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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전망대 무용지물 된 나각산의 황당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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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무용지물 된 나각산의 황당한 풍경


자연은 무엇인가. 지난 11월 21일 나는 상주 곶감 팸투어에 나선 일행들과 함께 경북 상주의 나각산 정상에 서 있었다. 나각산의 높이는 240m 정도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이지만 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낙동강생태탐방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중턱에 이르자 꽤 가파른 계단이 설치된 나각산의 정상은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변은 낙동강 700리의 비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천혜의 명소였다. 나각산 정상 바로 아래에서 바라보니 지근거리에 출렁다리가 두 절벽위로 걸쳐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반만년 동안 대를 이어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굽이굽이 돌아가는 낙동강 상류의 비경을 끼고 살아왔던 마을이 강과 함께 조망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참 아름다워야 할 명소가 황당한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나각산 정상에서 걸음을 옮겨 출렁다리에 다다르자 전망대로 이어지는 출렁다리 입구는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다.


와이어로프 등으로 단단히 시설된 출렁다리 위에 올라서자 그야말로 출렁출렁 다리가 요동을 쳤다. 발 아래를 살피니 낭떠러지다


그런데 출렁다리에 들어서자 마자 난간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낙동강이 저수지로 변한 모습이다.


출렁다리 건너에서는 먼저 건너간 일행들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금방 되돌아 오고 있었다. 


마침내 나각산 전망대 위에 다다르자 일행들이 왜 실망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 전망대에서 바라볼 수 있는 비경은 이미 사라졌고 그 자리는 온통 파헤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각산 전망대가 무용지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나각산을 휘감고 돌던 낙동강 상류는 준설공사가 한창이었고 카메라를 당겨보니 그곳에는 가물막이가 시설된 채 낙동강이 그 비좁은 임시가교 사이를 통과하는 장면이 금방 목격됐다. 아래 그림이 그 장면이다. 이 장면은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4대강 사업> 낙단보 건설 현장이다. 따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4대강 사업의 폐해 등에서는 말하고 싶지않다. 다만, 여행객이 발품을 팔아 기껏 오른 나각산 전망대 풍경이 이렇듯 황량하다면 누구인가 이런 사실을 단 한사람에게 만이라도 알려야 할 의무가 있지않을까. 이 포스트는 그렇게 끄적여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무엇인가. 자연은 그 스스로 생명체이다. 자연도 우리 인간들 처럼 스스로 태어나고 성장하며 소멸을 반복하고 있는 구조를 통해 생명체임을 보여주고 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다만, 우리 인간과 자연이 다른 점이 있다면 고통을 표현하는 방법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인간들이 삶을 통해 희노애락을 표시하는 동안 자연은 바람소리 물소리와 더불어 시시각각 옷을 갈아입는 계절을 만드는 등 우리 인간과 차별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자연이 우리 인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고통의 소리를 내지 못하는 점이 아닐까.





 
우리 몸의 살점이 뜯겨져 나간다면 인간이 지를 수 있는 최고음의 소리를 지르며 고통을 덜거나 이겨 내고자 할 것이나 자연은 속살 대부분이 뜯겨져 나가도 아무런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얼마나 그 고통이 컷으면 숨죽여 흐느낄 뿐이었을까.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그랬다. 우리 민족과 반만년 이상을 함께 동고동락해 온 낙동강 700리 비경은 그렇게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인간들의 무지몽매가 만들어낸 비극의 현장이라고나 할까. 낙동강은 임시로 만든 물막이 한편 작은 다리 아래로 숨죽여 흐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심정은 낙동강의 자연이나 그 자연 속에 살고있는 나의 심정이 뭐가 다르겠나.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는 물질과 영혼, 자연과 인간사이의 벽을 쌓아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기본인 이윤추구를 최대 덕목으로 여기는 현재의 시점에 까지 그의 이론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데카르트로 인하여 과학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며 환경파괴 현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과학과 기술이 인류의 편리함에 기여한 반면 과학은 자연을 파괴하는 결과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결과에 대해서 사람들의 관점은 달랐다.


인류학자 'Kuruk Lhohn'에 따르면 서양의 자연과학 철학은 자연(phisic)과 인위(nomos)를 대립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여 인간이 자연에 군림하는 자연관을 보여준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그건 인간과 자연과의 공존에 무게를 둔 동양철학에서 보여준 자연관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 것이다. 19세기 중엽 헤겔이 창안한 생태학(ecology)에는 모든 것이 다른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했다. 그가 말한 것은 '균형잡힌 자연'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자연의 순환 즉 자연의 생몰현상이 과학과 기술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환경이 깨뜨려짐을 말하고 있는데 그 결과는 우리 인간의 라이프사이클을 다시 깨뜨리는 악순환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 하겠다. 


출렁다리 위에서 내려다 본 강바닥 준설 현장에는 굴삭기와 덤프트럭이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포스트를 끄적이고 있는 이 시간에도 저 중장비들은 과학의 이름을 뒤집어 쓴 채 여전히 낙동강 바닥의 모래와 자갈을 퍼 올릴 것이며, 반만년 이상 우리와 함께 해 온 낙동강 비경 700리의 모습이 본 모습을 보여주려면 다시금 반만년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한번 훼손된 우리 몸이 원상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것 처럼 자연 또한 스스로 치유과정을 통해 낙동강 비경을 만들기 까지 걸리는 세월은, 우리 인간들이 상상하는 시간 이상으로 도무지 손 조차 쓸 수 없는 큰 일이다. 그러한 일들이 몇 안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국민들을 기망하며 수십조원의 국부를 유출시키고 환경조차 훼손하는 일이 백주에 버젓이 저질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나나 여러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정치 또는 정치인들이스스로 소멸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가 그걸 증명해 주고 있다. 혹자들은 나의 신변 까지도 걱정해 주는 분들이 많다. 정적들이 해꼬지를 할까봐 그렇단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매우 간단하고 순수했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 인간의 존엄성을 함부로 다루는 위정자들과 특정인과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는 사람들을 고발하고 또 저항하며, 헤겔이 말한 생태학과 우리 선조님들이 가르쳐 준 '자연과 일체감'을 느끼는 동시에, 소중한 자연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작은 노력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정치에 무관심 하면 할수록 어느날 무용지물이 된 나각산 전망대 처럼 금수강산 전부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힘들지 모르며 자연을 찾아 쉼을 얻고자 하는 여행객들은 발길이 닿는 곳 마다 황당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낙동강 상류 비경은 이렇듯 황폐하게 변했다. 누구를 위한 공사며 사업인가.


최소한 여행의 자유로움이나 자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듯 황당한 장면을 애써 외면하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 그게 나나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며 우리 민족과 국토를 훼손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일 아닌가.


우리 선조님들이 이름 지었던 금수강산은 대대손손 누려야 할 지구촌 최고의 가치며 덕목이다. 그게 자연이며 우리가 살아가야 할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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