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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최고의 경호받는 태종과 원경왕후 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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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경호받는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쌍릉


사람들은 권력의 정도에 따라 사후에도 경호 차원이 달라지는 것일까. 양력 2011년 1월 3일 오후 3시 30분 경 방문한 인릉의 정자각은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2009년 가을 인헌릉을 찾았을 때는 한창 새단장 중이었는데 어느덧 재작년이 되었다. 세월 참 빠르다. 손장갑을 놓고 와 카메라를 든 손이 시리지만, 잘 단장된 선조님들의 릉을 보니 마음이 상쾌해 지며 돌아가신 어른들을 뵙는 듯 하다.


아무렴 사후 세계에도 권력의 정도에 따라 경호 대접이 달라지겠나만,...


헌.인릉에 들어서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헌인릉 매표소를 통과하면 맨 먼저 인릉의 정자각이 눈에 들어온다. 인릉은 조선 23대 임금인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대략 200년이 더 된 왕릉이다. 기록에 따르면 순조임금은 정조 차남으로 수빈 박씨의 소생이며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정조에게는 수빈 박씨 외 효의왕후 김씨와 의빈 성씨가 있었으나 효의왕후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의빈 성씨에게 문효세자가 있었다. 그러나 문효세자는 일찍 죽어 차남인 순조가 정조 24년(1800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또 같은 해 정조가 승하하자 11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조선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잠 못 드는 권력자들이 늘 눈에 띈다. 11살의 어린 순조가 왕위에 등극하자 마자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영조의 계비)가 을 하였는데 정순왕후 김씨는 당시 벽파의 실세인 김귀주의 누이였다.


이때 부터 벽파정권이 수립되어 세도정치의 막을 열게 된다. 또 이때 부터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 된다. 순조 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 사건이다. 정조 대에 문제가 안된 천주교가 순조 대에 접어들면서 문제가 되면서 이승훈,정약종,이가환 등 신자들이 옥살이를 하거나 귀양을 갔다고 전하고 있다.


아울러 당파에 의한 당쟁시대는 종식되었지만 집권자의 일족이 정권을 독점하는 지긋지긋한 세도정치가 막이 올랐다. 형태는 다르지만 꼭 요즘의 정권 모습을 보는듯 하다. 순조,헌종,철종에 걸쳐 60여 년간의 정권을 독점한 안동 김씨는 정조로 부터 순조를 잘 부탁한다는 유탁을 받은 김조순으로 부터 시작됐다. 아마도 이 시기에 태어나 정권 넘봤던 사람들이라면 평생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을 게 뻔하다. 에고...ㅜ


아무리 선조님들이라고는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 보니 예나 지금이나 정치판에 뛰어들면 다 거기서 거긴 모양일까. 


김조순은 그의 딸을 왕비로 삼는데 성공했다. 아울러 순조가 15세 되던 해 김 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다음 해에 죽자 왕의 외척이 되어 권력을 잡는다. 권력도 잘 잡아야 한다. 능력이 없는 권력자가 나타나면 백성들이 힘이 든다.


순조시대에는 김조순이, 헌종 대에는 그의 아들 김좌근이, 철종 대에는 김병기에게로 넘어가 사회의 부정부패와 백성에 대한 수탈과 핍박으로 나라 꼴이 형편없는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꼭 국민들 보는 앞에서 예산을 날치기 하는 정권이나 무리들 같고 자연산을 외치며 보온병을 들고 국민들에게 씁쓸한 개그를 전하는 사람들 같다. 더군다나 이 때는 투표 조차 할 수 없었으니 돌아서면 얼마나 궁시렁 거렸겠나. 하루라도 빨리 뒈졌으면 좋겠다. 떡 돌리게...궁시렁 궁시렁...하고 말이다.


아무튼 권력자들이 백성들을 함부로 핍박하고 수탈에 나서는 등 권력을 남용하면 꼭 탈이나게 마련이다. 이 때도 그랬다.


형님 예산이나 과메기 예산 등으로 불리는 민폐나 국토을 함부로 절단내는 등 나라돈을 엉뚱하게 사용하거나 꼬불쳐 두면 그 피해 전부는 백성들이 질 텐데 가만히 있겠나. 아마 이 때도 '확 죽여버려야 하지 않겠나' 하고 막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지간 했어야 말이지...^^


그래서 농민들이 총궐기 하기에 이르렀다. 그때가 순조 11년이고 홍경래난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민란이 거세게 불어닥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나라 정치 형국과 비슷한 상황이 이 당시에도 만연하고 있었다. 아 그 때는 테레비도 스마트폰도 없었고 인터넷도없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야...순조 헌종 철종 모두 확 잡아 죽여야 하지않겠나...라는 외침이 전국적으로 들렸을 텐데 트위터가 없었으니 온통 발품을 팔았을 거다. ^^


최고의 경호받는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쌍릉

흠...어느새 인릉을 지나 헌릉에 도착했다. 여전히 손이 시린 가운데 신묘년 첫 휴일 오후 헌릉에는 사람들 몇이 왔다 갔다 했고 단체 관람객 몇몇이 다녀갔다. 역사는 시끌벅적 했지만 헌.인릉은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던 중 어느새 조선의 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곁에 다다랐다.





지난 연말 서울에 폭설이 내릴 때 방문했던 광평대군 묘역에는 태풍에 릉 주변 소나무가 많이도 훼손되었었는데 헌인릉의 소나무들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았다. 이 포스트는 헌릉을 둘러싸고 있는 최고의 경호 모습 등을 끄적이고 있는데 지금 보시는 이 장면이 바로 사후에도 최고의 경호를 받고 있는 장면이다. 사후에도 생전의 경호 팀들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헌릉을 지키고 있는 문인석이나 무인석 등을 잘 관찰해 보시기 바란다. 우리나라 왕릉 중 최고의 석조 공예작품(?)이 어우러진 게 아닌가 싶다.


조선의 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은 두개의 능을 난간석으로 연결한 모습으로 유명하다. 사후에도 마치 손을 잡고 있는듯한 모습일까.


헌릉은 남한에 있는 왕릉 중 유일하게 문인석과 무인석,석양.석호.석마가 다른 왕릉의 두배인 두 쌍씩 설치되어 있다.


위 영상과 아래 그림 등을 잘 참조해 보시기 바란다.


곡장 안의 석호.석양.석물이 모두 16개 다.


특히 릉 뒷편에도 석호 네마리가 바깥을 경계하며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능 주변과 사방이 온통 경호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아래 그림들은 그 장면 모두를 담아 봤다.


헌릉의 혼유석 앞에서 내려다 보면 이런 모습이다. 멀리 홍살문 앞이 가려져 있는 모습이지만 헌릉을 한 바퀴 돌아보면 권력자 남긴 흔적 이상의 예술적 기품이 능침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혼유석 위에 서울에 내린 폭설이 소복히 소박하게 담겨져 있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혼은 기일이 되면 이곳에서 노니는 것일까.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기묘년 1월 3일 오후 햇살을 받은 헌릉은 귀품이 절절 흘렀다.


그리고 태종과 원경왕후를 잇는 난간석을 보니 아직도 두 분이 사랑을 나누는 듯 하다.


능침의 문양을 보라. 마치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이 하늘 저편 까지 이어진듯한 모습 아닌가. ^^


사후 헌릉에서 사랑을 나누다 혼유석에 올라서면 약 200년 전 봤던 대모산 아래 내곡동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어쩌면 태종과 원경왕후는 지긋지긋한 권력 싸움에 넌더리를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차라리 사후에 이생에서 못다한 사랑을 나누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최고의 경호팀을 능침 주변에 배치해 두라고 명하며 눈을 감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이 그러하지 않다면...


사후에 굳이 난간석을 연결하여 손을 맞잡은 듯한 모습을 연출하며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경호팀을 배치해 두었겠나.


헌릉 뒤편에도 이렇게 석호가 바깥을 경계하며 경호를 하고 있는 모습이고,...


좌우편 모두이런 모습으로 릉을 경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혹시라도 물샐틈이 있을까봐. 이렇듯 이중으로(더블) 말이다. ^^


그 한가운데 혼유석이 놓여져 있으니 사후에 나눌 사랑은 더 없이 행복한 모습일까...


무인석이 두른 갑옷의 복식을 보니 둥글게 말아올린 허리춤이 매우 넉넉한 모습이다.


헌인릉에 가 보신분들이라면 더 잘 알겠지만 최고의 경호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릉침 옆으로 아름다운 소나무가 즐비한데 태종이 승하한지 약 6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릉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었던 조선의 민란 등을 태종이나 원경왕후는 애써 모른 채 하거나 아예 등을 돌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선의 시작 부터 정치 싸움의 서곡을 울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태종은 제위 당시 헌릉이 있는 대모산을 찾았다. 서울 근교에 있는 산으로는 비교적 나지막한 해발 293 미터의 산이지만 태종이 찾은 대모산은 육산으로 물이 많아 릉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종이 맑은 샘물이 넉넉한 대모산을 찾은 이유는 궁궐을 뒤로하고 맑은 물 속에 자신의 영혼을 담아 하늘로 승천해 보고자 했던 것일까.


대모산에는 산의 규모에 걸맞지 않은듯 옥수천이나 임록천, 용두천, 구룡천,대두천 등 약수터가 사방에 널려있다.


대모산은 물이 많은 산인데 태종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태종은 제위 중 지관 이양달과 함께 명당을 찾아 나섰다가 바로 이곳에 수릉을 택했다. 바로 이곳이며 이곳에는 최고의 경호팀이 사후에도 경호를 책임지고 있다.


정자각 옆 신도비가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보면 헌인릉이 얼마나 큰 명당인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맨 처음 이 포스트를 열 때 본 인릉의 좌측으로 국가정보원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만 봐도 대단한 경호가 아닌가.


헌릉을 지키는 홍살문의 권위가 절로 느껴지며 안가에 자리잡은 릉이 또한 헌인릉의 모습이다.


태조 이성계는 6명의 부인으로 부터 8남 5녀를 두었다. 왕비인 신의왕후 한씨에게 6남 2녀, 신덕왕후 강씨에게 2남 1녀가 있었다. 신의왕후 한씨에게는 차례대로 진안대군(방우),영안대군(방과),익안대군(방의),정안대군(방원),덕안대군(방연)이 있었다. 태조는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하여 첫째 부인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을 제쳐두고 11세 였던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사랑에 눈이 먼 탓이었을까. 이런 일 때문에 한씨의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등 반대파를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주지하다시피 이 사건을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방원이 거사에 성공하자 하륜,이거이 등 방원의 심복들은 그를 세자에 책봉하려고 했다. 그러나 방원이 극구 사양하고 장남 방우가 이미 죽었으므로 둘째인 방과가 세자에 책봉되니 그가 바로 조선의 2대 정종이다. 다 아시는 이야기지만 헌인릉을 다녀와서 헌릉을 바라보며 포스트를 끄적이니 감회가 새롭다. 정종은 위태위태 했다.


방원의 양보로 인해 방우인 정종이 즉위를 했지만 실세는 방원이었다. 그러다 보니 '가지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넷째 형 방간이 박포 등과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제 2의 왕자의 난'을 일으켰지만 방원에 의해 진압되고 만다. 이 사건으로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고 방원이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가 1400년 11월의 일이었다.


태종은 즉위 직후 사병을 혁파하고 조세제도를 정비하는 등 왕권강회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신문고를 설치하여 백성들과 소통을 중시하는 한편, 1418년 상왕으로 물러갈 때 까지 조선의 안정을 위한 개혁정치를 계속하며 정치적 안정은 물론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고 전하고 있다. But...그러나 태종이라고 다 잘했겠나. 태종은 원경왕후 비롯한 10명의 부인으로 부터 12남 17녀를 두었는데 왕위에 오른 직후 부터 원경왕후와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결국에는 왕비의 동생 민무구 형제가 죽게 된다.


태종이 후궁을 많이 둔 이유에 대해 외척의 권력분산과 왕권강화 목적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왕비의 동생 민무구나 무질 뿐만 아니라 무휼, 무회 형제에게도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만드는 형刑을 내리게 되는데 이러한 일은 모두 집권획책 음모 내지 혐의를 사전에 제거한 모습이라 한다. 태종의 경계심이 극도에 달한 모습이며 권력이 다하여 목숨을 잃을 때 까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어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육조직계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조,예조,호조,병조,형조,공조로 이루어진 육조장관들의 의견이 의정부를 통해 왕에게 전달되는 신권 중심의 관료체재에서 왕에게로 곧장 전달되는 왕권중심의 중앙집권이 강화되어 왕조의 안정을 강화한데 큰 역할을 한 모습이다.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의 헌릉의 모습을 이해하려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글이 꽤 길어졌다.


헌릉을 둘러싼 최고의 경호팀 모습을 보면 왕권중심의 권력의 모습이 보이는 한편, 집안이 왕자의 난 등 만신창이가 되어 한시라도 편할날이 없었을 왕비와 태종이 사후에라도 편하게 지내려고 왕릉을 더블로 경호를 강화한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태종은 1418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4년간 머물다가, 1420년 왕비가 승하하자 이곳에 왕비를 안장했다. 1422년 태종 나이 56세에 왕비 곁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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