전히 유신 독재의 딸이 활개치고 있고 정체불명의 대통령이 독도를 저울질 하고 있는가 하면, 사실을 왜곡.호도하는 언론들이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미화하거나 합리화 시키고 있다.
잠시 시간만 돌려봐도 우리 주변에는 사실을 왜곡 하거나 은폐하는 등의 수법으로 사라지는 의문사가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천안함 사건의 진실 또한 의문 속에 수장돼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눈감아 주고있는 미제 사건이자, 불편부당한 언론에 의해 가려지고 있는 가장 최근의 의문사이다.똑같은 사실을 두고 서로 다른 관점이 빚어낸 비극이 아닐 수 없다.작은 차이 하나가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준하 선생님이 지하에서 편히 쉬지 못한 이유가 유골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