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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갤러리/도시락-都市樂

여수갯가길,숨겨진 비경 하나


Daum 블로거뉴스
 

도시인의 길라잡이 무인등대
-여수갯가길,숨겨진 비경 하나-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숙제처럼 남아있는 추억들... 



하얀 무인등대가 서 있는 이곳은 여수 갯가길의 한 장면이다. 세 사람 중 손으로 바다를 가리키는 한 사람은 [사단법인 여수갯가] 김경호 이사장(제주대학 언론홍보학과 교수)과 임현철 이사(왼편)와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의 모습이다. 필자까지 포함하면 네 사람이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갯가길 제1코스 5구간(용월사-범바위)을 둘러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수 갯가길을 다녀온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고 해가 바뀌었다. 그런데 여전히 당시의 추억들이 엊그제 일처럼 새록새록 하다. 특히 여수 갯가길을 개척한 주역들인 김경호 이사장, 임현철 이사(파워블로거,http://blog.daum.net/limhyunc/), 이회형 이사(한양기계설비 대표), 김홍구 기술고문(제주 오름 전문가)의 표정은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분들의 진심어린 표정이 아니었다면, 갯가길 체험은 그냥 한 번 스쳐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 끝났을 지도 모르겠다.  





이분들은 주로 여수 토박이로 눈만 뜨면 봐 왔을 자기 고향을 사랑하는 모습이 남달랐던 것이다. 자기 고향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갯가길의 풀 한 포기 바위 한 덩어리까지 애지중지 했다. 필자가 알고 있는 국내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J 화백은 당신의 작품 '판타지아'를 통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어릴 때 늘 봐 왔던 내 고향 몽탄 골짜기를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 그게 나중에 판타지아로 남게 된 배경인 거 같다."




그는 교사 생활을 접고 화가의 길로 들어서면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아내의 후원(내조)에 힘 입어 그림만 그릴 수 있게 된 것인 데, 그의 작품 속에는 여지없이 '장날의 풍경'이나 '산티아고 순례길(El camino de Santiago)' 등 그가 평소에 가까이 했던 모습들이었다. 작품 구상을 위해 해외를 다녀도 여전히 그의 속마음을 채우고 있는 건, 어릴 때 봤던 티 없이 맑은 고향의 산골짜기였던 것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먼 옛날의 행복했던 때를 추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잘 아는 '제주 올레 길'의 서명숙 씨(오마이뉴스 전 편집국장)는 올레길을 디자인 하기 전 지칠대로 지친 자기 몸부터 다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한 일은 주로 걷기였다. 처음에는 15분도 채 걷지 못하던 그녀가 본격적인 걷기에 빠진 것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800km)을 걸으면서부터였다. 





서 씨는 쉰살이 되던 해인 2006년7월 국내를 떠나 프랑스 생장 피드포드라는 마을에서 9월10일 출발, 10월15일 스페인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santiago de compostela)' 종점까지 36일 동안 800km 대장정을 마쳤던 것이다. 그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통해 인생의 참 맛을 깨달았다고 한다. 병들어 가는 육신을 되살린 것은 물론 자기 자신을 뒤돌아 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한 여자 친구(해니)의 말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고 했다. 





해니는 자기 고향 영국에 돌아가면 바닷가에 있는 마을에 작은 길을 만들겠다며 "당신도 이런 길을 만들어라"고 매달렸다고 한다. 아울러 해니는 "한국에 가봤는데 당신 나라는 이런 걷기 코스가 아주 필요한 나라갔더라"며 "24시간 찜질방, 24시간 감자탕집이 있는 나라...당신 나라는 '미친 나라(crazy country)'같더라"는 충격적인 말을 하며 걷기 코스를 만들 것을 권했다고 한다. 제주 올레길의 디자인 배경은 이랬다.





우리는 김경호 이사장과 임현철 이사의 안내로 어느덧 여수 앞 바다와 갯바위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 서 있었다. 낚시꾼들이 다녔던 작은 오솔길을 따라 바닷가로 온 것인데 갯가길은 낚시꾼들이 다니던 오솔길과 한 때 해안초소로 가던 길이 이어져 만들어진 곳이었다. 




그 길은 폭이 너무 좁아 한 사람이 지나가면 알맞은 길이어서 청미래덩굴이나 가시덤불 등이 길을 가로 막으면 커터(가위)로 잘라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김 교수의 손에 들린 커터의 용도가 그 때문이었다. 갯가길을 잠시 벗어나 벼랑 끄트머리에 서니 곳곳에서 갯바위 낚시꾼들이 낚시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우리는 어느새 여수 갯가길 삼매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벼랑끝에서 한 해를 보내고 있는 그 흔한 식물 곁에서 눈을 맞추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날마다 벼랑 끝에 서서 서명숙 씨가 선택한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를 운명에 처했는지도 모른다. 사정을 바꾸어 놓고 보면 벼랑끝의 식물 한 포기는 또 얼마나 위대한 삶을 살고 있는가. 동행한 정운현 선생은 갯가길을 걸으며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참 희한한 일이지요. 서울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사정은 매한가지였다. 나 또한 시끌벅적한 서울을 떠나는 순간부터 여수 갯가길에 발을 깊이 담군채 허우적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힐링이라고 한다. 갯가길의 치유 작용이 효과로 드러나고 있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여수 갯가길을 다녀온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고, 해가 바뀌었는 데도 여수 갯가길을 그리워 하고 있는 건, 귀한 산삼 한 뿌리를 먹은 것 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나 할까.




한 때 중국에서는 아편 때문에 인삼이 귀해질 때가 있었다. 아편전쟁(1840~1842)의 여파로 아편을 해독할 약제가 각광을 받고 있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아편에 대한 인삼의 제독 효과가 알려지면서 중국산 일본산 북미산 인삼들이 인삼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는 데, 한국의 인삼이 최고의 가치를 발휘했던 것이다. 한국의 지리적 토양이 만들어 낸 명약이 인삼이었던 것이다. 




1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세상은 많이도 달라졌다. 대한민국(남한)은 올레길을 추천해 준 해니의 말처럼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경제대국으로 거듭나 24시 감자탕집은 물론 24시 찜질방이 없으면 안 될 정도로 도시인들은 지쳐있다. 세계 최고의 명약으로 일컬어진 인삼을 가마니 째 고아 먹어도 효과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아편중독 보다 더한 '일 중독'에 빠져있는 모습. 




탈출구가 필요한 시점에 올레길이 생기고 둘레길이 생겼으며, 동네 뒷산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둘레길 바람이 불고있다. 여수 갯가길의 탄생 배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여수 갯가길을 직접 체험하면서 느낀 점은 많이 달랐다. 올레길을 디자인 한 서 씨는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 길의 종점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동안 바쁘게 살아오면서 자신을 돌보지 못한 점도 없지 않겠지만, 자기 자신의 아름다운 내면을 성찰해 볼 시간적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참 중요한 멘트였다. 세상에 널린 게 아름다움일지라도 바쁘게 살아가는 가운데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고, 자기부터 사랑하지 못한 사람이 타인이나 타 지역을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여수 토박이로부터 안내를 받아 여수 갯가길을 돌아보는동안 김 교수와 임 이사는 아이들처럼 신났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땅의 갯가길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부터 고향땅의 판타지아에 스스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데 행복이 전염되지 않고 힐링이 되지않는다면 그것도 문제일 것.  




자기를 끔찍히 사랑해야 남의 삶까지도 귀히 여기게 되는 법이다. 자기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야 남의 고향을 존중하게 되는 법이다. 같은 이유로 자기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는 풍토라면, 어디를 가나 고아처럼 방황하며 지금은 황폐해진 옛고향을 그리워 하게 될 것은 인지상정 아닌가. 




한 화가는 서울에 살면서 여전히 고향땅을 그리워 하고 있고, 한 여성은 모든 걸 팽개치고 '걷기 전도사'가 됐다.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고향과 치유의 땅이 작품으로 남고, 평범했던 '길'이 새삼스럽게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곁에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길이 자꾸만 커 보이는 건 우리가 외면했던 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잃어버린 것. 그 길을 다시 일깨워준 사람들이 여수토박이들이었다.





웃지 않으면 울게 된다고 한다. 행복하지 못하면 불행한 법이다. 자기의 처지를 뒤돌아 보며 여수 갯가길은 물론 동네 둘레길이라도 천천히 천천히 매우 느리게 오래토록 걸어보시라. 자기 속에 움츠려 숨도 못 쉬고 허덕이던 모습이 발견될 거다. 도시 한 가운데서 실체를 다 드러낸 종교를 붙들고 아우성 쳐 봐도 발견되지 못한 자아가 어느새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한 때 해안초소로 사용되던 작은 건물은 갯가꾼들의 대피소나 휴게소로 사용되기 안성맞춤이었다. 

말 못하는 무기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며,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말 못하는 무기체의 형편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신이 경배의 대상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도시인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건 감자탕이 아니라 대자연 속으로 천천히 걸어보는 일이다.




그 길을 찾아 떠나는 여정에 하얀등대가 말 없이 서 있었다. 도시인의 좌표를 일러주는 길라잡이처럼 갯가길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벼랑끝에 서서 김경호 이사장이 손으로 가르키는 곳...




큼지막 하고 넓적한 갯바위 위에 조용히 서 있는 등대 하나가 갯가꾼을 기다리는 곳이다.





그곳으로 이어지는 작은 갯가길에는 야생 털머위가 지천에 널려있었다. 지금은 (샛노란)꽃이 다 졌지만 봄이 되면 갯가길은 꽃길로 바뀔 것이며, 벼랑 옆으로 이어진 길은 천국으로 가는 길처럼 아름답게 펼쳐질 게 아닌가.
 
 
여수 갯가길에 숨겨진 비경 하나
 




외롭게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등대 곁으로 작은 어선 한 척이 지나가고 있었다. 일행은 모처럼 등대 곁에서 땀을 식히며 휴식을 취했다. 등대 바로 옆에는 커다란 몽돌 해변이 펼쳐져 있고 조금 전에 우리가 걸어왔던 큼지막한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맨 처음 이 구간에 들어섰을 때는 규모가 작아보였지만 가까이 다가서자 천 명 이상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김경호 이사장은 꿈을 꾸고 있었다.

"갯가길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개장 1주년을 맞이하면 이곳에서 음악회를 열어보고 싶습니다."




김 이사장은 사람들이 등대주변의 갯바위와 몽돌 해변에 둘러앉아 있는 연주회장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포부를 듣자마자 얼른 제주 우도의 검멀레 동굴 음악회가 떠올랐다. 그러나 이곳은 밀폐된 곳이 아니라 트인 곳이라 파도소리가 방해할 것 같아 다른 제안을 하나 해 봤다.어떤 제안인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음악회가 됐건 그 어떤 행사가 등대 곁 몽돌해변에서 펼쳐진다면, 이곳은 여수 갯가길의 명소로 자리매김 할 게 틀림없어 보였다.



바다 삼매경에 빠진 정운현 선생과 김경호 이사장
 




등대 너머 수평선으로 남해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인다.




등대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위 틈에 핀 무화과를 닮은 나무를 발견했다. 집으로 돌아와 녀석의 정체를 뒤적거려 보니 뽕나무과 무화과나무속 식물인 천선과(天仙果)라는 나무열매였다. 그렇다면 천선과가 지천에 널린 갯가길은 신선들이 노닐던 곳?...




참 절묘한 인연이 등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갯바위 위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임현철 이사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절벽 위는 우리가 걸어왔던 갯가길...




정운현 선생은 몽돌 해변에서 파도를 동영상으로 담고 있었다.





도시의 겨울을 차고 매마르며 냉정했던 것일까. 몽돌 해변에 들어서자 멀리 갯바위 끝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곳에서 필자는 감히 허튼 꿈을 꾸고 있었다. 등대에서 가까운 곳에 작은 카페 하나를 열어놓고 오가는 갯가꾼들을 만나는 소박한 꿈. 여수 갯가길은 만추의 모습으로 겨울을 잊은 채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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