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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 山들

여성들이 싫어하는 박달재 '남근목' 바바리맨 닮아!


여성들이 싫어하는 박달재 '남근목'  바바리맨 닮아!


 지난달 28일, 이틀동안 충북제천의 곳곳을 돌아보는 팸투어를 통해서 그동안 어슴프레 알고 있던 재천의 참모습을 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천의 모습들은 그곳이 우리나라의 농경문화 발상지 다운 놀라운 수리시설이 있어서 저는 잠시동안 태고의 신비속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중부내륙에 위치한 제천은 온갖 동란을 겪으면서도 중원문화의 중심지로서 많은 문화유적과 월악산국립공원을 비롯한 명승지가 있어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팸투어 일정중에 제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박달재'였는데 저는 이곳 박달재를 둘러보는 동안 '남근조각'들 때문에 마음이 썩 편하지 못했습니다. 남근목이나 여근목 남근석.여근석 등은 그동안 블로거뉴스를 통해서 또는 직접 여행지를 다니면서 많이도 봐 왔지만, 왠지 박달재에 있는 남근조각에 대해서는 어느날 갑자기 여성들 앞에서 자신의 성기를 드러내 놓고 쾌감을 느끼는 바바리맨을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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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의 남근조각 중 하나...남근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관광버스를 타고 박달재에 도착하자 마자 그림과 같은 남근조각을 만나게 됩니다. 예전 농경사회 같으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들이 아이를 갖게 해 달라는 기도를 남근석이나 남근목을 향하여 간절하게 올렸는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그때와 분위기가 사뭇 다른 정보화시대여서 자칫 이런 '조각예술품'들이 일반의 노리개감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런 조각들은 심심찮게 국도변이나 특정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때 마다 동행한 여성들이나 안사람은 이 조각의 예술성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 애써 눈길을 피하며 "남자들은 이런 조각들을 보면 여성들이 좋아 하는 줄로 착각을 한다"는 말을 빼 놓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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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은 이런 조각들에 대해서 '변태적인 욕구'를 표현한 하나의 행위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열등감에 사로잡힌 한 남성이 특정장소에서 바바리맨 처럼 자신의 행위를 미화하고 있다는 겁니다.
저도 그런 주장에 동의하여 박달재에 널린 남근조각을 자세히 관찰(?)했던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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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의 역사는 꽤 오래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위대한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1216년 고려의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1만 5천의 병력으로 거란의 10만대군을 여기서 물리쳤고
1268년에는 고려의 이 고장 별초군別抄軍이 또한 여기서 몽고의 군사를 막아낸 유서 깊은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영남땅 도령 박달과
박달재 아랫마을 처녀 금봉의 사연이 전해내려 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박달재의 전설에 그려진 박달과 금봉이의 순애보는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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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끊긴 박달재...

영남에 살던 박달은 과거시험 합격이라는 청운의 꿈을 갖고 한양을 찾아가다가
 평동마을의 한 농가에서 유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난을 조심하라는 가훈 속에서 자란 박달도령의 늠름하고 준수한 모습에
그집의 딸 금봉이는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박달도령도 금봉이의 절절하고 연연한 자태에 넋을 잃고 말았다고 전해지니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달빛이 호젓한 밤 두 청춘남녀는 사랑을 맹세하고 장래를 약속하며 밀회로 밤을 새웠지만
박달의 한양행으로 둘은 잠시 이별을 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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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은 금봉이 정성을 다해 몰래싸준 도토리묵을 허리춤에 달고
눈에 아른 거리는 첫사랑 금봉이의 모습을 애써 지워가며
이등령 아흔 아홉구비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이별을 슬퍼하며 한양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한양에 도착한 박달은 만사에 뜻이없고 오로지 자나깨나 금봉이 생각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금봉이와 나눈 로맨스는 시시각각 그의 눈에서 멀어지지 않았고
금봉이와 약속한 금의환향을 꿈꾸며 과거를 보았으나 결과는 낙방이었습니다.

박달은 고민하는 날이 계속 되었습니다.
과거에 낙방한 채로 금봉이를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금봉이에 대한 그리움은 절절했지만 낙방한 채로 평동을 가자니
낙방한 초라한 모습을 금봉이에게 차마 보일 수 없어 가슴을 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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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과 금봉이의 순애보를 그린 조각공원은 박달재휴게소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있다.

그런 한편, 박달과 달콤한 사랑을 경험한 금봉이는박달을 보낸날부터 성황님께 빌고 빌기를 석달열흘,
 끝내 소식이 없자 아흔 아홉구비를 그리운 박달의 이름을 부르며 오르 내리다가
마침내 실신하여 상사의 한을 안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고 전해 집니다.
요즘 같으면 휴대폰 전화 한통이나 메일 한 통 보냈으면 이런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죠. ^^

박달은 마침내 금봉이의 삼우날 평동에 도착하여
금봉이의 허망한 죽음앞에서 실의와 허탈감에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과거에 낙방할 정도로 그녀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었는데 마음먹고 금봉이를 만나러 온 길에
금봉이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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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이 의식을 잃은 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눈을 뜬 박달의 앞에 금봉이가 애절하게 박달을 부르며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앞서가던 금봉이가 고개마루 정상벼랑에서 박달을 부르며 몸을 솟구치는 찰라,
박달은 금봉아!~하고 이름을 부르며 금봉이의 치맛자락을  잡았으나 이는 허상일뿐이었고
박달은 벼랑에서 떨어지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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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까요? 소쩍새 우는 봄이되면 박달과 금봉이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표현이라도 하듯
 박달재에 연분홍빛 진달래 꽃이 아름답게 피고 진다는 전설입니다.

제가 이렇듯 장황하게 박달재에 얽힌 박달과 금봉이의 순애보가 얽힌 전설을 이야기 하는 배경에는
이곳에 널린 '남근조각'상이 박달재에 관한 일반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달재 한켠에는 박달과 금봉이의 애뜻한 사랑의 이야기가 조각된 공원이 있고
김취려장군의 전적을 기리는 전적비와 동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달재 정상에 있는 휴게소와
왠만한 발길이 닿는곳에 서 있는 '남근조각' 때문에 박달재의 사연은 남근목에 묻히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도처에 장식되고 있는 남근상 도는 남근조각들은 조각 당시의 본래의 뜻이 어떻던 간에
특정지역의 일반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흉물'은 아닌지 재고해 봐야 할 때 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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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나홀로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체로 가족이나 연인들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박달재를 지나치면서 아이들과 함께 이 조각을 관람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특히 여성들은 박달과 금봉이의 순애보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은데
어느날 버스에서 내려서 첫눈에 나타나는 남근조각...그건 바바리맨을 만났을 때와 무엇이 다를까요?
저는 10년공부 '도로아미타불' 된 박달과 금봉이의 이야기가 훨씬 더 매력적입니다.

일반에 널리 알려진 '울고 넘는 박달재'의 순애보가 남근조각 보다 더 낫지 않나요?

박달재 휴게소에 전시된 아래 그림들을 보시면서
 한번쯤 생각해 보시는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여러컷 담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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