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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갤러리/도시락-都市樂

수원 서호,축만제에 깃든 나혜석과 서시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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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서호,축만제 항미정 답사 후기
-3편,축만제에 깃든 나혜석과 서시의 흔적-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축만제 뚝방길 아래서 올려다 보니 저만치서 철새들의 날개짓이 허공을 가르고 있고. 눈 앞에서는 아침운동에 나선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느리게 느리게 이동하는 곳. 축만제의 정중동을 깨는 풍경은 주로 철새들과 아침운동에 나선 사람들 뿐, 가끔 가는 바람이 억새와 갈대를 흔들어대지만 침묵의 호숫가. 그런가 하면 한 때 둔전이었던 축만제 앞 너른 벌 곁으로 전철이 굉음을 내며 사라지는 곳. 


수원은 최첨단 기업인 S전자가 입주해 있는 디지털문화 선도 도시지만, 수도권의 여느 도시들과 달리 아날로그 향기가 매우 짙은 곳이기도 하다. 누군가 수원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정조대왕'이며 '수원화성'이자 효심 깊은 정조 임금의 흔적이 고루 묻어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14~15일) 1박 2일로 다녀온 '만추의 수원'도 정조대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 축만제도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축만제를 천천히 돌아보는동안 고대와 근대의 흔적이 고루 깃든 게 눈에 띄었다. 답사를 떠나기 전 미리 축만제와 관련된 자료를 뒤적여 보니, 그곳에는 우리가 잘 아는 나혜석(羅蕙錫)과 서시(西施)의 흔적까지 깃든 것. 주지하다시피 나혜석은 대한민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시인이며 사회운동가와 언론인 등 '최초'의 수식어가 줄줄이 따라다니는 이른바 '신여성'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또 서시는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미녀로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 그렇다면 두 여성은 축만제와 어떤 연(緣)을 맺고 있었던 것일까.





축만제는 부용지와 닮은 꼴

축만제 뚝방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동안 카메라의 시선이 움직이는 곳은 두군데였다. 하나는 창덕궁의 부용정(昌德宮 芙蓉亭)을 연상 시키는 축만제의 작은 인공섬이 만들어 낸 반영이었으며, 작은섬과 주변에 둥지를 틀거나 쉬고있는 철새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끔씩 정중동의 호수 위로 비행하는 철새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대략 2km에 달하는 호수 둘레를 산책하는 건 무료하기 짝이없었을 것 같았다.



아울러 곧게 뻗은 뚝방길을 걷고 있노라면 마치 육상 트랙을 걷는 듯 따분하기 그지없을 것이나, 뚝방길 곁에는 고목과 노송이 저만치서 반겨주며 축만제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축만제 가운데 만들어 놓은 인공섬은 둔전과 축만제를 조성할 당시 정조대왕의 생각이 크게 미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축만제에 담긴 민족적 사상

왕께선 창덕궁의 비원에 위치한 부용정을 재건할 당시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을 만들어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반영했다. 이는 원과 방은 '둥글고 네모나다'는 형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덕성은 원만하고 땅의 덕성은 방정하다는 의미였다. 하늘과 땅은 모든 인간과 만물의 생명을 낳은 큰 부모로(부천모지,父天母地-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다) 본 것. 그 두 기운이 합이 돼어 '모든 생명이 태어나 자란다'는 심오한 뜻이 담긴 것이다. 




천원지방 사상은 대체로 이러했다. 삼한의 옛 풍속에 10월 상달이 되면, 나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 둥근 단을 쌓아놓고 하늘에 제사 지내고, 땅에 지내는 제사는 네모진 언덕에서 지내고,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는 세모진 나무에 지냈으니, 산상과 웅상이 모두 그때 남겨진 법이었다. 우리 선조님의 모태인 요하문명 등으로부터 발원된 상제문화와 상제신앙이 창덕궁 부용정에 뿌리를 내린 것. 정조16년(1792년)에 택수제(1707년-숙종 33년에 지은)를 개축해 부용정이라 불렀는 데 축만제의 형상을 보니 규모만 달랐지 조선조 궁중의 조경방법을 쏙 빼 닮은 것 같았다.



1795년,정조대왕께옵선 능행차를 다녀온 직후 창덕궁 부용지에서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만, 축만제에서 낚시를 했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다. 그러나 대략 200 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축만제는 철새들이 떼지어 찾는 곳으로 왕 대신 철새들이 왕의 음덕을 기리듯 고기잡이에 열중하며 때마다 쉬어가는 도래지로 변했다. 




축만제에 깃든 나혜석과 서시

그 곁에서 축만제의 전설 전부를 지켜봤을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 있는 곳. 축만제 뚝방길에 서면 정조대왕의 흔적과 함께 당시로선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닐 뿐만 아니라 부용지를 닮은 호수 때문에 축만제는 요즘 말하는 '레전드'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서두에 언급한 나혜석과 서시의 흔적까지 아우른 아날로그의 산실이랄까. 요즘 SNS가 판을 치는 세상에선 '단말마적 문화'가 빛을 볼 지 모르겠다. 




그러나 고대와 근대의 역사 등을 살펴보면 패스트푸드와 슬로우푸드를 맛보는 느낌의 차이 정도가 뚝방길 위에 펼쳐져 있는 것. 뚝방길을 그냥 아무 생각없이 걷게 되면 햄버거를 깨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며, 자기가 딛고 서 있는 땅의 비하인드스토리를 생각하며 걷는다면, 육개장이나 오래끓인 곰탕을 한 숟가락씩 천천히 음미하는 듯 한 느낌이 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축만제에 깃든 작은 모티브가 나혜석과 서시였던 것.



축만제 위로 여기산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면, 나혜석과 서시의 발칙한 이야기가 깃든 항미정이 코 앞에 다다랐다는 반증이다. 항미정
(杭眉亭)은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1(지번)에 위치한 곳으로 축만제의 방수구 앞쪽에 자리잡고 있다. 마치 창덕궁의 부용정이 두 발(초석)을 부용지에 내딛고 있는 것 같은 위치에 항미정이 자리잡고 있는 것.



그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동안에도 시선은 주로 작은 인공섬에 가 있는 데 
섬 뒤로 보이는 아파트단지가 부용지에 있는 루각 주합루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비원의 주합루 앞에는 어수문이 있는 데 그곳은 왕만 출입이 가능했던 곳. 




조금 전 필자는 멀리 아파트단지 앞 서호공원에서부터 출발해(위 사진 좌측) 어느덧 항미정 가까운 뚝방길에 서 있는 데 줄지어선 아파트단지를 보니 모두 왕손들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모든 형편이 정조대왕 당시 보다 나아진 현대의 삶 속에 축만제가 덩그러니 펼쳐진 것. 그럴 리가 없지만 축만제를 매립하지 않는 한 정조임금의 덕은 영원하지 않을까. 또 축만제를 매립한다고 해서 역사는 지워질 리 없는 것. 왕의 선견지명이 후손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 축만제였던 것.



뚝방길을 따라 걷는동안 조금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호수 가장자리에 부용(芙蓉)
이 눈에 띄지않는다는 점. 부용은 연꽃을 말하는 것으로 축만제 뚝방길을 따라 가장자리에 연꽃이 피었드라면 금상첨화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항미정으로 다가갈수록 기개가 대단해 보이는 노송이 부용의 빈자리를 채워주곤 했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꽤 오래전에는 축만제 뚝방길에 노송이 줄지어 서 있었다"는 데 어찌된 일인 지 그 소나무들이 정리되기 시작하면서 방수구에 가까운 지역에만 소나무군락이 있다는 것. 참 아쉬웠다.



그나마 항미정이 가까울수록 옛 정취가 남았던 지, 옷을 갈아입은 만추의 숲이 이방인을 반긴다.



그곳에서 뒤돌아 보니 멀리 서호천이 축만제로 흘러드는 모습과, 맨처음 축만제에 발을 들여놓았던 서호공원 위로 청둥오리가 무리를 지어 비행하는 모습. 둘레가 불과 2km 밖에 안 되는 호수지만 호수에 깃든 이야기는 저수량 만큼 무궁무진한 것.




내가 본 나혜석의 작품 배경


우리가 잘 아는 '신여성' 나혜석은 어느날 축만제로 사생을 나와 여기산를 배경으로 항미정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두 여인을 항미정과 함께 유화에 담아냈다. 요즘 그림을 잘 그리는 테크니션들이 보면 형편없어 보일 지도 모르는 그림이 <수원 서호>라는 작품으로 남아있었다. 필자는 모든 분야에 두각을 나타냈던 다재다능했던 나혜석의 그림 세계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께서 남기신 작품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작품 속에서 말하고 싶은 나혜석의 생각이 투영된 게 수원 서호, 즉 축만제의 일부분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드는 것. 작품의 시대배경은 일제강점기 때로 우리 문화가 말살되고 있었던 때였는 데 나혜석은 축만제로 나와 그림 한 점을 남긴 것. (나혜성의 작품 '수원 서호'를 자료 사진으로 만나볼까...!)





위 자료 사진(그림)을 살펴보면 저녁나절 혹은 아침나절 항미정에서 두 여인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다.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 입은 두 여성의 머리 모습을 보면, 비녀를 찌르는 대신 머리핀으로 머리를 고정시킨 듯한 (자유로운)모습이다. 필자의 어머니 보다 나이가 많은 나혜석은 할머니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여성으로, 그림에 나타난 차림을 보면 귀족이라야 가능했을 모델들이다. 





봄 풍경을 닮은 서호(낙조?)가 담긴 작품에서 눈여겨 봐야 할 건 당시의 복식도 중요하지만, 농경사회의 아낙네들이 특정 시기에 밥을 짓지 않고 축만제에 나가 저녁노을을 바라볼 수 있거나 여가를 즐길 수 있다면 대단한 것.(어쩌면 목숨을 내 걸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작가의 자유분방함이 작품에 투영된 듯 하다. 그녀는 조선 최초(최초의 수식은 너무 많다)로 구미여행에 오른 여성이자, 프랑스에 체류 중에는 야수파,인상주의,사실파 등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에 깃든 내용은 생각 보다 단촐해, 주제와 부제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혜석의 작품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일제에 반항한 흔적이 다분해 보이는 것. 포스트 서두에 혹은 본문 중에 길게 끼적거린 '정조대왕의 비하인드스토리' 대부분이 나혜석의 작품 속에 등장하며 민족의 정체성 등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되는 것이다. 





특히 창덕궁 부용정의 부용지 등을 연상 시킬 수 있는 축만제의 모습을 그린 건, 한민족의 뿌리가 고조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상기 시키고자 한 게 아닐까...그게 어느덧 110 여 년전의 한 신여성으로부터 발현되고 있다니, 정조대왕의 효심은 신여성의 작품활동까지 영향을 미친 것.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축만제와 잃어버린 민족의 정체성


세월은 가고 오는 것...축만제 뚝방길에서 이곳을 오고간 사람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팽나무 한 그루를 보자 세월무상이 절로 느껴진다. 정조대왕 재위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선조님들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기울였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 앞에 놓인 정치적 현실은 경술국치 때와 다른 점이 쉽게 눈에 띄지않는다. 





나라 조차 반쪽짜리 땅덩이를 차지하고 있고, '민족성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는 세대들이 늘어나면서부터, 자존심 따위는 햄버거 한 쪽 앞에 무릎 꿇은 지 오래된 이야기... 나혜석 님이 활동할 당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좀 더 잘 사는 모습이지만,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동안 팽개쳐 버린 영혼 혹은 배알이 팽나무에 깃든 것인 지, 고목으로 자란 팽나무 곁에서 한동안 서성거리다 나혜석의 작품 배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둥오리 한 마리가 잠수를 하자 잔잔한 파문이 인 곳.




그 곁으로 축만제의 방수구가 현대식으로 고쳐 지어져있었다. 수문 위에서 내려다 보니 잡목에 가을이 깃들고, 면경처럼 고요한 호수면 위로 갈 햇살이 반짝이는 곳. 나혜석은 어느날 이곳에서 축만제를 바라보며 '수원 서호'를 스케치 한 것. 당시...그녀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서혜석이 (작품에서)시선을 두었을 축만제(서호)의 북쪽은, 여기산 자락과 서호천이 축만제로 모여드는 곳. 그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조금 전 필자가 지나온 축만제 뚝방길이 코 앞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수문 위에서 뒤를 돌아보면 방수구 아래로 왕벚나무에 단풍이 알록달록 물든 곳. 그 옆 언덕 위로 항미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정조대왕 무색케 만든 항미정

수원 서호, 그러니까 축만제 수문 옆에 자리잡은 항미정
(杭眉亭)은, 1831년 당시 화성유수였던 박기수가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항미정의 이름은 송나라의 대문호인 소식(蘇軾)이 중국 항주(州,항저우) 태수를 지낼 적에, 항주를 대표하는 절경 서호(西湖)가 서시의 눈썹()처럼 아름답다고 말했던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축만제 수문 위에서 항미정으로 가는 길에 (조금 전 지나온)수문쪽을 내려다 보니, 적당량의 물이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 안타까운 점은 당시의 모습이 사라지고 콘크리트로 만든 방수구가 축만제의 비하인드스토리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축만제를 지은 정조대왕의 생각과 달라보이는 친중(親中)문화를 항미정에 혼입시킨 건 '옥에 티' 이상으로 커 보였다. 




주지하다시피 수원화성을 축조할 당시에 만든 축만제는, 수원화성을 중심으로 사방 네 곳에 시설하면서 서쪽의 둔전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것인데 언제부터인가 축만제 대신 서호라 부르는 게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던 것. 아울러 정조 사후(1800년 8월 18일 ,음력 6월 28일) 대략 30년 후(1831년)에 수원 유수 박기수가 축만제를 서호로 고쳐 부르고, 그곳에 항미정이라는 '듣보잡 편액'을 내 걸었던 것. 그야말로 세간의 빈축(嚬蹙)을 살만한 일이기도 했다.



항미정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며 항미정 앞에 세워둔 <삼남길 이야기> 안내 표지판을 살펴보니, 수원화성을 축조한 정조대왕을 입에 올리기 민망할 정도의 '항미정 유래'를 끼적거려 둔 것. 내용 일부를 살펴보니 이랬다.

"(상략)...서시는 평소 지병이 있어서 항상 인상을 찌푸리고 다녔는 데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미모가 출중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여인들이 자기도 인상을 찌푸리고 다니면 예뻐 보일까 싶어서 너도 나도 인상을 찌푸리고 다녔다고 합니다.하지만 서시정도 되니까 인상을 찌푸려도 예쁜 것이지 못생긴 사람이 인상을 찌푸리고 다니면 더 못 생겨 보이지 않겠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분수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그 여인들을 비웃었고, 여기서 '찡그릴 빈(嚬)' 자와 '찡그릴 축(蹙)' 자를 써서 빈축(嚬蹙)이란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하략)"




여행자의 빈축을 자초한 항미정


오늘날,우리 민족의 일부 정치적(세력의) 성향이 친일,친미에 깊이 빠져든 것처럼, 항미정의 편액을 보니 문을 다 열어젖혀두었지만,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만다. 주지하디시피 중국의 절강성 항주에 위치한 서호는 중국 10대 명소 중 하나로, 13 세기말 항주를 방문한 여행가 '마르크 폴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라고 극찬한 고도로, 현재 중국에서 4번째로 잘사는 곳으로 알려진 곳. 서호는 '서자호'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중국 4대 미인 중, 이곳 출신인 서시를 기념하기 위해 고쳐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서시는 춘추말기 월나라의 미녀로, 이웃나라인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월왕 구천과 그의 신하 범려가, 오나라에 포로로 잡혀 오왕 부차에게 하인 노릇을 하며 당한 수모를 보복하려고, 손자병법의 '미인계(美人計)'로 오왕에게 보내 정치를 소홀히 하게 만들며, 결국 오나라를 망하게 한 절세의 미인이었다. 





솔직히 표현하면 축만제는 중국의 서호 만큼 크고 화려하지 않을 뿐더러, 서시의 비하인드스토리와 잘 어울리지도 않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축만제의 축조 방식은 조선조 창덕궁의 부용정에 깃든 천원지방 사상과 조경술처럼 아기자기한 멋과 유구한 전통을 지닌 것. 다만, 서시를 굳이 축만제에 비교할 수 있다면 어느 가을날 호수에 반영된 물그림자 정도랄까. 





서시에 관한 일화 중에는 어느날 '물에 비친 서시의 모습에 반한 물고기들이 너무 이뻐서 헤엄치는 것을 잊고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는 믿기지 않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게 침어(沈魚)라는 말의 유래이며, 미모가 뛰어난 여성들에게 덧붙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내용들을 굳이 축만제에 대입해 보면 호수의 반영이 아름다운 곳이 축만제의 늦가을 풍경이었다. 





나혜석의 작품에 깃든 축만제의 민족성


하지만 나혜석의 작품 '수원 서호'에 나타난 축만제는 항미정을 비웃는 듯 작품의 주제와 부제가 명확하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나혜석이 수원 서호를 그린 목적이 아름다운 서호를 그린 게 아니며, 서호가 서씨의 눈섭을 닮은 건 더더욱 아니어 보였다. 나혜석의 또다른 작품을 보면 화려한 모습이 쉽게 발견되는 데 비해 '수원 서호'는 화려하지도 않고 단촐하며 웬지 허전해 보이는 것. 나혜석은 어느날 축만제에 올라 나라 잃은 설움을 대리만족 하고, 작품활동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고취시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항미정을 세운 위치는 축만제를 바라볼 수는 있지만, 호수 한모통이에 자리잡아 조망이 좋은 곳은 아니었다. 박기수가 직접 서시의 고장에 가 봤다면 항미정의 위치와 규모를 보다 높은 곳으로, 보다 화려한 루각으로 세웠을 지 모르겠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한 여행자로부터 빈축을 사고 있는 것. 그러고 보니 이 고장 출신의 신여성 나혜석 님의 작품 '수원 서호'가 출중하다는 생각이 단박에 든다. 


그녀의 작품 '수원 서호'는 당시 사회를 풍자한 '풍자그림'처럼 다가오며, 정조대왕의 민족적 정체성이 깃든 축만제의 비하인드스토리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 항미정을 돌아나와 동쪽을 바라보니 비로소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린다. 축만제는 민족의 정체성을 오롯이 담아낸 그릇이자, 백성들과 소통한 효심 깊은 왕의 모습이 반영된 곳으로 다가왔다.


수원 서호(축만제) 관련 포스트 ➲ 수원 서호,축만제 항미정 답사 후기[1편] / 수원 서호,철새들과 도시인이 차지한 축만제 / 수원 서호,축만제에 깃든 나혜석과 서시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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