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의 어르신은 이 마을에서 40년동안 살아오신 오창환(77세) 씨였다. 당신께선 구룡마을에 맨 먼저 이주해오신 분인데 그 때 나이가 대략 37세정도였다. 오 씨가 이 마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당시만 해도, 이 골짜기에 살던 사람은 겨우 두 집 정도였는 데 그후로 여러사람들이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말했다. 오 씨는 이곳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철도(청)에 근무를 하며 박봉으로 살림을 꾸려나간 것.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니 1970년대 중반 무렵부터 대모산 기슭에 (무허가)판자촌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 수 분동안 이어진 인터뷰 내내 오 씨는 힘들어 하셨다. 다리 한쪽이 부어있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든 불편한 모습과 남루한 복장이 인터뷰 내 필자를 안쓰럽게 했다. 하지만 당신께선 이곳 구룡마을에서 살아오시면서 보람된 일이 더 많았는 지 '큰 돈은 못 벌어도 걱정없이 살아오셨다'고 말하셨다.
구룡마을 바깥에서 이 마을(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원주민의 생각과 적지않은 차이가 나는 것. 영상에서 녹취한 내용은 이랬다.
구룡마을 원주민과 1문 1답
"할아버지 이곳에 사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40년!..."
"그럼...구룡마을 생길 때부터 계속 사셨어요?"
"내가 여기(손으로 잿더미 현장을 가리키며) 혼자 들어왔어...저 건너 목장집 사람...하고...그랬더니 밤으로 낮으로 (사람들이)들어오기 시작하더니...그래 이래 넘친 거지..."
"그동안 어떻게 사셨어요?"
"그동...안...좌우간...어 직장을 튼튼한 데 자리 잡았어요. 저는...철도에 근무를 했기 때문에...근데 임금이 박했지요. 그때는..."
"그럼 아이들은 다 여기서 자랐나요?"
"저기 막내만 (손으로 가리키며)여기서 나...서울에서 났어요. 막내 지금 서른 몇이여...휴(한숨을 쉬시며)...그런데 갸만 낳고서는...저들 놀 정도 될 때...서울에 올라온 거...내가 1년간을 임시로 있을 때..."
"그럼, 할아버지는 원래 어디서 사셨어요?"
"원래 저 (충북)보은...보은이라는 데.."
"이 동네 사시면서 어떤 점이 가장 불편하셨어요?"
"그 때야 말로 못했지. 지금은 좋아. 살기좋아...그래서 이젠 어디 갈라고. 고향으로...왜냐하면...어...늙으면 다 고향으로 두고 늙는다고...하시더라고 옛날엔...할아버지 아버지처럼..."
"그럼, 아이들은 이 마을에 안 살고 딴 데 살고 계시나요?"
"에...우리 두 늙은이만 살아요.
"아 여기서요?"
"네...! 그러니까 뭐 저들은 저들대로 잘 해가지고 잘 살아느께...그 한 가지 보람돼지."
"화재가 났잖아요."
"네..."
"이게...어떤 결과로 이어질 거 같아요?"
"글쎄요...어쨌던 여러 사람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그게 현명한 거 같애요."
"선생님께서도 여기(구룡마을) 재개발 되기를 바라시는 거죠?..."
"아니!!...재개발 되기를 바란 지는 뭐 얼마 안 돼서부텀...뭐 그런데 저는 이게(손가락으로 화재현장을 가리키며) 다 제가 관리를 하고 농사 지어서 1년 도지...많이 그렇게 했어요. 쌀 달라면 쌀 주고 그냥, 일곱 말도 주고 한 짝 달라는 분은 한 짝 주고...그렇게 하다보니까...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어요. 여기는...그렇게 하다 보니까. 그래 딴사람 한테...(손가락과 지팡이로 번갈아 가리키며)요 둘레만 내가 다 가지고...이 땅 임자하고 다...그래 뭐 큰 돈은 안 생겨도 아무 걱정없이 살았어요. 저는..."
* 화잿더미에서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주신 구룡마을 원주민 오창환 씨(77세)
원주민과 대화에서 느껴진 구룡마을의 미래
위 원주민 오 씨와 두서없이 나눈 내용을 참조하면 구룡마을과 주민들의 미래가 보인다. 지난 9일 7-B지구에서 화재가 발생할 당시만 해도 언론들이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대대적으로 화재를 보도했다. 금방이라도 구룡마을이 재개발 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먼서 이 마을의 문제점 등을 보도했다. 하지만 사흘이 채 지나지도 않은 시점부터 언론들은 구룡마을의 화재로부터 멀어졌다.
그 가운데 눈여겨 봐야 할 구룡마을의 해묵은 문제는 재개발 방식을 두고 강남구청과 서울시간에 벌어지고 있는 줄다리기였다. 대체로 재개발 현장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문제는 특정 토건족과 정당이 개발이익을 놓고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을 채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이들은 재개발 현장에서 주민들을 편갈아 놓고 서로 반목하고 이간질 하게 만드는 등의 수법을 쓰곤 했다.
구룡마을도 예외는 아니어서 2천 5백 여명의 주민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구룡마을은 주민자치회와 마을자치회로 나뉘어 주민자치회는 서울시의 개발방법인 혼지환용방식을, 마을자치회는 강남구의 전면 수용방식을 지지하고 있는 것. 금번 화재발생 이후 이재민 대피소가 둘로 나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주민자치회는 구룡마을에 대피소를 마련한 한편, 강남구는 개포중학교에 대피소를 마련하고 강남구청장(66,신연희)은 구룡마을 대신 개포중학교를 방문해 구룡마을 사람들로부터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
그러나 40년 전부터 이곳에 정착해 온 원주민 오 씨의 증언 등을 참조하면, 구룡마을 사람들의 요구사항에 근접한 개발 방법이 설득력을 얻을 것으로 판단된다. 구룡마을 사람들의 여러 의견을 존중해 개발을 하는 게 옳다고 보는 것. 안 씨의 증언에 따르면 구룡마을 사람들이 재개발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기 보다 누군가 부추긴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는 재개발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최근의 일이라며 대못을 박고 애써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이를 테면 이런 모습이랄까.
"(재개발은 무슨 개뿔)...큰 돈 못 벌어도 잘 먹고 잘 살아왔는 데...(왜들 난리들인 지...ㅉ)"
오 씨의 증언 속에는 가난한 주민들이 서로 자기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서로 나누며 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쌀 달라면 쌀 주고 그냥, 일곱 말도 주고 한 짝 달라는 분은 한 짝 주고...그렇게 하다보니까...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어요. 여기는...그렇게 하다 보니까. 그래 딴사람 한테..."
도지(賭地)를 해 적은 농사를 일구어봤자 이웃에서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농사 조차 버거웠던 곳. 그때만 해도 가난한 이웃과 서로 나누며 사는 게 미덕으로 여길 정도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사정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 것. 이 마을에 재개발 소식이 들려오면서 인심은 야박해지며 마침내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게 된 것이다.
구룡마을 화잿더미가 떠올린 비정상적인 사회
맨처음 화재현장을 답사할 때 미나리밭에 파릇파릇한 가을 미나리가 한창이었다. 이곳 구룡마을에서는 텃밭에서 상추와 배추 등을 직접 재배해 먹고 마을사람들끼리 정을 나누는 등 오랜 삶을 이어왔다. 오 씨는 이 마을에서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어 팔며 살아오신 분. 화재현장에서 뭐 하나 건질 게 있는 지 돌아보는 당신의 모습에서 피곤함이 엿보였다. 그러나 이분들은 도시의 적지않은 시민들처럼 가계빚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아파트 장만에 허리가 휘청일 정도로 빚더미에 사는 사람들과 비교되곤 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폼생폼사(폼에 살다 폼에 죽는) 체면과 겉치레에 빠져 또다른 화를 부르고 있는 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뻔히 알고도 방치하는 정치인과 정치집단들. 서울 한복판에 남겨둔 판자촌의 갈등의 골은 깊어가는 데 서민들이나 빈민들의 삶과 전혀 상반되는 거짓 정책에 올인하고 있는 한심한 작태들...자국민 304명이 참사를 당해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현장을 조사해 보려는 인양작업 조차 반대하고 나선 살인방조자 내지 교사자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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