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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나와 우리덜

보물섬,남해 독일맥주축제에 숨겨진 뒷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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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사연 간직한 한국 속 독일마을
-보물섬,남해 독일맥주축제에 숨겨진 뒷담화-



왜 웃어야 하나...웃지않으면 울게된다고 한다.


지난 주말 이틀간(4~5일),남해군(군수 정현태)이 초청하고 경남도민일보와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주관한 팸투어를 다녀왔다. 이틀동안의 빡빡한 일정 속에는 한국 속의 독일마을을 투어하는 일정이 포함돼 있었는데 그 가운데 독일맥주축제에 참석하는 기분좋은 일도 있었다. 금년에 4회째를 맞이하는 독일맥주축제는 독일의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 맥주축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성대한 마을잔치에 수 많은 관광객들이 함께 동참해 즐기는 이색적인 축제였다. 그 현장을 돌아본다.



 

옥토버축제는 독일의 바이에른 주 뮌헨에서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2주 동안 열리는 축제이며, 옥토버페스트(독일어: Oktoberfest →Oktober(10월) + Fest(축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의 남해 독일마을에서 4년째 개최되고 있는 옥토버페스트의 주인공들은 독일인들이 아니라 한국사람들이었다. 물론 초청된 몇 분은 독일사람들이고 독일마을에는 부모님이 한국국적인 독일인 2세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독일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분들은 한국사람들. 


 

축제가 한창 무르익는 가운데 이분들의 과거사가 미리 준비한 영상물에 비추어지며 피곤함 이상의 슬픈 과거사가 재조명되기도 했다. 남해의 독일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경제가 힘들때 독일로 건너가(파독) 탄광노동자 또는 간호사로 취업하여 조국에 달러를 송금해 준 사람들이었다. 60년대 당시 우리나라 경제 사정은 6.25 전쟁 직후 
국민소득 80달러의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유엔에 등록된 나라중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가난한 나라였다.




그때 
독일정부는 일본과 터키에 이어 한국과 기술인력 교류협력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파독 광부를 모집했는데 매우 고되고 힘든 탄광의 막장일임에도 불구 하고 경쟁이 5:1 더러는 10:1 이었다고 한다. 체중은 60킬로그램 이상돼야 하고 모래 50킬로를 어께에 들고 달릴수 있어야 하며, 또 탄광경력이 있는 사람을 우선대상이었고 한다.




특이한 것은 그 힘든 일에 지원한 사람들의 몸에 회충이 없어야 지원자격이 되었다고 한다. 참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240여명의 젊은이들은 1963년 12월 20일 부모형제의 환송식을 받으며 낯설고 물선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최초의 파독광부의 모습이었다.




파독 광부들은 마치 전쟁터에 보내는 군인과 같은 모습이었을까. 그렇게 독일로 떠난 광부들은 3년간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했으므로 환송식이 열리는 공항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독일에 도착한 젊은 광부들은 제반교육을 숙지한후 채탄 막장에 투입하여 일을 시작하게 됐는 데, 이들은 광산기숙사에서 매일 새벽4시에 일어나 작업장까지 자전거를 타고 또는 달려서 도착해, 갱도의 승강기를 타고 지하 800여미터까지 수직으로 들어가야 막장으로 연결되는 곳이라고 했다.




그곳은 지열이 30도를 넘나드는 찜통같은 더위가 도사리고 있었다. 더위 때문에 채탄작업이 끝나는동안 장화속에 고인 물을 쏟아붓는 일은 한 두차례가 아니었다고 하니, 막장의 어둠과 더위가 목숨을 위협하는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그렇게 번 돈은 고스란히 조국인 한국으로 송금됐는데 당시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달러는 
국내총생산(GDP)의 37%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이들이 한국경제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당시 파독 광부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900여 명이었다.




아울러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여 년간 약 12,000명의 간호사가 독일로 진출했는데, 그중 5,000여 명은 미국, 캐나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한국 등으로 갔고, 현재는 약 5,000여 명의 간호사들이 독일에 머물고 있다고 전한다. 이들 피독간호사들의 경쟁도 굉장해 당시 간호학교에서 40명이 졸업하면 파독간호사 모집에 20명이 지원했을 정도로 너도나도 신청할 정도로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관련 자료를 살펴보니 1966년 1월 31일 처음 파독간호사의 경쟁률은 5:1이었다. 또 60년대 후반 파독 간호사들의 평균 학력은 78%가 고졸로,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학력이었다. 우수 인력들이 파독간호사로 떠난 것이다. 이들이 번 돈은 한국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임금으로 이들은 첫 월급으로 700마르크를 받았다고 전한다. 당시 1마르크는 300원이었으므로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21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우리나라 대학병원 간호사들의 월급이 5만원인데 비하면 도무지 비교가 안 되는 월급이었다. 




특히 탄광노동자로 파독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눈물겹다. 당시 조선일보가 전하는 탄광노동자들의 비애가 어느정도인지 보도해 놓은 기사를 참조하면 눈물겨울 정도 이상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 하다. 박정희는 1964년 12월 10일 10시 55분,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를 위로차 방문한 자리에서 "대통령이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결국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광부들에게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로 나눠주고, 돌아갈 차에 올랐다. 차 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애쓰는 박정희를 보고, 곁에 앉은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박정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대통령의 눈물' 일화는 2006년 11월 이수길 박사의 증언을 통해 상당 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박사는  파독간호사의 산파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2006년 11월 <기자협회보> 등과의 인터뷰에서 "독일 차관은 1961년 12월 재건 차관 명목으로 집행됐는데, 이것은 장면 정권 때부터 추진된 것"이라며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에 왔을 때 환영 나온 광부와 간호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자 뤼브케 당시 서독 대통령이 눈물을 닦아주며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일화도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1999년 9월16일 '대통령의 눈물'부터 2008년 7월2일 '탄광에서 울어버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같은 내용의 기사를 10여 차례 계속 내보냈던 것이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비하인드스토리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미화되기 시작하며 최근까지 이어진 것이다. 




또 2008년 9월2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60년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임금을 담보로 상업차관을 들여왔다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간호사와 광부의 급여를 담보로 차관을 들여온 뒤 박 전 대통령이 미안함과 서러움에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원인무효가 됐다.




하지만 2008년 12월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포럼(공동대표 박효종)은 광복 이후 한국 현대사를 서술한 교과서 <한국 현대사>(기파랑 펴냄)에 '대통령의 눈물' 일화를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정치에 이용한 나쁜 사례이자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노고를 왜곡.호도 하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이다. 여기까지 남해의 독일마을맥주축제를 다녀온 후 독일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과거사를 대략 살펴봤다.
 






남해의 독일마을에는 한국사람들이 산다. 독일마을에는 우리가 너무도 가난했던 시절 형제자매와 부모를 멀리하고 목숨 걸고 외화벌이에 나섰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은 남해의 푸른 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서 독일풍의 이국적인 아름다운 집에 살고 있지만, 이분들이 겪은 노고는 뭐라 설명할 수 조차 없다. 이미 60~70대가 돼버린 사람들. 그분들이 독일맥주축제를 열며 알록달록 고운 독일의 민속의상을 입고 활짝 웃으며 맥주잔을 들고 있었다. 

*생맥주가 가득 담긴 오크통은 독일 현지에서 공수돼 온 것으로 독일맥주축제 선언후 마개를 오픈하여 잔에 따뤄마시는 장면이다. 우측이 마개를 딴 정현태 남해군수.




누가 그랬던가. 웃지않으면 울게 된다고...남해의 독일마을은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두 번 다시 슬퍼해야 할 까닭이 없다. 독일에서 열리는 옥토버축제는 민속축제이다. 그렇지만 보물섬으로 불리우는 남해의 독일마을에서 열리는 독일맥주축제는, 한 때 찢어지게 간난했던 우리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신 분들의 노고를 기리고 슬픔을 날려버리는 '독일마을의 행복한 축제'로 승화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일까. 해질녘 
독일맥주축제에서 맛 본 맥주는 독일 현지에서 공수해 온 맥주로 누룩 효소 맛이 적당히 살아있는 시원한 맥주였다. 천편일률적인 우리 맥주시장에서 쉽게 맛 볼 수 없는 명품이자, 조금은 걸죽해 막걸리의 목넘김 같은 특이한 맥주. 소시지와 통닭 등이 안주로 제공(구매)됐다. 이날 독일맥주축제는 정현태 남해군수가 오크통의 마개를 따면서 절정에 달했다.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과 독일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옥토버축제는 
1810년부터 뮌헨 서부의 테레지엔비제에서 열리며, 매년 6백만 명이 찾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민속축제로 알려졌다. 이 축제를 위해 뮌헨의 양조사들은 특별히 알코올 도수가 높은 맥주를 만들어 내놓는다고 한다. 옥토버축제는 관광객 5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며, 소시지 20만 개 이상, 맥주 500만 리터 이상 소비되는 거대한 축제로 널리 알려진 축제이다. 이제 남해의 독일마을이 그 명성 이상을 차지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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