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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38년만에 만난 꿈속의 '김찬삼여행기' 감동!



38년만에 만난 꿈속의
 '김찬삼여행기' 감동!

38년전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부산에서 보냈다. 당시 부산 어디를 바라봐도 산이란 산은 황량하여 산꼭대기나 골짜기 몇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숲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씩 성지곡수원지가 있는 초읍으로 소풍을 가거나 아니면 금정산자락으로 놀러 다니기도 했다. 바다가 그리워질때면 감만동이나 이기대를 찾았고 다대포의 물운대를 찾거나 물반 붕어반이었던 을숙도 명지를 찾아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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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내가 찾은 부산의 명소들은 지금 생각하면 오래된 흑백사진 처럼 많이도 바랬지만 용당이나 감만동이나 이기대에서(지금은 이곳이 모두 부두로 변했다) 만난 바다속은 요즘 비경을 자랑한다는 외국의 어느 바닷가 보다 더 맑았고 자멱질을 하지 않아도 지천에 멍게며 소라며 게들이 우글거렸고 파아란 파래와 물미역들 사이를 오가는 망상어들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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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름다운 물고기들은 잡느라고 철사를 펴고 오그려 만든 작살을 고무줄에 매단 채 바닷가로 향했다면 요즘 부산에 사는 사람들은 상상조차도 힘들 것이다. 그때만 해도 겨울이면 황령산이나 백양산 꼭대기에 늘 눈을 이고 있었을 때니 되돌아 보면 참으로 까마득한 시절이다. H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상업미술로 생활하는 친구와 나는 휴일이나 토요일 방과후에 엽서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의 집으로 또는 우리집으로 오가며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날 온천동에 있던 그의 집에서 그의 형이 보던 책을 보고 나는 하던일을 멈추며 두꺼운 책장 속에 빠져 허우적 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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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는 백양산 꼭대기에서 보면 바닷물이 금방이라도 넘칠듯이 보이는 부산 앞바다 너머에 늘 꿈꾸어 왔던 모습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책 저자를 따로 확인해 보지 않아도 두꺼운 책갈피 곁에는 '김찬삼 세계일주여행기'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써 있었다. 그리고 책 속 사진들은 내가 살던 동네나 고향의 모습과 다른 풍경이 가득했고 거울속의 내 모습과 많이도 다른 사람들이 닮은듯 우리와 다른 생활도구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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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나그네' 김찬삼교수(1926-2003)의 여행기가 깨알처럼 빼곡하고 명경을 들여다 보는듯 세계의 모습이 또렷했다. 나는 책을 펴는 순간 북미로 부터 남미로 그리고 인도로 중국으로 유럽으로 세계곳곳을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었는데 주말마다 그림을 그리며 만나거나 공부한다는 핑게로 놀러다니면서 그때부터 온천동을 뻔질나게 들락 거렸다. 책을 빌려갈 수도 있었지만 이 책은 친구 부친이 끔찍히도 아꼈고  경찰 고위직에 있었던 친구 부친의 근엄한 표정만 봐도 책을 빌려갈 형편이 못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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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책을 더 많이 보기 위해서 그 다음부터는 친구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친구형수가 내 놓는 과일을 씹으며 김찬삼교수의 여행기 속으로 빠져 들었던 것인데 그 책속의 꿈같은 기억들은 정작 대학진학 때문에 서울로 향하면서 완전히 내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나는 당장 내 앞에 놓인 현실과 부닥쳐야 했고 그 현실은 모락모락 피어 오르던 내 꿈을 한순간에 집어 삼키고 말았다. 그때쯤 해양대학을 다니던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는 최소한 김찬삼교수님 처럼 무전여행을 하지 않아도 오대양 육대주를 마음껏 활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게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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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을 제대하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카리브'로 떠날 수 있었고 그곳에서 얼마간 행복했지만 온천동 친구집에서 처음 만났던 여행기 속의 모습은 아니었다. 당시 여행기 속의 세계는 단지 외국의 풍물이 아니라 그 풍물들을 돋보기를 들고 샅샅이 뒤지며 바람처럼 다니던 나그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던 것인데 나는 밥벌이로 낮선땅의 이방인이 되어 있는 것 뿐이었다.

김찬삼교수님은 세계적 여행가이자 탐험가인 지리학자로 '세계의 나그네'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세계곳곳을 누빈 분이고 오늘날 '배낭여행'과 사뭇다른 여행을 통해서 세계의 모습을 우리들 안방에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나처럼 세계를 동경했던 사람들에게 달콤한 꿈을 심고 있었다.1958년 1월부터 1997년 2월까지 40년간 20차례, 160여 개국, 1백여 민족, 2천여 가정과 우정을 나누고 지구 32바퀴에 해당하는 거리를 여행했고 여행 시간만도 14년을 헤아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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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인이 된 선생은 1992년 6월 인도 여행 중에 열차에서 떨어지는 교통사고로 머리와 갈비뼈를 다치고  치료 후에 9월 터키 앙카라 성에서 성벽 모서리에 머리를 다치면서도 여행을 강행하였다. 1994년에는 그 후유증으로 언어장애와 '알츠하이머'가 발병하였다. 그럼에도 1995년 19차 세계여행(러시아)와 1996년 20차 세계여행(동남아시아)도 실시하였는데, 결국 여행에서 얻은 병의  후유증으로 2003년 7월 2일 77세 일기로 타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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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전에 여행기로 처음 만났던 선생의 여행기가, 어제 서울패션위크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학여울 지하철 역을 지나다가 그곳에 설치해 둔 '북카페'에서 우연히 그림속의 책을 만나며 나는 감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며 선생 덕분에 내 삶이 많이도 달라진 현재를 보고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다.

선생은 여행을 하면서 나름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첫째, 여행의 목적은 지리학적 연구와 인간 수업(선생의 경우)이므로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사전준비를 철저히 한다. 신문과 방송에서 현지 정보를 얻는다. 최신 현지 지도와 정비된 카메라를 준비한다. 현지어의 기본 회화를 익힌다. 둘째, 건강을 유지한다. 셋째, 교통편은 최 염가로, 복장과 숙소는 검소하게, 식사는 가능한 한 그 지역의 전통시장에서 해결한다. 세계의 보편적인 지식을 얻고 진정한 여행을 의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지리학자로서 지형, 산물, 암석, 토양 등에 대한 관찰과 확인이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고, 카메라에 담는다. 다섯째, 취침 전 반드시 여행 상황과 금전출납, 여행 코스의 지도 기입을 실시한다. 여섯째, 위급할수록 미소를 잃지 않는다. 언어가 안 통할 때 최상의 의사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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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칙은 내가 해외여행을 하는 동안 거의 지키려 애쓰는 덕목이자 스스로 세계속을 여행하면서 지켜야 할 '네비게이션'과 같은 원칙이었다. 요즘 생각해 보면 이런 원칙들은 많이도 퇴색해 있지만 '세계의 나그네'가 전하는 이런 원칙은 오래전 부산의 한 바닷가에서 본 투명한 바다속 처럼 내 머리와 가슴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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