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HOTO 갤러리/도시락-都市樂

수원 화성,만추의 낮과 밤



 www.tsori.net


단풍이 아름다운 역사적 명소
-4편,수원 화성 만추의 낮과 밤-




"달도 사라진 칠흑같이 까만 밤, 정조대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수원 화성의 동장대(연무대) 활터 앞에서 바라보이는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의 모습이 묘한 실루엣을 내뿜고 있다. 빛과 그림자 혹은 낮과 밤 그리고 두 얼굴이 번갈아 가며 연상되는 것. 동북공심돈은 동북노대에서 서쪽으로 60보쯤 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높이 17척(1척 길이 30.3cm) 5촌(1촌 길이 3.03cm), 바깥 원 둘레 122척,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 안쪽 원 둘레 71척,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의 공간을 비워두고, 2층 덮게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바깥 쪽으로 총안을 뚫어서 밝은 빛을 끌어들이는 구실을 겸하게 하였다. 




* 낮에 본 동북공심돈. 지난해 9월 수원화성에서 개최된 '생태교통축제'에서 촬영한 자료 사진.


위 구멍은 26개, 아래 구멍은 14개[사방 각각 1척]이다. 위 아래 덮게판 위는 진흙과 회를 섞어 쌓았다. 아래층 공심에서 구불구불한 벽돌 사닥다리를 거쳐 위로 올라가면 윗층에 이르게 되어 있다. 그 규모는 기둥 6개를 세웠는 데 길이 12척이고 너비 10척이며, 단층은 3토를 사용하였다. 평평한 여장을 둘렀는 데 높이 5척, 위 아래에 포혈 23개와 누혈 6개를 뚫어놓았다. 아래 층 안 쪽에는 벽돌로 만든 홍예 모양의 작은 문을 설치하였다. 또 문 동쪽으로 공심을 막아서 온돌 한 간을 지어놓았는데 방안(方眼)을 창으로 삼아 군사들이 출입하게 하였다.

<출처:전국 파워소셜러 수원시(SNS팀) 팸투어 가이드북>





수원 화성, 만추의 낮과 밤


화성축조에 관련된 이같은 기록 등은 축조할 당시 만들어 둔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것이며, 200 여 년의 세월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결정적으로 훼손된 수원화성을 복원할 때, 기록에 따라 복원함으로써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기에 이른 것. 포스트를 열자마자 따분해 할 수 있는 기록 때문에 단박에 덮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원화성의 역사적 사실 등을 알고 나면 우리나라에 결코 흔치않는 보물을 접하고 황송해 할지도 모른다. 최소한 필자('나'라고 한다)에겐 그랬다. 





단풍이 아름다운 명소를 소개하면서 역사 이야기가 등장하면 따분해 할 수도 있는 것. 그러나 수원화성을 이야기 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사도세자에 얽힌 비하인드스토리 일 것이다.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와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대왕으로 이어지는 3대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서로 비교되는 것. 권력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부자간의 암투가 빚어낸 산물이 수원화성의 축조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내게 가슴 깊이 다가온 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영조대왕에 대한 불편한 기억들이었다.





사도세자의 유년기와 나의 유년기


나는 가풍이 엄한 종가에서 태어나고 자라 어릴 적 아부지에 대한 따뜻한 기억들이 별로 없었다. 요즘 신세대들이 쉽게 납득하지 못할 정도로 아부지께선 아이들을 엄하게 기르셨다. 더군다나 칠남매가 우글거리는 집안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이런 저런 일들이 생겨나곤 했다. 그중에 사고(?)를 많이 친 한 녀석이 있었다. 그게 하필이면 나였다. 내가 저지른 사고는 '머피의 법칙'처럼 우연의 연속이었다. 


어쩌다 등교길이나 하교길에 돌맹이 하나를 걷어찬 게 (요즘 보기드문)양장점 진열장의 큰 유리를 맞혀 와장창 깨뜨리게 되는 것. 그 즉시 줄행랑을 쳐도 양장점 주인은 어떻게 알았는 지 범인을 정확히 찾아내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이런 사고를 친 날이면 친구들과 동네를 배회하다가 해가 뉘엿거리면 쥐 죽은 듯이 아부지의 눈치를 살피며 잠이들곤 했다. 





그런 날 잠이 잘 올 리가 없었다. 혹시라도 사고가 들통나기라도 한다면, 그땐 아부지의 불호령과 함께 회초리를 구해 와 종아리를 걷어야 했다. 또 어쩌다 친구들과 멱감으로 가는 길에 꼭꼭 숨어서 복숭아 서리를 해도 집으로 돌아와 보면 북숭아밭 주인과 아부지가 술잔을 나누고 있는 것. 우리는 열심히 도망갔지만 멀찌감치서 뒷모습만 봐도 '저 녀석이 뉘집 얜지' 다 아는 것. 아버지는 크고 작은 머피의 법칙 등에 대해 보상을 해 오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종아리를 걷어야 함으로 (내 잘못으로) 아버지가 점점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것. 나의 이런 기억들은 사도세자와 영조대왕의 불편한 관계에 비교할 바가 못되지만,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영조대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수원 화성을 방문하게 되면 오래된 기억의 편린들이 되살아나며 영조대왕과 아버지를 꾸짖던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할머니가 알고 계셨던 사도세자의 비화

할머니는 손자 편이셨다. 머피의 법칙과 계획된 범행(?)이 들통나 아부지로부터 취조에 들어가며 즉결심판(?)을 받는 날이면 할머니께선 문밖에서 서성거리셨다. 혹시라도 손자가 범행 보다 더 큰 형량을 받게 되면 항소를 통해 손자를 구제해 줄 참이었다. 할머니는 문밖에서 항소문을 읊조리며 판사의 심기를 흔들어 놓았다.

"야야...살살해라...때리지 말고...사도세자가 왜 죽었는 지 알제?..."

아버지는 범행이 다 들통난 아들내미를 취조하고 훈계하다 말고 할머니께 역정을 내셨다.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면 버르장머리가 나빠진다 아닙니까. 마...가만히 계시소. 제가 알아서 할 낍니다."




나는 종아리를 걷어부치고 이제나 저제나 언제 내려칠 지 모르는 회초리 때문에, 사시나무 떨 듯 후덜덜 떠는 찰라 회초리가 종아리에 찰싹 달라붙는다. 그 순간 자지러지는 소리가 문밖으로 새 나가며 할머니의 손자 구출작전이 시작되는 것.

"이누무 강아지, 잘못했다 하고 빨리 도망가라!..."

할머니가 안방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이때다' 싶어 도망치는 나...그렇게 도망가면 어디 갈 데가 있나. 맨발로 사지(?)를 탈출한 나는 뒷마당 굴뚝 뒤에서 어께를 들썩이고 있는 것. 굴뚝의 온기가 졸음을 갖다줄 때쯤이면 할머니가 고무신을 들고 구출작전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께서 정지(부엌)에 밥을 차려놓고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나직히 "어서 먹고 자...!"라고 말씀하셨다. 요즘 생각하면 마치 단편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시츄에이션이 바람잘 날 없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누구인가

할머니는 정조대왕의 사후 100년 내(1898년)에 서울에서 가까운 (부천)소사 지역에서 태어나셨다. 할머니는 선조님들로부터 대략 3대를 거치면서 구전된 사도세자의 비하인드스토리를 다 알고 계셨던 것.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대왕은 당시 백성들에게 '매우 나쁜 왕'으로 소문나 있었다. 따라서 할머니께선 아부지가 아들을 함부로 다루는 듯한 모습만 보면 사도세자와 영조의 예를 들며 꾸짖고 나섰던 것이다.

"어떻게 지 새끼를 죽일 수 있나 말이다...!" 

할머니의 가슴 속에는 자기 새끼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비정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정조 사후 100 여 년의 세월히 흘렀지만 할머니 가슴 속에서 지우지 못하는 사건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사도세자의 영조대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인적 기질이 강한 사도세자의 불행은 미리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 영조와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였다. 예컨데 영조가 헌누리당의 꼴통이라면 사도세자는 헌정치연합의 골수분자라고나 할까. 두 사람은 부자간임에도 불구하고 노론과 소론의 대척점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도세자를 총애 하던 영조가 나중에는 서로 생각이 달라 비극으로 치닫게 된 것. 처음엔 이랬다.

"국왕의 사랑과 왕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세자는 순조롭게 성장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세자는 매우 총명했고, 부왕의 기쁨은 그만큼 더 커졌다. 세자는 만 2세 때부터 글자를 알았다. '왕'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영조를 가리키고 '세자'라는 글자에서는 자기를 가리켰으며, 천지.부모 등 63자를 알고 있었다.-(정조 13년(1789) 10월 7일. 어제장헌대왕 지문(誌文)"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

그러나 세자가 커 가면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인적 기질이 보다 강했던 세자는 자연적으로 학문과는 조금씩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아들을 꾸짖는 횟수가 늘었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점점 더 꺼리게 되었던 것이다. 세자는 대략 10세 무렵부터 학문에 싫증을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영조는 세자가 자기 앞에서 솔직히 대답하는 걸 좋아했다. 영조는 "글을 읽는 것이 좋은가, 싫은가" 하고 물었고 세자는 "싫을 때가 많다"고 대답했다. 이때 영조는 "동궁의 이 말은 진실하니 내 마음이 기쁘다"고 대답했다(1744년(영조 20) 11월 4일)고 기록하고 있다. 

영조의 표현을 참조하면 세자는 아버지에게 진심을 털어놓을 수 없을 정도였을까. 기록에 나타난 '기쁨'은 진심이 아니었다. 그후 영조는 (학문을 등한시 하는)세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엄격한 규율로 세자를 다그치고 있었다. 그런 규율들은 호방한 무인적 기질의 세자에게는 무거운 규제가 되었다. 부왕은 세자를 꾸짖었고, 세자는 부왕을 꺼리고 멀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도세자와 영조를 갈라놓은 나주 벽서 사건

그후 대리청정(어떤 이유 등으로 왕세자가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일)이 시작되면서, 영조와 세자의 갈등과 반목의 골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부자를 갈라놓은 사건이 이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부왕의 다그침 등으로 쫄아든 세자의 기절 사건이 생기면서 세자의 정신질환이 도마에 오르기 시작한 것. 훗날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사망(임오화변,壬午禍變: 영조 38년 윤5월 세자가 뒤주에 갇혀 살해된 사건)한 원인을 의대증(衣帶症)이라고 지적했다. 

 증상은 '옷 입기를 싫어하는 것'인데, 세자가 영조를 만나기 싫어 옷을 입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자가 부왕을 만나는 일을 얼마나 싫어했으면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세자의 정치적 성향은 소론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세자가 대리청정(영조 31)을 하고 있을 때 발생한 나주 벽서 사건(羅州壁書事件,1755년 2월)에서 세자는 부왕의 정치적 성향과 전혀 다른 소론을 옹호하며 부왕의 정치적 입지를 불안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나주 벽서 사건은 어떤 사건이었을까.




나주 벽서 사건에 나타난 사도세자와 영조

"나주 벽서 사건은 1755년(영조 31) 소론(少論)의 윤지(尹志) 등이 일으킨 모역(謀逆) 사건으로 을해옥사(乙亥獄事)라고도 한다. 윤지는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1722년(경종 2) 임인무옥(壬寅誣獄)을 일으킨 김일경(金一鏡)의 옥사에 연좌되어 1724년 나주로 귀양갔다. 오랜 귀양살이 끝에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아들 광철(光哲)과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 이효식(李孝植) 등과 모의하여 동지규합에 나섰다. 

이들은 수차의 변란으로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부류들과, 소론 중에서 벼슬을 지낸 집안들을 흡수하고, 우선 민심동요를 위하여 1755년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나주객사에 붙였는데, 이것이 윤지의 소행임이 발각되어 거사(擧事)하기 전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윤지는 영조의 직접 심문을 받고 2월에 박찬신(朴纘新).김윤(金潤).조동정(趙東鼎).조동하(趙東夏) 등과 같이 사형당하였으며, 이광사(李匡師)·윤득구(尹得九) 등은 귀양갔다. 그 밖에도 윤지의 일당인 심정연(沈鼎衍)이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써서 체포되기도 하였다." <출처:두산백과>




영조의 결심과 사도세자의 죽음

나주 벽서 사건에 나타난 영조의 모습을 보면 세자와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로 나타난다. 노론의 우두머리격인 영조가 소론의 반역을 두둔하고 나선 세자의 판단을 그냥 바라보고 있을까. 영조의 입장에서는 세자가 발칙하게도 
유배된 소론 인물을 극형에 처하거나 처벌을 확대해야 한다는 노론의 주장을 모두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세자의 판단이 죽을 죄(?)로 이어지지 않았다. 나의 할머니 가슴에 트라우마를 남긴 희대의 살해 사건(임오화변)은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에 일어났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20여 일 전에 제기된 나경언(羅景彦)의 고변이었다(5월 22일). 

그는 세자의 비리를 영조에게 고변했다가 무고 혐의로 참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 고변으로 영조는 세자의 여러 비리를 더욱 상세히 알게 되었다. 이틀 뒤 영조는 시전 상인들을 불러 세자가 진 빚을 갚아주었다(5월 24일). 그리고 영조는 신하들로부터 "요즘 세자께서 매우 뉘우치고 있다"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여망(餘望)이 전혀 없다"면서 개탄했다(윤5월 1일)고 전한다. 그리고 그동안 세자에 대한 분노와 고민을 결심하게 된다. 최종적인 결론은 윤5월 13일에 내려졌다. 그날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 속에 가두었다.




* 북서포루(北西砲樓)는 수원 화성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장안문과 화서문 사이에 시설된 화성의 5개 포루 중의 하나다. 북서포루는 검정 벽돌을 쌓아 치성과 같이 바깥으로 돌출시키고 내부는 나무판을 이용하여 3층으로 구획하였으며 포혈을 만들어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와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서포루는 성밖으로 약 8.8m 돌출되어 있으며 지붕의 형태가 성 안쪽은 맞배지붕형태로 성 바깥쪽은 우진각 형식으로 된 게 특징이다.


수원 화성은 만추의 단풍으로 불타고 있었다. 북서포루와 어우러진 붉은 단풍잎을 보고 있자니 비장함이 깃든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대왕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왕위에 오를 때까지 피눈물을 삼켰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화려하기 그지없는 만추의 단풍이 슬픔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결국 정치적 문제로 귀결되며 아들을 뒤주 속에 가두고 만 것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손자를 '무조건' 끔찍히 아끼고 사랑하셨던 이유 속에, 영조의 선택이 그 어떤 이유라도 정당화 될 수 없는 '미친짓'이나 다름없었다. 세상의 아버지들이 영조같은 판단을 내리면 살아남을 수 있는 새끼들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정치적 성향이 강하게 작용된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은, 훗날 정조대왕의 개혁적 성향을 더욱 공고히 다졌을 것. 




북서포루를 지나 장안문쪽으로 걸어가는동안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을 축조할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 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권력을 두고 벌어진 당파싸움의 두 얼굴 속에서 사도세자가 꿈 꾸었던 일을 정조가 이어받고 있었던 것. 정조는 즉위한 즉시 윤음(綸音,임금의 말씀)의 첫머리를 이렇게 선포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정조 즉위년(1776) 3월 10일)"


영조의 천륜을 어긴 판단이 정조대왕으로부터 확인되고 있는 것. 정조가 즉위할 때까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입도 열지않은 채 숨죽이며 살아온 지난 세월이 그대로 묻어나는 윤음이었다. 정조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며, 아버지의 불명예를 깨끗이 씻을 기회가 찾아든 것이다.




팔달산 회주도로를 따라 걸으며 서북각루에 도착한 이후 화서문으로부터 이어진 성곽을 따라 장안문 앞에 도착했다. 얼마전 막을 내린 제51회 수원화성문화제의 정조대왕능행차 연시에서, 수원화성의 정문이자 북문인 장안문을 통해 수원 화성을 들어서는 (비록 대역이긴 하지만)정조의 모습은 위엄이 넘치고 온유한 표정이었다. 


즉위할 때까지 과정은 물론이거니와 한여름 날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정조대왕. 할아버지 영조에게 매달리며 애걸복걸 했을 모습 등을 생각하면, 연산군처럼 즉시 보복에 나섰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자기의 불행을 다른 방법으로 갚아나갔다. 오늘날 우리에게 효심 지극한 인자한 군주로 기억되고 있는 것.




이날 저녁, 연무대에 올라 동북공심돈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방은 칠흑같이 깜깜한 가운데 조명으로 밝힌 성곽이 아름답게 드러나는 밤이었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융건릉으로 행차에 나설 때 화성행궁에 들러 성곽을 걸었다. 그때 정조대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할머니의 지극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된 다음 아들 딸들을 엄하게 다스린 적 있다. 내 생각과 달리 녀석들에게는 가혹했을 매질도 몇 차례 있었다. 내 생애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당시 어머니께서 생존해 계시고 곁에 있었드라면, 할머니가 하셨던 구출작전(?)을 그대로 따라했을 것. 하지만 그분들은 모두 하늘나라에 가 계셨다. 



*북암문에서 바라본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의 야경이 너무 아름답다.


어느날 정조대왕께옵서 능행차에 납신 후 수원 화성을 걸으며 사색에 잠겼다면, 의당 아버지를 떠올렸을 것 같다. 또 아버지를 가혹함 이상으로 살해한 할아버지 영조의 얼굴도 동시에 떠올랐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식어갈 즈음 아버지는 또 얼마나 그리웠을까...그래서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보면 아버지를 보는 듯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언제 어떤 형편에 처해있드라도 피붙이는 그 어떤 이유로도 잊혀질 수 없고, 하늘 조차 가를 수 없는 숙명이다. 불현듯 할머니와 돌아가신 어른들이 생각난다.


* 자료 출처: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著 <사도세자> 등

수원 화성 단풍 명소 관련 포스트 ➲ 수원화성,가을에 꼭 가보고 싶은 단풍 명소 / 수원화성,억새가 아름다운 역사적 명소 / 수원 화성의 만추 200배 즐기기 수원 화성,만추의 낮과 밤



내가 꿈꾸는 그곳의Photo이야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