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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임금이 꿈꾼 세상과 우리가 꿈꾸는 세상


Daum 블로거뉴스
 


정조임금이 꿈꾼 세상과 우리가 꿈꾸는 세상
-큰 실수 저지른 정조임금의 '8일간' 화성 나들이?-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수원의 옛 이름)의 화성장대(華城將臺)에서 내려다 본 화성행궁(華城行宮) 모습...
조선 제22대왕(1777년∼1800년)정조(正祖)는 이곳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지난 3~4일 이틀 동안, 글쓴이 포함 '소셜러팸투어'에 나선 블로거들과 수원시 관계자 등은 정조대왕의 친필(華城將臺,화성장대-서장대라 부름-) 편액이 걸려있는 서장대에 올라 화성행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곳은 탁 트인 전망에 화성행궁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다. 정조는 한양에서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수원 화산(華山)으로 행차할 때 발 아래로 보이는 화성행궁에서 묵었다. 서장대(西將臺,장대란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할 수 있도록 (성, 보, 둔, 수 따위의)높은 곳에 (돌 등으로)쌓은 대)에서 내려다 본 화성행궁은 마치 '축소모형(miniature)'를 보는 듯 조그만 모습이었지만 정조에게는 남달랐다.

정조는 한양에서 화성으로 행차하면 이곳 서장대에 올라 군사훈련을 지켜보거나 군대를 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니까 우리 일행이 서 있는 서장대는 정조의 발길이 닿은 곳이자, 정조의 숨결이 귓전에 느껴지는 곳이라고나 할까. 불과 200여 년 전 정조는 팸투어에 나선 우리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 분명했다. 우리는 효심이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진 정조임금 당시 축조된 화성 투어에 나서고 있었지만, 정조의 화성 행차는 다목적 카드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장차 다가올 새로운 정치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군대를 지휘하고,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사도세자의 비)와 밀담을 나누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 절로 드는 것이다. 수원 화성 투어에 나서기 전 오래전 돌아가신 친조모님으로부터 들은 바 있는 정조대왕과 사도세자의 이야기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예비지식으로 다시금 챙겨본 정조대왕 관련 자료들 때문이었다. 누구인가 '여행은 아는 것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정조대왕의 8일간의 화성 나들이를 기록을 통해 다시 살펴본다.

다시 살펴본 '정조대왕의 8일간의 화성 나들이' 감동이야


화성관광열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촬영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이 억새풀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일행이 화성관광열차를 타고 행궁이 바라보이는 곳에 내린 후, 그곳에서 가까운 성신각('산신을 모신 곳이며 영험한 기운이 넘치는 곳'이라고 동행한 '문화재 답사 전문가 하주성'님이 일러주셨다)에 들러 예를 갖추고 발길을 돌린 곳은 행궁이 내려다 보이는 나지막한 산이었다. 화성행궁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정조가 떠나온 한양은 왼편(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정조의 행차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하며 화성의 장안문을 통과한 후 우회하여, 행궁에서 여장을 풀고 서장대에 올라 군사훈련을 지켜보며 군대를 지휘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잘 그려낸 역사적 자료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 기록은 혜경궁 홍씨의 수원 화성행궁 회갑연에 관한 정조대왕과 조정신료들간의 논의 과정, 행차의 세부적인 절차에서 물자 및 인원의 동원과 같은 행정 체계를 비롯해.
 
궁중 잔치, 궁중 음식, 궁중 음악, 궁중 의식 등과 같은 궁중 문화와 군사훈련, 행차시의 국왕 호위, 국왕의 의장행렬, 기물, 장신구, 물가, 인물 등 당시의 궁중문화 및 일반 생활사의 면면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였다. 을묘년(1795)에 '8일간의 일정'을 상세히 기록한 게 '원행을묘정리의궤'였던 것이다. 방대한 자료 중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게 '8일간의 일정'이었다. 정조는 화성행차 일정에 왜 8일씩이나 걸렸던 것일까.

 



"그건 요...정사에는 나타나 있지않지만, 야사에 의하면 정조임금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죽음을 기리기 위해 일부러 (행차를)그렇게 한 게 아닌가 하시는 분들이 적지않아요. 왜 하필이면 8일이었겠어요."
 

화성을 돌아본 직후 행궁에 들러 들어본 (동행한)해설사의 언급이었다. 물론 글쓴이의 질문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원행을묘정리의궤 등 8일간의 일정 중에 나타난 정조의 화성행차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기록은 '수원시 학예사(김준혁)' 등의 자료에 세세하게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정조의 8일간의 화성행차 일정을 재구성해 보면 이런 모습이다.

 



정조대왕 '8일간의 화성 나들이' 무슨 이유?

정조는 조선시대 임금들 중에서도 궁궐밖 나들이가 가장 많은 임금이었다. 재위 24년동안 무려 66회나 궁궐밖 나들이를 했는 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 참배가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다. 정조가 화성을 방문한 건 모두 13차례인 데 이 중 을묘년(1795년) 방문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한 것이었던 만큼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행차였다.

주지하다시피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가 28살 때 뒤주 속에서 처참하게 숨을 거둔 이후 자신이 회갑이 될 때까지, 33년동안 단 한 차례도 남편의 묘소에 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왕실의 법도가 그랬기 때문이다. 또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회갑년이었으므로 정조는 을묘년 화성 행차를 통해 부모님께 효성을 드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었다.




정조가 8일간의 행차를 통해 펼친 일련의 행사들은 단순히 회갑연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겉으로는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는 회갑연이었지만 정조 자신에게는 재위 20년동안 쌓아놓은 위업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신하들과 백성들의 충정을 한데 모아 정치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야심찬 복선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화성을 무대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세력들을 한 데 모아 거대한 행사를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행사는 1년 전부터 계획되고 차근차근 그 계획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성신사에서 서노대 쪽으로 이동하면서 본 '서암문'의 독특한 구조다. 외부에서 성 안으로 직접 들여다 볼 수 없는 구조다. 동행한 문화재답사 전문가 하주성님에 따르면 화성의 암문은 모두 다섯 개가 있는 데,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못하도록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주로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암문은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서 가까이 접근하기 전까지 존재조차 모를 정도라고 한다.

정조는 화성 행차를 위해 한양에서 화성으로 가는 길을 따로 만들었다. 그 길이 지금의 '1번 국도'이며 원래 길은 지금의 남태령 너머 과천과 인덕원을 거쳐가는 '과천길'이었으나, 노량진에서 시흥을 지나 군포와 의왕 등을 거쳐 지지대 고개로 통하는 '시흥길'을 새로 만든 것이다. 1795년 윤2월 9일 아침 묘시(卯時, 새벽 5시~7시), 행렬은 어머니와 두 누이인 청연군주와 천선군주 등만 대동하고 화성(수원)으로 향했다.
 

수원 화성 서장대 앞 모습. 병권을 상징하는 황색깃발과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하주성님.

이때 행차에 참가한 인원은 무려 6000명에 이르렀다. 실로 엄청난 수다. 행렬 중앙에는 혜경궁 홍씨가 탄 가마가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가고, 정조가 타기로 된 가마는 혜경궁 홍씨 앞에 갔다. 그러나 정조는 가마를 타지않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 가마 뒤에서 말을 타고 가면서 쉴 때 마다 혜경궁 홍씨께 미음을 올리며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대략 당시 상황을 '수원행궁의 해설사'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주로 어떤 말씀을..."


"어머니 힘들지 않으세요. 목은 마르지 않으시고요. 힘드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라고 말이죠."

"행차 규모를 보니 행차에 나선 군사들의 불평도 없지않았겠습니다. 또 행차야?!...이렇게요."

"하하...그런 불평도 있었다고 합니다. 왜 없었겠어요..."



이곳이 화성의 총지휘부 서장대(화성장대)의 모습이다. 정조임금이 이곳에서 장용영 등 군사를 지휘한 곳이다. 편액 속의 화성장대라고 쓰여진 글씨는 정조임금의 친필 휘호다.

화성 행궁을 돌아볼 때 약간은 농담삼아 한 질문이었지만, 해설사는 개의치 않고 즐거워 하며 대답해 준 내용 속에서 정조임금의 효심이 하늘을 찌를 듯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세상의 어머니들은 이런 아들 하나 쯤 두고싶지 않을까. 정조 뒤로 두 누이가 탄 가마가 뒤따랐다. 어가가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에 도착하기 몇 리(里) 전 정조는 병조판서 심환지에게 장안문 앞에 장신(將臣)을 대기시켜 군대의 예절을 갖추라고 지시했다. 그와 함께 정조는 장안문에 도착하기 전에 투구를 쓰고 갑옷으로 갈아입었다. 이게 정조의 본심이었을까. 



서장대에서 내려다 본 화성행궁의 모습과 수원시의 오늘날 모습이 비교된다. 정조임금이 꿈꾸던 세상이 이런 모습일까.

이 모습은 정조대왕 자기가 창설한 장용영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황금갑주를 걸치고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들에게 보란듯이 힘으로 경고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조의 이러한 모습은 화성유수 조심태가 장관 이하 군병들을 거느리고 길 옆에 엎드려 어가를 맞이했다. 대단한 위엄과 권위가 느껴진다. 화성에 도착한 다음날인 윤2월 11일, 아침부터 행사가 시작됐다.



맨 처음에 본 화성행궁 모습이다. 정조임금은 화성행차 시 이곳에서 머물렀다. 좌측에 축구골대가 보이는 데 이 학교는 일제강점기 당시 지어진 건물로 화성행궁 터를 잠식해 하루 빨리 복원시켜야 할 숙제를 떠안고 있었다.

화성에 도착한 정조의 첫 행사는 화성향교대성전 참배였다. 정조가 화성에 도착하자마자 향교를 참배한 것은 학문을 사랑한 정조의 유학진흥의 의지를 보여준 것과 다름 없었다. 오늘날 대선 후보가 동작동 국립묘지 또는 광주민주화운동묘역 등 순국선열들의 묘역을 참배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향교 참배를 마친 정조는 진시(辰時, 오전7시~9시)에 별시를 실시했는 데, 실시된 문무과 별시는 화성부 및 인근 지역인 광주와 과천, 시흥 등지 선비들과 무사들을 등용해 주민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배려였다.



카메라 렌즈 화각을 벌려 촬영해 본 화성행궁과 수원시의 모습 속에 드러난 성곽이 뚜렷한 실루엣을 나타내고 있다.

이날 시험 제목은 '근상천천세수부(謹上千千歲壽賦)'였다. 당신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오래 사셨으면 하는 바람을 기원하는 글(賦)을 지으라는 것이다. 특별히 실시된 이날 과거시험에서는 문과 5명과 무과 56명 등이 선발됐다. 무과가 월등히 도드라져 보인다. 특별한 과거시험은 그날 오후 합격자들을 발표했고, 정조가 직접 합격자들에게 '홍패(고려와 조선 시대, 과거의 최종 합격자에게 주던 증서)'를 하사했다.



서장대에서 바라 본 수원 화성의 모습이 도시를 가로질러 아름다운 곡선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뒤로 수원의 젖줄인 광교산이 보인다.

화성에서 둘 째 날, 정조는 이른 새벽(기록에는 '오전 4시 45분 정도'라고 말하고 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현륭원으로 떠났다. 말에서 내린 정조는 걸어서 만년제(萬年堤)를 거쳐 현륭원에 도착했다. 정조는 군복을 벗고 왕실의 예법대로 연한 검푸른색 상복인 참포(黲袍)로 갈아입고 검은 물소 가죽으로 만든 오서대(烏犀帶)를 두른 뒤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의 봉분으로 올라갔다. (기록만 뒤지는 데도 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까.)


수원 화성 소셜러팸투어에 나선 블로거들과 수원시 관계자 등이 서장대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혜경궁 홍씨는 특별히 제작한 유옥교(有屋轎)라고 불리우는 '지붕이 있는 여'를 타고 올라갔다. 그런데 갑자기 전혀 예고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혜경궁 홍씨가 기절한 것이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처음으로 방문한 아버지 묘소에서 울지않기로 다짐(약속)을 받았지만, 어머니가 묘소 곁에 설치한 휘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비통함에 겨워 통곡을 했기 때문이다. 통곡이 비통함을 넘어 도를 지나치고 기절에 이르자 정조는 더 이상 참배를 포기하고 급히 화성행궁으로 환궁했다.


이곳은 서장대 뒷편에 위치한 '서노대'로 대포를 비치해 두었던 곳이다. 보통의 성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포대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부부 사이는 요즘 표현으로 '금슬이 별로'로 알려졌다. 부부 금슬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3년만에 남편의 묘소를 보자마자 당신의 가슴 속 한 쪽에 웅크리고 있던 강력한 '트라우마'가 '빅뱅'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철의 여인'으로 불리운 혜경궁 홍씨였지만, 그 순간 만큼은 한 남편의 지어미에 불과했던 것인 지. 감정에 복받쳐 통곡을 하며 기절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서장대에서 화서문으로 이어지는 성곽 너머로 수원시가 조망된다. 여기서 화서문은 멀지않다.

이런 모습 때문에 정조는 물론 신료들과 백성들이 비통한 오열로 이어지며,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 현륭원 참배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정조는 흔치않은 나들이의 목표를 다잡으며 계획된 8일간의 일정을 소화해 나가고 있었다. 오히려 어머니의 통곡이 그의 계획을 더욱더 강력하고 철저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정조가 화성행차에 나선 궁극적인 목표가 자기를 위한 도피처 내지 당신을 따르는(지지하는) 백성들을 위한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계획 등이었던 지...


볼수록 아름다운 화성의 실루엣이다. 멀리 성곽(좌측으로부터) 북포루와 북서포루 북서적대와 정조임금이 수원행차시 맨 먼저 통과한 장안문이 보인다. 정조임금은 장안문 앞에 당도하기 전에 (정조의 길을 따라)투구를 쓰고 갑옷으로 갈아입으며 장안문을 통과하고 행궁으로 향했다.

정조는 화성행차에 다목적 포석을 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회갑연은 물론 현륭원 참배 외 화성에서 행한 군사훈련 등이 목적에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화성을 축조한 목적이 화성행궁을 보호하는 것이었으며, 정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던 것이다. 즉 화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을 지키는 군사적 힘'이었고 정조는 그것을 반대세력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화성에는 정조가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외영' 군사가 무려 5천 명에 이르렀으며, 대군의 군사훈련은 주간과 야간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됐다.


서장대 앞에 게양된 커다란 황색기는 병권을 상징하는 깃발로 병조판서 등이 이곳에 있을 때 계양하게 된다고 한다. 물론 정조임금이 행차했을 때는 용기(용의 문장이 그려진)를 달았다고 한다.

정조는 투구와 갑옷을 입고 서장대에 올라 군사들의 조련을 지휘했다. 저 멀리 발 아래로 포성 소리와 군사들의 함성 소리가 교차하며  맹렬한 공격과 방어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야간 훈련에는 횃불이 사용됐고 화성 내 백성들은 문 위에 등을 하나씩 달도록 했다. 민관합동군사훈련이었던 셈이다. 이 훈련을 참관했던 정약용은 훗날 '민보의(民堡議)'를 저술했다.
 
정조는 주야간 군사훈련이 끝난 후 수 백명에게 활과 화살 등을 상으로 내렸다. 군사들의 사기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지와 함께 화성과 화성행궁 보호에 문제가 없음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조치였던 것이다. 우리는 정조대왕이 화성 행차에 나서 군사훈련을 지켜보며 군대를 지휘했던 화성장대에서 200여 년 전 정조대왕이 서 있던 그 자리에서 화성행궁을 내려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여기까지 급히 정조임금의 화성 행차에 대해 읽어내려오신 분들이 의아해 하는 부분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정조임금은 부모에게 효심 가득한 아들이었는 지 모르겠지만 아내(또는 마누라 내지 마눌님) 한테는 '빵점'이었다. (왜? 이유가 있었나?...)있더라. 당시 유교 사상에 올인하고 있었던 정조여서  웬만하면 정조는 왕비와 함께 나들이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만물이 숙명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처럼 정조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게 일반인들로부터 회자되고 있는 "정조,...왜...왜 정조는 화성행차에 왕비를 데려가지 않았나 (또는 데려오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었다. 따라서 기록에 드러난 비밀을 들여다 보니, 정조는 물론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겪은 비운과 함께 조선 왕실의 몰인정한 역사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정조가 왕비를 안 데려온 이유이자 조선왕실이 겪고 있었던 암투가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록돼 있었던 것이다. 이랬다.

정조가 8일간의 화성 나들이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그의 비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유교적 예법에 충실했던 정조대왕이었드라면 부모님의 회갑연에 반드시 동참시켰어야 옳은 게 그의 아내 '효의왕후'였다. 따라서 부모님 회갑연에 며느리를 동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불효였다. 그러나 그런 걸 모르는 정조가 아니었다. 정조의 숙명을 읽을 수 있는 게 또한 원행을묘정리의궤였을까.

** 안타깝기 그지없는 정조의 숙명 등은 포스트 마지막에 정리해 두었다. (이쯤에서 우리 귀에 익숙한 '가을의 전설'을 들어가며) 서장대에서 화서문 쪽으로 이동(하산)하며 촬영한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마저 감상해 보시기 바란다.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일부(서장대-화서문.서북공심돈)




서장대에서 화서문 쪽으로 이동하면 맨 먼저 드러나 보이는 게 성곽 바깥으로 드러나 있는 '서이치'다. '치(雉)'란, 꿩을 뜻하는 것으로 자기 몸을 꿩 처럼 잘 숨기는 것과 함께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도록 만든 독특한 건축물이다. 서이치는 서장대와 화서문 사이에 위치해 있고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살피거나 공격하기 위해 건축된 치성이다. 화성에는 서일치,서이치,서삼치,용도서치,동일치,동이치,동삼치,남치,북동치 등 10개의 치(치성)가 있다. 아래는 서이치의 내부 모습이다.




이곳은 서일치의 내부 모습인데 내부에서 외부 성곽 관찰이 용이한 구조로 되어있다.




수원 화성 팸투어에 나선 일행들이 서이치를 지나 서포루로 이동하고 있는 모습이다.




서포루의 모습이다. 외부에서 화성 내부의 군사들을 잘 관찰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게 특징이었다. 수원 화성의 경우 각 루는 벽돌로 지어진 게 독특했다. 대포를 맞아도 끄덕없다는 게 동행한 김홍범님(수원시티넷 운영자 )의 설명이다.




서포루에서 성곽을 따라 내려다 보니 멀리 서일치가 도드라져 보인다. 치는 수원 화성의 특징이자 독특한 멋을 자아내고 있는 모습이다.




서일치에서 견시창으로 내다본 성밖의 모습이 정겹다. 갈 볕이 따사로웠던 이날 소풍 나온 사람들이다.




서일치에서 견시창으로 내다본 서북각루의 모습, 치에서 바라보면 성벽 가까이 접근이 쉽지않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정조임금의 화성행차 시 누군가 이렇게 얼쩡거렸으면 화성을 지키는 장영용 군사들에게 즉각 저지를 당했을 것 같기도 하다.




서일치에서 서북각루로 이동하면서 바라본 서북각루와 바깥 풍경, 한 때 아파트 등 도시의 시설물이 들어선 성 바깥 풍경은 전부 논이나 밭이었다.(맨 아래 자료사진 참조)




서북각루로 이동하면서 뒤로 돌아본 성곽의 모습인데 주말을 맞아 많은 시민들이 이곳을 즐겨찾았다. 멀리 조금전 지나온 서포루가 솔 숲에 가려져 있다. 화성 안쪽을 잘 살펴보면 흙무덤이 성곽을 따라 이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설은 성 밖에서 대포로 공격을 당해도 (성을 떠 받쳐)무너지지 않는 매우 과학적인 축조방식이다. 일행을 안내한 하주성님의 설명이었다.




우리 일행을 향해 하주성님이 '뷰포인트'라고 일러준 서북각루 앞에 다다랐다. 화성을 찾아 1박 2일 투어에 나선 분들이라면 반드시 들러봐야 할 명소가 틀림없었다. 서북각루에서 바라보면 두 개의 보물(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을 만나게 된다.


서북각루에서 바라본 수원 화성





서북각루에 올라 우리가 지나온 성곽을 올려다 봤다. 가까이 서일치가 보이고 멀리 서포루가 보이는 가운데 만추의 억새가 갈 볕을 받아 백발을 반짝이고 있다. 성이 아니라 거대한 조각품을 마주 대하고 있는 듯 하다.




올망졸망한 성벽과 주말 산책을 나선 사람들...정조가 꿈꾸었던 세상의 벽은 그다지 높아보이지 않았다. 상대(적)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소통을 중시한 성곽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다시 뒤로 돌아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쪽을 바라보니 정조의 품성을 닮은 듯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밖에 없는 아름답고 고고하며 출중한 풍모를 지녔다. 어디 하나 가시를 찾아볼 수 없는 미려한 외관에 짜임새 있는 실용적인 성이 화성이었던 것이다.




화성은 널리 알려진 것 처럼 1789년(정조 13) 정조가 친아버지인 사도세자(나중에 '장헌세자'로 고쳐 부름)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읍치소(邑治所)는 물론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로 집단이주시킨 다음 축조하기 시작했다.1794년 2월부터 축조가 시작되어 1796년 9월에 완공되었으며, 둘레는 5,520m이다. 본 포스트에서는 그 중 한 부분만 소개해 드리고 있다.




서북각루에서 바라본 화성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지금은 성 밖에 도시의 빌딩들과 가옥들이 즐비하지만,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200여 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화성은 그 자체만으로 거대한 예술조각품이자, 한양을 능가할 정도의 짜임새 있는 신도시가 수원 화성에 건설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임금은 이곳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는 동시에 한양으로부터 거리를 두며 음모와 술수 등 당파싸움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던 것일까.




서북각루에서 카메라를 '줌인'하여 조금 더 가까이서 본 화서문은 서북공심돈(사진의 좌측 성곽에 솟아있는)과 함께 말 그대로 음과 양의 모습이 어우러진 걸작품이었다. 특히 오늘날 수원시(시장 염태영)의 심벌이 된 서북공심돈을 서북각루에서 바라보니, 화서루가 여성을 상징하는 부드러운 모습이라면 서북공심돈의 모습은 기개 넘치는 남성을 닮은 모습이었다. 서북공심돈(보물 1710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니 이랬다.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측 성벽에서 돌출시켜 남측면의 일부만 성곽에 접하고 나머지 3면이 돌출된 평면을 이루고 있다. 3층 구조로 하부 치성(雉城)은 방형의 석재를 사용하였고 1층과 2층 외벽과 3층 하부는 전돌로 쌓았다. 1, 2층 각 면에는 6개의 총안(銃眼)이 있으며, 3층에는 여장(女墻)을 쌓고 같은 높이에 4개의 총안을 내었다. 3층 포루(鋪樓)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벽면 위쪽의 판문에는 전안(箭眼)이 설치되어 있다.

치성의 북측면과 서측면에는 각 2개소의 현안(懸眼)을 두어 성에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고, 하부는 성벽의 석재를 오목하게 "∪"자형으로 가공하여 상부 전돌 현안과 연결되게 하였다. 수원 서북공심돈의 성제(城制)는 현존 성곽 건축에서는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재료의 유연성과 기능성이 우수하며, 치성의 석재 쌓기 기법과 상부 공심돈의 전돌 축조 기법, 현안과 총안, 전안 등의 중요한 시설 등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조형미를 가지고 있다.<출처: 다음 문화유산>"




화성의 성곽이 너무 아름다워 세로로 길게 촬영해 봤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성곽의 모습에 빠져 일행으로부터 뒤처지고 말았다.




무슨 미련이 있어서 뒤돌아 보고 또 돌아보게 된 것인 지...




그곳에는 무심한 세월을 머리에 인 억새들이 갈 볕을 쇠며 백발을 날리고 있었다.




정조임금이나 당시 이 성을 축조한 조선 사람들이나 군사들도 갈 볕을 쇠며 시름을 덜었을까.





또 언제다시 들르게 될지 모르는 화성의 서북각루는 점점 멀어지며 곧 모습을 드러내게 될 화서문이 궁금했다. 화서문은 서북공심돈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였다. 그렇다면 서북공심돈 곁에 위치한 화서문(보물 403호)은 어떤 특징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일까. <다음 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는 화서문의 정체는 이랬다. 화서문의 특징을 살펴보며 글을 마무리해야 겠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수원화성의 보물 화서문은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옹성이 독특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옹성은 성문을 이중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반달모양의 둥근 선(線)이 너무 아름답다.


숙명으로 마무리된 정조대왕의 '8일간' 화성 나들이

정조가 1년 전부터 준비한 화성행차는 어머니를 위한 행차였으며 정조 자신을 위한 행차였다. 또 이 행차에는 정조의 여동생 청선군주와 청연군주도 참여했다. 정조는 비록 동생인 은언군이 살아있었지만 그가 혜경궁 홍씨의 자식이 아닌 숙빈 임씨의 아들이었기에 화성행차에서는 배제시켰던 것이다. 그만큼 정조는 (자기와)어머니 한 분을 위해 화성의 모든 행차를 준비해 왔다. 그러나 정조의 아내 효의왕후를 안 데려온 건 정조의 할머니 정순왕후 때문이었다. 크나큰 실수였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정적이었던 정조의 할머니 정순왕후였던 것이다. 정순왕후는 권력 때문에 나이 열 다섯에 65세인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와 결혼했던 게 아니었나.




 그 사실을 참조하면 정순왕후는 권력욕 만큼은 대단했다. 따라서 정순왕후는 정조의 어버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데 특별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정조는 할머니 정순왕후가 (손자였던)당신을 독살 시킬 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게 조선의 슬프디 슬픈 역사였다. 그 일은 정조가 자초하고 말았다. 정순왕후의 동생 김귀주가 사사받아 죽임을 당하자 할머니와 손자간의 암투가 결국 손자를 죽음으로 내 몬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 등을 참조하면 정조가 아내 효의왕후를 화성 행차에 안 데려온 이유가 뚜렷해 보인다. 정조는 어머니를 기쁘게 할 목적의 화성행차에 할머니 정순왕후를 데려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며, 효의왕후를 창덕궁에 두고 정순왕후를 보살피게 했던 것이다. 정순왕후의 화를 다스리려는 정조의 수순은 그럴 듯 했다. 하지만 역사는 오히려 그 일 때문에 금슬이 나쁜 것으로 알려진 효의왕후와 정순황후의 심기를 불편하게 건드렸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 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훗날 정조임금의 독살로 이어진 것일까.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아버지(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8일간 버티다가 처참하게 숨져간 비통한 역사를 '화성행차 8일간의 일정'으로 되새기고 잇었다. 또 당신의 아버지 목숨을 앗아간 노론 벽파 등에 대해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나 당신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화성(행궁)은 끝내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왕족 일가의 멸문지화를 이끈 당사자는 정조의 화성행차에서 배제된 그의 아내와 할머니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있었다. 그게 정조대왕이 화성행차에서 남긴 교훈이자 우리가 서장대 앞에서 되새겨 본 효심 가득한 정조대왕의 피치못할 숙명이었다. 


수원화성의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원시의 -어제와 오늘-'에 등재된 귀한 자료사진을 접하게 됐다. 년도가 생략되었지만 대략 해방 전후의 모습처럼 보였는 데,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너머로 전답과 초가지붕을 인 가옥(마을)과 나지막한 산(광교산)들이 그림처럼 펼쳐진 풍경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기록에 따르면 정조임금은 대략 저 마을 앞을 통과 할 때 투구를 쓰고 갑옷으로 옷을 갈아입고 장안문(수원화성 북쪽문)으로 들어선 것 같다.


정조의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살펴보는 동안 글쓴이는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듯 했다. 당시의 사정이 상세하게 기록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통해 수원화성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다시금 되돌아 보는 것이다. 그로부터 대략 200여 년 뒤 대한민국은 대통령을 뽑기 위해 한바탕 몸살(?)을 앓고 있는 모습이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보수세력과 다 썩어 자빠진 정치판을 개혁해 보고자 하는 진보세력이 선의의 정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수원박물관에서 만난 '원행을묘정리의괘'의 주요 내용과 수원행궁에 그려진 정조의 수원 행차도를 더빙해본 그림

 
금번 대선에서 국민들이 눈여겨 보는 대목은, 정치가 과연 특정 세력의 배만 불리지 않고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지 등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정조임금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참조하면 사도세자는 개혁적 세상을 꿈꾼 게 사실이고, 정조가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한 것 같다. 정조가 실시한 탕평책 등 개혁적인 조치가 그런 걸 말해주고 있었다. 보통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국민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화성을 통해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꿈꾼 세상은 아버지를 뒤주에 가둔 노론 벽파와 소론 시파 등의 음모와 술수로 인해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금년의 대선에서 그런 일은 추호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 품고있는 꿈도 정조임금의 꿈과 별로 다르지 않다. 우리 가슴 속에서도 정조가 꿈꾸었던 세상이 그려지고 있고, 그 꿈 속에는 정조가 그러했던 것 처럼 도피처와 안식처를 동시에 품은 보다나은 미래의 모습이었다. 그런 세상이 반드시 속히 도래해 주길 학수고대하며 꽤 긴 글을 끄적이고 있다. 오늘도 우리는 가슴 속에 또다른 화성을 품고 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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