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잠수함 향기 가득한 제3의 부표 -특수임무를 띠고 '위증의 덫'에 걸려든 특수전 잠수요원-
천하의 무적 '李 충무공의 후예'들이 이적행위를 통해
살아남고자 하는 모습은 곧 죽음을 자초한 게 아닌가.
천안함 침몰사건 2차 재판 방청 후기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맨 먼저 위의 사진 한장을 주목해 주시기 바란다. 위 사진은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으로 부터 지난해 3월 26일 오후 9시 00분경 백령도 연화리 앞 바다에서, 좌초 이후 잠수함과 충돌하여 침몰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사고 현장에서 천안함의 함미가 인양되고 있는 모습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을 온통 패닉에 빠뜨린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다 아는 사실이다. 위 사진에서 주목할 부분은 침몰 이후 일그러진 처절한 함미 모습이 아니라, 함미가 해상 크레인에 의해 인양된 시점이다.
[자료사진] 천안함 함미 인양을 위해 백령도 앞 바다로 이동하고 있는 해상 크레인. 뒤로는 백령도를 배경으로 광양함과 살보함이 보인다.
천안함의 함미가 인양된 시점은 침몰사고 이후 17일이 경과한 4월 13일이었다. 당시 군 당국과 정부는 언론을 통한 발표를 통해 46명의 승조원이 함미에 갇혀 바다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격실을 밀폐해 놓으면 최소한 '69시간'은 생존할 수 있다고 했다. 승조원 가족들에나 국민들에게는 실낱같은 희망 이상의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함미를 한시라도 빨리 인양하게 되면 바다속에 갇힌 승조원을 구조해 낼 수 있는 것이므로, 시시각각 사고현장에서 전해지고 있는 수색작전에 이목이 집중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함미가 인양된 시점은 침몰사고 이후 17일이나 경과했으니 설령 생존해 있었다고 해도 모두 아사했을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군 당국이나 정부는 천안함이 침몰한 직후 승조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그동안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을까.
군 당국과 정부는 승조원 가족들이나 국민들을 철저히 속이고 있었다는 게, 천안함 침몰사건 1차 재판에서 밝혀지고 있었다. 관련 포스트<천안함, 구조활동 '증언'에 분노한 이유>를 통해 전해드린바 글쓴이는 군 당국과 정부의 조치에 대해 매우 분노하고 있었다. 이유가 뭔가. 천안함 침몰 당시 구조활동과 관련하여 증인으로 출두한 해군본부 군수참모부 수송과장박규창 때문이었다. 박규창의 보직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자동차 관련 업무를 맡고 있던 사람으로 '애니콜 서비스' 같은 일을 주로 해 왔던 사람인 데, 해군은 예산편성을 이유로 인양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차량업무)수송과장에게 크레인 수배 업무를 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해군에는 엄연히 함정정비처 같은 부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박규창 등을 통해 해상 크레인 수배 업무를 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메뉴얼이 전무한 해군본부 군수참모부 수송과에서는, 인터넷 검색을 두둘겨대며 크레인을 수배하는 차마 웃지못할 해프닝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었다. 박규창 등은 크레인의 인양목적 조차 모른 채 크레인을 수배하던 중 위 자료사진의 삼아 크레인(주) 등 크레인을 백령도 앞 바다로 유유자적하며 보내고 있는 모습이다.
승조원들이 함미에 갇혀 생존가능한 시각 69시간을 시시각각 허비하고 있는 동안 박규창은 3월 27일 오후 15시경 부터 크레인 수배 관련 업무에 관여하며 동료 이현덕 소령에게 업체와 계약체결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3월 28일 16시경 '삼아개발(주)'이라는 업체가 크레인 임대계약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고 마침내 백령도 현장으로 크레인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다. 그 때가 크레인을 계약한 후 3월 29일 12시 45분경이었다. 이거 분노하지 않겠나.
천안함이 침몰한 지 나흘이나 지난 시점에 백령도 현지에 도착한 게 아니라, 백령도 앞 바다로 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령 승조원들이 생존해 있었다 해도 숨질 수 밖에 없는 시간이며 늑장을 부리고 있었으니 분통이 터졌던 것이다. 정말 나쁜놈들이었다. 아무튼 해상크레인이 이동한 '날짜와 시간'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란다. 본 포스팅의 결론을 장식할 숫자들이다.
이미 관련 포스트<천안함, 폭침 백서 '열공'한 잠수요원의 변명>를 통해 예고해 드린바와 같이, 지난 19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서관 524호 법정에서 속개된 천안함 침몰사건 2차 재판에서는, 미군(이스라엘) 잠수함의 향기가 폴폴 날리는 <제3의 부표>에 얽힌 '수상한 증언'이 해군 특수전 잠수요원으로 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천안함 실종자 수색과 함체 인양작업 등을 위한 특수임무를 맡은 잠수요원 최영순 소령이었다. 그는 변호인 측이 "함수의 절단면 사진을 보고 느낀점은 어떠했나"라는 신문에 "천안함이 '어뢰에 의한 피격'이라 느꼈다"라고 말한바 있다. 참 오지랖 넖은 해군장교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가 증언한 내용을 살펴보면 1차 재판에서 박규창이 증언한 내용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군 당국과 정부의 발표에 따라 생존시간으로 알려진 69시간을, 촌각을 다투며 애타게 구조를 기다릴 천안함 승조원들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국방부장관 등과 함께 벙커회의를 할 당시 천안함 함미에는 애시당초 생존자가 없었다는 것일까. 박규창이 해상 크레인을 수배할 당시 전혀 바쁘지 않았던 것과 같이, 최 소령 또한 천안함 함미 속에 갇혀있을 승조원들에 대해서는 애시당초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최 소령 등은 천안함 실종자 수색과 함체 인양작업(구체적인 임무는 실종자 수색과 '함수' 탐색)을 위해 어떤 특수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나.
[그림]침몰 천안함 함미.함수와 제3의 부표 위치 대강
위 '침몰 천안함 함미.함수와 제3의 부표 위치 대강'이라는 [그림]은, 천안함이 잠수함과 충돌하여 세 동강난 이후 함미는 침몰원점에서 가라앉고 함수와 잠수함이 조류에 떠밀려 약 5km 표류한 위치를 추정하여 표시해 둔 모습이다. 함수 위치와 '제3의 부표' 위치는 명확하지 않으나 아래 [자료사진2]의 사진을 참조하면, 용트림 바위나 故한주호 준위의 추모제를 지낸 전망대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사진2] 제 3의 부표가 설치되었던 위치로 추정되는 용트림 바위 앞 바다. 뒤로 장촌 포구가 보인다.
그림과 자료사진을 참조하며 최 소령 등이 특수임무를 띄고 백령도 사고 현장에 도착하여 작전을 수행중인 모습을 증언을 통해 확인해 보자. 해상 크레인이 이동한 날짜와 시간과 최 소령이 증언한 날짜를 잘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최 소령이 특수임무를 띄고 자신이 몸 담았았던 특수전 여단(김판규 준장)을 떠나 2함대로 출발한 때는 지난해 3월 27일 오전 10시경이었다. 오전 7시에 모처를 출발한 이후 약 3시간 만에 2함대에 도착한 30여명의 대원들은, 다시 백령도 사고현장으로 항공기(헬기)를 타고 이동했다. 그때가 3월 27일 오후였다. 최 소령 등이 특수임무를 펼칠 현장에 도착한 이후 맨 먼저(3월 27일 오후) 천안함 함미 선체 탐색작전에 들어갔으나 기상상태 불량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최 소령 등은 3월 28일 천안함 함수 쪽 구조활동에 투입되었다고 증언했다.
최 소령은 본래의 특수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판부의 신문에 따라 증언한 그들의 구체적인 임무는 실종자 수색과 함수 탐색이 주된 임무였으므로, 당연히 함수가 최종 침몰한 위치에서 탐색 활동해야 옳은 것이다. 이때 중요한 임무 하나가 더 포함돼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최 소령이 맡은 특수임무에 실종자 수색이 포함된 것이다. 그런데 최 소령은 특수임무에 투입될 당시 중요한 임무를 망각한 채 '지 마음대로' 작전을 수행했다고 했다.
백령도 용트림 바위와 UDT 동지회 전우들이 故한주호 준위 추모제를 지낸 전망대 부근 모습(지난해 가을)
최 소령은 해군작전사령부 작전처장 등 해작사의 지휘체계 밖에서 할동한 사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해작사에서는 실시간으로 사고현장의 모든 정보를 취합하는 등, 천안함의 위치 좌표를 첵크하고 특수임무를 띈 특임대에 좌표를 전달했다고 했으나, 최 소령은 해작사의 함수 위치 좌표를 받은 바 없다고 증언했다. 딱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단박에 들었다. 해작사 작전처장이 위증을 하고 있거나, 특수임무를 띄고 다이빙에 열중한 최 소령이 위증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최 소령은 특수임무의 옵션(?)에 따라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천안함 함수 쪽에는 함미 쪽과 달리 실종자 내지 사망자가 거의 없을 것으로 추정된 곳이다. 생존자 다수는 함수 쪽에 근무하던 승조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 소령은 왜 함미가 침몰한 위치와 약 5km나 떨어진 전혀 다른 곳에서 실종자 수색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을까. 2차 재판에서 최 소령을 증인으로 채택한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최 소령이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장소는 지난해 4월 7일 KBS 보도에 따라 故 한주호 준위가 숨진 지점으로 알려진 용트림 바위 앞 '제3의 부표'에 관한 UDT 동지회의 증언 때문이었다. 그곳은 '제3의 부표'가 설치된 곳이자, 최 소령이 실종자 수색 임무라는 특수임무를 띄고 작전을 수행하던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위 '침몰 천안함 함미.함수와 제3의 부표 위치 대강' [그림]을 참조하면 최 소령은 이른바 '뻘짓'을 하며 다이빙 놀이(?)에 열중한 것이나 다름없다. 함미는 연화리 앞 바다에 있는 데, 장촌포구 앞 용트림 바위 앞 바다에서 '실종자 수색'을 하고 있었다니. 최 소령은 안간힘을 다해 변호인측의 반대신문을 빠져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그가 속해있는 특수전 여단의 특수임무와 그의 행적을 참조하면, 그가 숨겨야 하는 건 이스라엘 잠수함의 추억 내지 향기가 아니었나 싶다. 해작사 작전처장이 살아남기 위해(?) 증언한 실시간 작전지휘는 최 소령의 특수임무 때문에 거짓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해작사에서 확보한 함수 위치 좌표는 최 소령 등 특임대에는 전혀 소용이 없었고, 무려 16시간이나 장촌 앞 바다에 떠 있있던 천안함 함수 따위는 관심 조차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천안함 침몰 당시 구조활동과 관련하여 1차 재판 증인으로 출두한 해군본부 군수참모부 수송과장박규창의 증언에 등장한 날짜와 시간과 2차 재판의 '제3의 부표' 등과 관련하여 증인으로 출두한 최 소령의 행적을 대입해 보면, 군 당국이나 정부는 처음 부터 함미에 갇혀있는 승조원 구조나 인양계획은 전무했다는 게 드러나고 있다. 참 무서운 인간들이자 천인공노할 모습아닌가. 그들은 천안함이 침몰할 당시 해경 501경비함이 구조활동을 끝낸 직후 함수와 함께 조류에 떠밀려 이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잠수함에 대한 실종자 수색과 탐색임무가 주된 임무였을까.
최 소령은 제3의 부표가 떠 있던 장소에서 핸드소나로 제3의 물체를 찾아나섰다고 증언했는 데, 그에 앞서 백령도에 도착한 직후 함수 위치는 해병수색대로 부터 전해들었다고 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함수 위치를 전해 듣거나 말거나 그는 제3의 부표가 있던 위치에서 잠수함으로 추정되는 '제3의 물체'를 찾아나선 게 아닌가. 최 소령은 UDT 동지회의 증언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 바 있고, 최 소령의 주장사실이 해군의 공식발표 내용이 된 점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천안함 함수가 발견된 위치에서 행해야 할 임무 하나 내지 전부가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최 소령은 변호인측의 반대신문 때 이스라엘 잠수함을 쏙 빼 닮은 증언으로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변호인측은 이렇게 질문했다. "당시 구조작업에 투입된 UDT동지회 회원인 이헌규, 김진오씨는 "함수에 접근하자 국기게양대와 같은 기다란 봉이 만져졌고, 2미터 가량 더 들어가니 해치문이 열려 해치문 안으로 들어가니 소방호스가 보였다."고 KBS보도에서 진술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해 조사한 바가 있나요."라고 말하자 최 소령은 "뉴스를 봤다"라고 답했다. 이어서 "천안함 함수가 인양된 이후 함수에 이헌규, 김진오씨가 보았다는 국기게양대와 같은 기다란 봉과 해치문, 소방호스가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는가요. 함수에 기다란 봉과 해치문, 소방호스가 존재하던가요."라고 묻자 최 소령은 "함수가 오른쪽으로 누워있었는 데 해치가 아니라 도어가 있다. 국기봉이 아니라 가드레일이다. 소방호스가 널려있었던 건 사실이다."고 말했다.
최 소령의 증언에 따라 변호인 측이 즉각 확인에 들어갔다. "(천안함 함수 사진을 보여주며) 천안함 함수의 사진을 보면 천안함 함수에는 가드레일과 앵커(닻)만 있지 국기게양대와 같은 기다란 봉이나 해치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라고 말하자 방청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방청객들은 변호인측이 제시한 이스라엘 잠수함 사진과 천안함 함수를 번갈아 비교해 보고 있었다. 변호인 측이 제시한 천안함 함수 우현에는 도어나 해치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자 최 소령은 "함수 좌현 쪽에 있다"고 말하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함수 좌현 쪽에도 해치나 도어가 있을 리 만무한 데, 최 소령은 거짓말(위증)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됐다. 그러자 변호인측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렇다면 이헌규, 김진오씨는 누워있는 함수로 접근하기 위해 수평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인가요."라며 최 소령에게 강력한 어퍼컷 한 방을 날리며 암바기술(?)로 최 소령을 기절초풍하게 만들고 있었다.
최 소령의 증언대로라면 최 소령은 해치나 도어를 발견하기 위해, 함수에서 부터 장님 코끼리 더듬듯 수십미터를 이동하여 함교 근처에 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KBS 인터뷰 당시 이헌규.김진오 씨는 "수면에서 내려가자 국기게양대와 같은 봉이 만져지고, 2미터 더 들어가니 해치가 있었다"는 취지로 진술해, 당시의 잠수작업은 수면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작업을 했던 것이어서, 최 소령은 이들의 증언으로 인해 위증여부의 운명 앞에 놓인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헌규.김진오 씨의 진술에 따르면 그 모습이 이스라엘 잠수함의 코닝타워(Conning Tower)로 부터 아래로 이동한 모습과 흡사했다. 최 소령이나 군 당국 내지 이명박 정권은 이런 불상사가 오는 걸 피해보기 위해 예비역 UDT 요원 17명의 진술 모두를 '착각'이라고 일축하며 예비역 UDT 요원 17명 모두를 좀비로 만들고 있었던 것일까.
[자료사진] 코닝타워와 해치가 잘 드러난 잠수함 사진. 코닝타워에 국기가 걸려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제독 '李 충무공'은 백의종군하던 중 1597년 7월 18일 새벽 조선의 수군이 왜군과 싸워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후 7월 23일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임명돼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할 때,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망가면서 끌고 와 숨겨놓은 전선 12척과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이끌고 온 전선 1척을 합쳐 겨우 13척으로 9월 16일 133척의 왜군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결전을 치렀다. 충무공은 결전을 치르기 하루 전 9월 15일, 장수들을 불러 모은 후 이렇게 말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일부당경 족구천부(必死卽生 必生卽死, 一夫當逕 足懼千夫 :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을 것이다. 또 한 명의 군사로도 길목을 지킨다면 천 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 있다)"
...라며 필승의 전투의지를 다졌다. 이 충무공의 지휘 아래 죽음을 무릅쓴 조선의 수군들은 전쟁의 향방을 가늠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해상 주도권을 되찾아 옴과 동시에 조국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임진왜란의 3대 해전 중 하나인 '명량해전'이었다. 귀가 따갑도록 들러온 명언일 것이며, 바다를 지키는 이 충무공의 후예들은 바이블 처럼 여길 생명과 같은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천안함 침몰사건의 2차 재판이 열리고 있는 법정에서 만나 본, 오늘날 우리 해군의 지휘관은 결코 이 충무공의 후예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필생즉사'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시방 이런 나라 이런 군대 이런 지휘관에게 나라의 국방을 맡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가. 정신줄 놓고 다니는 대통령 하나만으로 벅찬 데 도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