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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대한민국 최초 '전기電氣발상지'는 언제 어디서?


대한민국 최초
'전기電氣발상지'
 
언제 어디서?


경복궁 향원정으로 가는 길은 매우 포근했습니다.

이 글의 제목이 말하는 것 처럼 電氣가 바닥에 흐르는 것도 아닌데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는 향원정은
역사의 수레바퀴 뒤에서 조용한 모습으로 저를 반겼습니다.

마치 이빨을 드러내지 않고 미소를 짓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향원정으로 가는 길에는 또 철 모르는 개나리가 만개를 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복궁 향원정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경복궁 속에 있는 향원정香遠亭은 기록에 의하면  
"고종 4년(1867) ~고종 10년(1873) 사이에 경회루 서북쪽 향원지의 중심에 섬을 만들고 여기에 세웠다.
 이 정자는 2층의 육각 누각으로 지어졌다. 나무로 2층다리를 걸고 취향교라 하였다.
함화당의 북쪽에 장안당이 있었다.
이 집의 북행각은 북쪽 궁성에 가까워서 북행각의 문을 나서면 궁성의 암문(暗門)인 계무문(癸武門)에 이르렀었다.
 이 장안당 동편에 곤령각(坤寧閣)이 있고 그 북쪽에 복수당(福綏堂)이 있었는데,
이 집 남행각의 문밖 즉 건청궁의 남쪽에 연못이 있다.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경영할 때 그 남쪽에 못을 파고 그 안에 섬을 만들어 이층의 육모정인 향원정을 짓고,
나무로 구름다리를 걸어 취향교(醉香橋조. 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길이 32미터, 폭 165센티미터)라 하였다.
 향원정은 보통 이층이라 하지만 누마루 밑의 구조까지 치면 삼층이 된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옛날엔 이 다리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쪽에서 건널 수 있게 되었었다.

 경복궁의 후원에 속하는 향원지는 세조 2년(1456)에 조성되어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사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세조실록」에 보인다.
못의 넓이는 4,605평방미터이며, 모를 둥글게 죽인 방형의 연지에는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연못가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배나무, 산사나무, 서어나무, 버드나무, 느릅나무, 말채나무가 숲을 이루고,
 향원정이 있는 섬에는 철쭉, 단풍 등 관목류가 심어졌다.
이 연못 남쪽의 함화당 후원에는 '하지(荷池)'라 새긴 석지와 석상(石床)이 배치되어 있다.
이 연못의 수원은 북쪽 언덕 밑에서 솟아나는 지하수와 '열상진원'이란 샘물이다.
연지 속에 북악의 산영이 잠겨들고 오색 아롱진 단청의 정자와 취향교가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향원정 가는 길목에 철모르는 개나리가 만개 했습니다.




향원정과 가까이 접한 건청궁乾淸宮은 최근 특별 관람을 할 수있는데 제가 이곳을 방문 했을때는
인터넷 접수를 하지 않아서 둘러 볼 기회가 없었고 극히 제한 적인(180명/1일) 인원만 관람할 수 있는 곳인데
자주 가 볼 기회가 없지만 경복궁에 들르 때 마다 생각나는 것은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입니다. 치욕의 현장이죠.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불리우는 이 사건은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 당한 비극의 현장이며
명성황후가 시해당한지 100년만에 복원된 현장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복원된 건청궁은 대지 약 1000평에, 고종의 침전이었던 장안당長安堂,
명성황후의 침전이었던 곤녕합坤寧閤 등 14개 건물(연건평 296평)이 포함돼 있습니다.


건청궁은 1873년 고종이 조성한 궁궐 속의 작은 궁궐이었고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간섭을 피하는 동시에 정치적 독립을 꾀하기 위해
고종은 일부러 경복궁의 북쪽 깊숙한 곳에 독립 건물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을미사변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서울 중구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고(아관파천·俄館播遷),
 건청궁은 그 뒤 방치되다가 1909년경 철거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그곳 건청궁 담장 옆의 문을 나서면
일본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 명성황후의 시신이 태웠졌던 장소가 나옵니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그 장소에서 태워진 후 향원정이 있는 향원지에 뿌려졌다고 전해지는데
저는 이런 일을 상기할 때 마다 우리의 국력이 커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중의 한사람이며
우리 선조와 우리들에게 '치욕의 역사'를 안겨 준 일본에 대해서 아직도 분을 풀지 못하는 후손중의 한사람입니다.

어찌 후손된 사람이 이런일을 잊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림의 이곳이 향원정이 있는 향원지이며 명성황후의 시신이 태워진 후 시신의 재를 뿌렸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명성황후의 한이 서린 곳이자 우리민족의 한이 서린 곳이며 치욕의 현장이기도 하지요.
참으로 착찹한 심경으로 천천히 이 향원지를 돌아보았습니다.



향원지 뒤로 보이는 작은 산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청와대 뒷산입니다.
이곳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대통령후보들은 5년동안 저곳에 머물면서
국민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겠다는 말을 서슴치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국민들이 존경받고 사랑받는 시간은 12월 19일 이전 한달간 입니다.
그 기간동안 국민들은 처음으로 존경받고 또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이후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아시잖습니까? ^^


건청궁으로는 갈 수 없어서 향원정을 한바퀴 돌아보는 중 작은 기념비 하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내용은 한번즘 들어는 봤을 법 한데 이곳이 치욕의 현장이라는 역사 외에도
의미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이 향원지입니다. 우편으로 향원정이...맞은편이 대한민국 최초 전기발상지 입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이나 현대문명을 극대화 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인 전기電氣-electricity-가
국내에 최초로 들어 왔던 곳이기도 했던 곳입니다.
이곳 '한국의 전기 발상지'는 고종황제의 어명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전소를 설립한 곳으로
 "1887년3월6일 건청궁 전등에 점화를 시초로 경복궁에 750개의 전등을 가설하고 점등함으로써
이땅에 문명의 빛을 밝힌 유서깊은 곳"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곳은
치욕의 역사가 서린 건청궁에 또한 제일 먼저 불을 밝힘으로써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려고 했던 흔적이 역력히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일본에 의해서 36년동안 강점을 당하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치욕'이라는 구속을 당하는 민족이나 국가는
늘 치욕스러웠던 과거를 잊고 살 때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했습니다.
향원정의 향원지는 바람한 점 없는 초겨울의 햇살에 개나리도 피울 만큼 따사로왔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국내의 정치상황은 한치 앞을 바라보지 못할 만큼 혼돈 가운데 있습니다.





청와대쪽을 바라보고 있는 12지신상 중 '쥐띠'를 상징하는 쥐신석상 



이 암울한 시대와 암울한 마음을 가진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
진정 밝은 빛을 가져다 줄 전기全期를 이곳 향원정 향원지에 있는 '한국의 전기 발상지' 돌아보며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건청궁은 한시적으로 개방되어 있으므로 아래의 그림을 참조 하셔서 고궁나들이를 즐겨 보시길 바랍니다. ^^

아울러 쥐띠해인 2008년에 대한민국의 통수권자는 누가 될 것인지?...

 경복궁내에 있는 12지신상의 狀과 대통령후보의 상을 비교해 보시는 것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스트 블로거기자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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