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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봄날,... 유배지에서 바라 본 '한강'의 운명

 봄날,... 유배지에서 바라 본 '한강'의 운명


따뜻한 봄날,
춘천을 다녀오는 길에 제일 먼저 들른 곳이 다산 정약용선생이 영면하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였습니다.
이곳은 제가 가끔씩 찾았던 곳이고 경춘가도를 오가며 늘 바라보던 곳이었습니다.

정약용선생은 제가 평소 너무도 존경했던 분이고 중문을 시작하면서 한시의 오묘함을 일깨워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살아오는 동안 그분은 제 기억속에서 지워졌다가 다시 살아나곤 했는데 제가 살아온 족적이 바쁘다는 이유가
그렇게 선생으로 부터 멀어지기도 하고 또 어느날 문득 떠 올랐던 글들이 선생이 유배지에서 남긴 주옥같은 글들입니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생가에서 강나루로 가는 길...


아마도 선생의 방대한 저서를 만든것은 그가 유배지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의 고향에 있는 산과 들과 강이 너무도 그리웠을 것이고
자나깨나 그 산하를 늘 곁에 두고 살아 온 우리 민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빚어낸 피맺힌 순애보였을 것입니다.

그가 고향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너무도 잘 알려진 그의 시 '환소천거'를 보면 단박에 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데
예전에는 왜 그렇게도 '시'를 대하면서도 그 시속에 들어있는 달짝지근한 샘물과 같은 맛을 알아채지 못했는지요.ㅜ


還 苕 川 居
환소천거

 茶山 丁若鏞

忽   已   到   鄕   里
 갑자기 고향 마을에 이르고 보니

門   前   春   水   流
 문 앞에선 봄물이 흐르고 있네

欣   然   臨   藥   塢
 기쁜 듯 약초밭에 다다라 보니

依   舊   見   漁   舟
 예전처럼 고깃배 눈에 보여라

花   煖   林   廬   靜
꽃들이 어우러져 산집은 고요하고

松   垂   野   徑   幽
솔가지 늘어진 들길은 그윽하다

南   遊   數   千   里
남녘 땅 수천 리를 노닐었으나

何   處   得   玆   丘
어디메서 이런 언덕 찾아보리요


 

환소천거는 수장되고 버들강아지만 무성하다.


환소천거還苕川居는 잘 알려진대로 다산 정약용선생이  '소내苕川 집으로 돌아와서'라는 제목의 시 입니다.
지금 선생이 영면하고 잇는 곳의 행정적 소재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지만
예전 이곳은 경기도 광주군의 소내苕川였던 것입니다. 내'川'字를 '내'로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생이 환소천거를 지었을 당시 선생의 집앞을 흐르고 있던 한강은 지금의 팔당댐처럼 고여있던 물이 아니라
봄날이면 겨우내 얼었던 물이 녹으며 흐르던 곳이고 냇가에는 버들강아지가 피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생의 생가 앞은 거대한 호수로 변하고 말았다. 환소천거의 노래도 함께 수장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글에서 나타나 있는 것 처럼 선생의 집앞으로 흐르던 한강에는 고기잡이배가 떠 있었고
그의 집은 강으로 부터 제법 멀리 떨어진 지금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며 그의 집에서 강까지는 거리가 제법 있었던 것입니다.

강으로 가는 길은 언덕이었고 강기슭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는 솔밭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언덕에는 봄날이 되어서 매화꽃과 복사꽃등 온갖꽃들이 지천에 널린 꿈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환소천거를 통해서 본 당시 전라도 강진에는 한강 주변과 같은 풍광이 없었고 구릉지대만 있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집으로 돌아오자 말자 소감을 이렇게 아름다운 글로 남겼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선생이 늘 그리워하고 바라보던 고향집 앞 소내는 물속 깊이 잠들어 있다.


제가 선생의 생가를 찾아간 날 제일 먼저 가 본 곳은 유배지에서 선생이 꿈에도 그렸을 그 소내로 가 보았습니다. 
소내로 가는 길목에는 선생의 기념관과 생가로 인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음식점들이 나지막히 엎드려 있었고
정오의 봄볕은 얼마나 따스한지 금방이라도 꽃망울이 터질듯 했습니다.

선생은 환소천거에서 '어디메서 이런 언덕을 찾아보리요何處得玆丘'했는데 저는 그곳을 보고 싶었습니다.
혹시라도 그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희뿌옇게 오염된 이 물이 수도권 시민들이 마시는 식수다. 댐을 막기전 이곳은 소내가 흐르는 계곡이었다.



뛰다시피 빨리 가 본 저는 아이들 처럼 금새 시무룩해지고 말았습니다.
제 눈 앞에는 커다란 호수가 펼쳐져 있었고 그 호수는 '팔당댐'이라는 이름으로 물을 가득 담고 있었고
환소천거에 그려진 그림들을 모조리 수장시키고 있었습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건만 혹시라도 하는 기대를 저버린 것은 팔당댐 가득한 물이었고
그 물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채 버들강아지 곁에서 봄볕을 받아 물비늘을 반짝이며 날리고 있었습니다.


 

 수질오염을 막기위한 경고문은 그저 경고문에 불과할 뿐이다. 이곳에 화물선을 띄운단다.


정약용선생이 그토록 그리워한 소내는 이렇듯 수장되어 상상속에서만 남아있는 그의 고향이지만
소내 계곡 가득담긴 물을 걷어내고 선생이 노래한 시 속을 거닐면 원래의 모습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선생이 그린 고향의 그림은 지금도 한강수계나 낙동강수계 어디를 가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산하를 또다시 물에 잠기게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우리 정부인데
저는 아직도 그들이 어느나라 사람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 땅에서 자랐고 이 땅에서 난 음식들을 먹으며 이 땅의 모습과 하늘을 바라보고 살았을 것인데
어쩌다가 그들은 '샌드위치'에 침을 흘리며 '오린지'에 입을 놀려 대는지 기가막힐 노릇입니다.


낚시조차도 금지된 이곳을 대운하로 개발하면 수질이 더 좋아진단다. 선박의 프로펠러가 그 역할을 한단다.


그뿐만 아닙니다. 공천을 받지 못했다고 투덜 거리는 그들은 결국 '한반도대운하반대'로 소신을 꺽었습니다.
일단은 그들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들이 공천을 받았다면 당연히 이명박정부와 입을 맞출 게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한나라당에 모아둔 걸 저는 너무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유사이래 한반도의 환경재앙과 생태환경을 망가뜨릴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을 한자리에 다 모아두었고
새로 공천된 인물들 까지 합하면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실체들 까지 모조리 다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우리의 역사속에서 그들은 영원히 유배되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호통받을 사람들 인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선생 집 근처에 이렇게 쓰레기 더미가 쌓여있다. 카메라 위치 뒤로 바로 팔당댐이다.
비가 오시면 이 쓰레기들을 씻은 물이 팔당댐으로 흘러든다. 주변은 온통 음식점들이다.


 정약용선생이 영면하고 있어서 다행(?)이지 오늘날에 선생과 같은 분들이 우리나라에 계시면
아마도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은 뻔한데 요즘의 일부학자들은 학자의 양심을 팽개치고
그저 정치권에 빌붙어 생명이나 연장해 보려는 얄팍함이 보여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들또한 정치권에 아부를 일삼으며 이병박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대운하계획'에 입을 맞추고 있고
사학자들이나 공학자들 까지 '쪽'을 팔고 다니는데 그들이야 밥벌이 수단으로 '교수라는 이름의 선생질'을 할 뿐이지만
그의 제자들은 또 어떤 사람들인지 선생의 그릇된 면을 꼬집는 그 어떤 활동도 하지 못하는 범생이들만 수하에 있습니다.

참으로 한탄스럽고 개탄스러운 건 이들... 우리의 아들 딸들입니다.
이들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자랐고 오렌지를 먹으며 자란 세대들입니다.
그들은 고생이란 걸 모르며 자랐으며 부모님으로 부터 돈으로 양육된 아이들 입니다.


선생의 집앞에 고인 팔당댐의 물이다. 마실만 한가? 흐르지 않는 물은 썩게 마련이다.


부모님들은 하루종일 일터에 나가있고 아이들은 하루종일 어린이집으로 부터 유치원으로 또 학원으로 다니며
청년이 될 때 까지 입시에 시달리며 오가는 길에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콘크리트로 만든 회색 아파트와
쇳덩이로 만든 자동차에 세상의 모습과 많이도 다른 컴퓨터앞에서 리포트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을 도시의 삭막한 환경에서 농촌의 가득한 정서속으로 인도해야 할 사람들은
아직도 경제를 살리는 돈이 최고임을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한지 모르겠는데
정작 그 아이들은 이런 걱정에 대해서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당신이나 잘 챙기라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선생이  환소천거를 지은 때가 그의 나이 18세였습니다.
전라도 화순현감으로 있던 그의 부친으로 부터 과거시험을 준비하라는 명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오자 말자
고향 산천의 모습을 보고 지은 너무도 아름다운 노래지요.


새로 단장한 환소천거 주변 방책이다. 그 어디에도 환소천거의 노래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요즘 나이로 보면 고등학교 3학년의 나이 입니다. 당시 15세에 결혼을 한 그는 요즘의 풍속과 비교가 덜되지만
그가 과거를 준비하는 모습과 오늘날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모습은 달라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가슴속에는 저렇듯 따뜻한 아름다움이 넘쳐 흐르고 그의 머리는 총기로 말미암아 차갑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훗날 우리나라의 실학을 반석에 올려둘 줄 당시에 누군들 알았겟습니까?
사물을 꽤뚫어 볼 줄 알고 이웃의 불편을 재빨리 알아채며 탐관오리들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선생도
결국은 유배지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인데
잘나갈 때는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의 아집이라는 숲속에 묻혀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는가 봅니다.

한반도대운하를 계획하여 자신의 업적으로 치부하려는 옹졸한 발상도 머지않아 대통령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면 보일텐데
그때의 허망함을 미리 일깨워주는 한줄의 시가 환소천거였습니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생가와 묘소가 있는 곳...이곳에서 불과 200여m되는 곳에 환소천거가 수장되어 있다.


봄날,...제가 좋아라 덩실 거리며 찾아 간 곳이었지요.
그러나 그림과 같이 선생의 고향은 수장되었고 한반도대운하가 착공된다면 한강수계나 낙동강수계 500m에 인접해 있는
우리 문화유산들의 훼손이 불가피하다고 해서 찾아 간 곳입니다.

언급한바 한강이나 낙동강수계에는 아직도 환소천거와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산하가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음흉한 계획으로 우리땅과 문화를 훼손하려는 무리들은
남아있는 환소천거를 또다시 댐으로 막아 수장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들의 음모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이 땅에서 되살아 나는 망령된 일이 없어야 겠습니다.

다음편은 다산 정약용선생께서 유배지에서 남기신 글들 중
 '목민심서'를 통해서 부패한 정치인들을 꾸짖는 글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따스한 봄날...
짬 나시면 선생의 묘소가 있는 기념관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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