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함장 최초보고 뒤집은 충격적 증언
-사고 당시 당직근무자 최 함장 최초보고 뒤집어-
천안함의 진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저만치 사라지는 것일까.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오른쪽으로 90도로 넘어졌고 몸이 50~60cm 정도 공중으로 떳다.
폭발음과 함께 모든 통신이 중단되고 전기가 나갔다"
천안함의 진실을 알고 싶으세요?
"나도 함장실에서 약 5분 동안 갇혀 있었고, 일부 장교들이 망치로 문을 부숴 나올 수 있었다.
밖에 나와 보니 배는 이미 반토막이 나 뒤쪽 부분은 1초만에 가라 앉아 보이지 않았다."
<천안함 우현 견시 근무자 위치 대략>
공창규 하사의 법정 증언 대략
송곳 질문에 드러난 천안함의 사고 직후 상태
"사고 직후 (이강희 하사가) 구조 인도 후 함교를 거쳐 좌현으로 가셨다고 했는데 힘들던가요?"
"봉을 잡고 갔다."
"배가 기울어진(각도) 문제는 중요합니다. 90도로 기울어졌는 지...?"
" ...어느정도 기울었는 지 확인해 줄 수 있습니다.
(90도로 기울면 우현이 바다속으로 잠기기 때문에)바다에 빠진 건 아닙니다.
(물이 무릎 까지 찬 상태에서)혼자서 비스듬히 기운 좌현 쪽으로 나갔습니다.
배가 90도로 기운 게 아닙니다."
위 천안함 사건 자료 이미지 출처는 'Flickr 이웃'으로 부터
천안함의 진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저만치 사라지는 것일까.
인터넷을 뒤적이며 천안함의 추억을 되살리다 보니 그 속에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서해 백령도 앞 바다에서 숨진 46위의 부하들을 떠나보내면서 경례를 하고 있었다. 이 사진 한 장만 놓고 보면 천안함 사건은 우리의 기억으로 부터 저만치 멀어져야 했다. 더 들추어 봐도 천안함의 진실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안 드는 장면이라고나 할까.
대통령이 우는 시늉을 해 가면서 국민적 의혹을 부랴부랴 덮어버린 천안함 사건은, 천안함의 용사들을 국립묘지에 안장을 한 것만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너무도 뻔한 사실을 한 순간에 반전 시킨 거짓말들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최원일 함장이 있었다. 그는 천안함이 침몰된 직후 희생자 유가족들(당시 실종자 가족) 앞에서 사고 전말을 보고하던 중, 유가족들의 거센 항의로 도망다니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은 거짓말 때문이었다. 그는 해군2함대사령부 안보교육관에서 실종자 가족을 만나 사고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폭발음과 함께 모든 통신이 중단되고 전기가 나갔다"
천안함의 진실을 알고 싶으세요?
최 함장의 이같은 발언은 천안함이 침몰됐다는 소식이 언론에 전해진 직후 사흘(2010년 3월 28일)만의 일이었다. 최 함장의 발언에 따르면 천안함은 파괴력이 엄청난 폭발에 의해 사고를 당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최 함장의 보고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유가족들의 표정은 굳어지며 의문이 증폭되고 있었다. 최 함장의 발언은 사흘 전 언론 보도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불과 사흘전만 해도 천안함은 배 밑바닥에 구멍이 생겨 침몰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는 데, 그는 이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최 함장이 유족들의 거센 항의로 도망을 다니게 된 결정적인 발언은 이랬다.
밖에 나와 보니 배는 이미 반토막이 나 뒤쪽 부분은 1초만에 가라 앉아 보이지 않았다."
다수 유가족들은 최 함장이 상식에 어긋나는 발언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즉각 항의하기 시작했다. 배가 어떻게 "1초만에 가라앉을 수 있느냐"며 따졌던 것이다. 그러자 최 함장은 다시 발언을 정정했다. 그는 "(천안함이) 1초만에 가라 앉았다기 보다는 그만큼 순식간에 배 뒤쪽이 사라졌다는 뜻이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의 해명은 오히려 유가족들을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한 순간에 함미 쪽에 근무하던 승조원들의 생사가 갈리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유족들의 오열이 이어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 당시 정황은 천안함 사건 2주기가 훨씬 지난 시간에 거짓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사고 당시 천안함의 견시 근무자 공창규 하사가 당시 상황을 법정에서 세세하게 증언해 주었기 때문이다. 최 함장은 사고 직후 일찌감치 이 사건의 진실을 감추기 위한 음모에 빠져든 것일까. 지난 7월 9일 오후 2시 부터 속개된 천안함 사건 11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공창규 하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는데 내용이 방대하여 주요 증언만 재구성 해 봤다. 아래 그림 <천안함 우현 견시 근무자 위치 대략>을 참조하시면서 읽어주기 바란다.
<천안함 우현 견시 근무자 위치 대략>
공창규 하사의 법정 증언 대략
증인으로 나선 공창규 하사는 박연수 대위(작전관)에 이어 두번 째 증인으로 증인석에 앉았다. 공창규의 증언이 시작됐다. 당직 교대시 특별한 지시사항을 들은적 없다. 함수 쪽을 주로 보고 있었는데, 사고 직전 우현 견시 쪽의 난간과 봉을 붙들고 있었다(고 말했다가 정정) 사고 전에는 (난간과 봉을)잡고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천안함은 사고 전 특이상항이 없었다. 사고 당시 쾅 하는 소리를 느꼈다. 그 소리는 한번이었다. 충격이 느껴졌는 데 어떤 충격인지 잘 모르겠다. 사고 순간 함미의 섬광을 보지못했다. 주변이 (환하게)밝아진 걸 못 봤다. 사고 순간에는 주변이 어두웠다. 사고 당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사고 당시 위험에 빠졌다는 걸 확인할 수 없었다. 사고 직후 나가 떨어지지 않은 이유는 봉을 잡고 있어서 외부로 튕겨나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고 직후) 발로 난간 나무를 밟고 있었다. 충격 당시 몸이 떠오르는 걸 못느꼈다. 무릎인대 파열로 봐서 심한 충격이라 생각한다. (우측 무릎 인대 파열은)부딪친 게 아니라 충격 때문이다.
배가 기울어지면서 물이 허벅지 까지 차 올랐다. (살려달라고)소리치고 한 5초(긴장 했는지...) 후에 구조됐는지...잘 모르겠다. 사고 직후 바로 구조(우현쪽으로)됐다.(기우뚱한 상태에서 주조되었는 지 묻는 질문에) 90도 기운 상태가 아니었다. 사고 직후 물기둥 못 봤다. (물벼락 등 물에 맞은 적 있는가라는 질문에) 느끼지 못했다. 물벼락을 맞은 게 아니라 기억이 없다. 옷을 갈아 입은 적 없다. 옷을 갈아 입은 건 옷이 젖어서 갈아입은 게 아니다.사고 직후 화약냄새 못 맡았다. 사고 직후 기름냄새 기억나지 않는다.
사고 직후 특별한 활동 못했다. 사고 직후 (좌현 갑판에)주저앉아 있었다. 해경함에서 참수리호로 다시 성남함으로 이송됐다. 구조 직후 정신이 없어서 대화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함장의 함구령 기억나지 않는다. 사고 이후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하고 수도병원 의무대에서 치료했다. 진술서는 대략 2~3번 썼는데 병원과 국방부에서 실시됐다. 천안함 승조원들은 병원 퇴원 후 2함대로 갔다. 집단교육 내용은 6월 부터 발령에 대한 적응.심리안정 거의 정서적 교육을 받았다. 대부분 2함대 고속정 생활관에서 지냈고 몇몇은 병원에 있었다. 공창규 하사의 증언 취지는 대략 이랬다. 변호인 측의 반대심문이 거의 끝나갈 즈음 피고인(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의 반대심문이 짧게 이어졌다. 신 씨는 공창규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송곳 질문에 드러난 천안함의 사고 직후 상태
"사고 직후 (이강희 하사가) 구조 인도 후 함교를 거쳐 좌현으로 가셨다고 했는데 힘들던가요?"
"봉을 잡고 갔다."
사고 당시 공창규 하사는 좌현 갑판(견시 쪽)에서 (그림에 표시된) 봉을 잡고 수밀문을 통해 이강희 하사의 인도를 받으며 좌현 갑판 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 때 이동시간은 공 하사가 "(잘 모른다며)해 봐야 알 것 같다."고 대답했는데, 신 씨는 이 순간 공하사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했다.
" ...어느정도 기울었는 지 확인해 줄 수 있습니다.
(90도로 기울면 우현이 바다속으로 잠기기 때문에)바다에 빠진 건 아닙니다.
(물이 무릎 까지 찬 상태에서)혼자서 비스듬히 기운 좌현 쪽으로 나갔습니다.
배가 90도로 기운 게 아닙니다."
대략 2시간 40분 정도 소요된 천안함 사건 11차 공판의 증인 반대심문은, 공창규가 확인해 준 사고직후 천안함의 상태를 끝으로 마무리 됐다. 어떤 분들은 몇 마디 안 되는 증언을 놓고 '충격적'이라는 표현을 쓸 만한 정도이겠는가라고 반문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 전 위원이 지적한 바와 같이 천안함이 사고 직후 어떤 상태였는 지 등 초기의 자료들은, 이 사건을 보다 구체적으로 (과학적으로)접근 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천안함 사건은 최 함장의 발언 등에 나타나는 것 처럼, 최초의 (수사)자료들 다수가 은폐되거나 왜곡되어 사고의 원인을 엉뚱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위 천안함 사건 자료 이미지 출처는 'Flickr 이웃'으로 부터
이른바 초동수사(사건이 일어난 바로 뒤에 증거를 모으고 범인을 잡기 위해 행하는 첫 단계의 수사를 말함.)당시, 자료를 조작하거나 은폐 등의 방법으로 증거를 훼손하고 있었던 정황이, 사고 직후 사흘 만에 최 함장의 발언에 묻어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최 함장의 발언 이후 천안함 사건의 침몰원인은 하루가 다르게 왜곡되거나 은폐되는 등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천안함 사건은 북한의 잠수정이 발사한 <1번 어뢰>에 폭침 당하는 놀랍고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국방부와 합동조사단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제 1번어뢰>는 수중에서 버블을 일으키며 천안함의 좌현에 폭발 충격을 가한 것으로 기록 됐다. 이때 수중 폭발된(?) 어뢰의 위치나 폭발력 등은 천안함이 어떤 모습으로 기울어졌는 지 등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것이므로, 천안함의 진실을 가리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는 것이다. 천안함 사건 재판의 중심에 있는 선박 전문가 신 씨가 이런 중요한 순간을 놓칠 수 있겠나.
아마도 최원일 함장은 공창규 하사가 자신의 공개적 보고를 뒤집게 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공창규 하사의 증언 한마디로 인해 측근과 친형 이상득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퇴임 말기의 이명박 대통령 등이 습관 처럼 내뱉던 <폭침>이란 근거는, 점점 더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됐다. 이런 걸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말해야 할까. 최 함장을 비롯한 생존자들이 희생자 장례식에서 46위의 천안함 용사들을 배웅한 지 모르겠지만, 그 영령들은 여전히 천안함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천안함의 진실이 우리 앞에 다시금 한 발짝 다가서며 부활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천안함 사건 방청기는 계속 이어진다.
내가 꿈꾸는 그곳의 Phot 이야기
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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