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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황학동 '풍물시장' 상인들 겨울이 추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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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학동 '풍물시장' 상인들
겨울이 추운 이유!


지난 토요일 부터 서울에 몰아친 한파는 늘 마주치던 겨울임에도 더 춥게 느껴졌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는데 어느덧 반백이 되어 처음으로 내의를 입었고
오래전에 본 기억속의 황학동 풍물시장을 찾아가는 길이라서 더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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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풍물시장 내에 있는 서울의 근현대사 그림들을 손님들이 보며 추억하고 있다.

서울이나 경기지역에 살면서도
서울나들이를 하면 대부분 고궁이나 피맛골이나 인사동을 찾으며 귀중한 시간을 보냈지만
얼핏 들러본 황학동 풍물시장은 당시의 내겐 큰 매력을 끌지 못했다.
다만, 풍물시장 노점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바라보며 삶을 추억할 수 있는 귀한 자리라 생각했다.

서울의 동묘 주변은 예전부터 서울에서 제일 큰 벼룩시장이 들어섰던 자리고
청계천변 황학동을 중심으로 노점시장이 번성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 시장 이름을 황학동 '벼룩시장' 또는 '황학동 도깨비시장'이라 불렀는데
그 이름도 다양하며 붙인 이름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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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에 내다놓은 물건들 속에서
당시 들끓었던 벼룩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아서 '벼룩시장'이라 칭했고
오래되고 망가진 물건이 감쪽같이 새것으로 둔갑하여 '도깨비시장'이라도 불렀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 노점상인들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개미시장'이라고도 불렀는가 하면
세상 고물은 다 모여서 '고물시장'이라고도 불렀고
이 노점상에 탱크 빼고는 다 있다고 하여 '만물시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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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가 공존하는 서울풍물시장에 노트북이 눈길을 끌었다.

해방이후 6.25동란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이 시장은
서울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박물관 처럼 최근까지 우리 곁에 있었다.

하지만 지난 86년 아시안게임 유치를 시작해서 침체일로에 접어들었고
정부의 해외관광객 유치를 위해서 '장안평 골동품시장'을 시설하면서 이곳의 상인들 대부분을 이주시켰다.

따라서 한때 130여곳의
골동품 가게의 수가 20여개로 대폭 줄어들게 되었고 골동품상권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학동 노점상인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희귀한 물건들을 수집하며 명맥을 유지해 왔는데
또다시 서울의 현대화에 떠밀려 수난을 겪게 되었으며
실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운 노점상이 '황학동 풍물시장'으로 불리운 것도 최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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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사용할 수 있는 오래된 카메라와 영사기들이 풍물시장 곳곳에 널려있다.

지난 토요일, 검색하고 또 물어서 황학동 풍물시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 반경이었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신설역에 내려서 6번 출구로 빠져나간 다음,
금방 눈에 띌 것 같았던 풍물시장은 보이지 않았고 도로곁에 세워둔 이정표를 겨우 찾아
골목길 두어번을 돌자 그곳에 현대식으로 디자인 된 철제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황학동풍물시장의 외관의 미려함으로 인하여 건물을 참 잘지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나의 생각은 이곳 풍물시장의 상인들의 생각과 전혀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취재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 찾아간 상인회 홍보부장(최용규)은
건물이 괜찮다는 나의 말에 표정이 바뀌면서 버럭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건물을 잘 지었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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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풍물시장 조감도...실제모습과 다름없다.

상인회 사무실에는 황학동 도깨비시장이라는 명칭을 잘 말해주듯
 최근의 수난사가 커다란 액자에 담겨져 벽에 걸려있었는데 이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기 직전에
동대문운동장에서 임시로 풍물시장을 열고 있는 모습의 항공사진이었다.

아마도 풍물시장 상인들은 동대문운동장 전체를 불하해 준것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그들은 지난 4월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되면서 새로지은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그때 철거팀과 마찰로 적지않은 불편을 겪은바 있고 그 과정에서 부상자까지 생겼다.

서울의 근현대사가 집약된 풍물시장이 이러저리 옮겨 다니는 동안
그 피해는 고스란히 상인들 몫이었는데 풍물시장에서 삶을 영위해 온 그들에게는
신식 건물조차도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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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문에서 바라 본 서울풍물시장...달이 높이 떠 있는 모습이 황학동을 추억하게 한다.

그들의 삶 속에는 여전히 '구닥다리' 하나를 건져들고 기뻐하는
시민들의 환하고 상기된 표정이 최고의 보람으로 남아있고
 오래되고 낡은 것들에 대한 사랑이 그 누구보다 강했던 것이다.

"...한 시민이 풍물시장 곳곳을 뒤지다가
오래된 사진 한장을 발견하고 감격해 하는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에도 없던 가족사진 한장을 이곳에서 발견한 것이죠."

풍물시장 상인회 홍보부장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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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가수가 된 가수 이미자의 청춘기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서울풍물시장인데
6.25을 겪었을 오래된 철모가 눈길을 끌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너무 빠르게 변해오면서
 잊고사는 것 또한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서울의 현대화 과정에서 밀려난 그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지난 여름이 힘들었고 당장 몰아닥친 금년겨울의 한파를 걱정하고 있었다.

겉으로 미려하고 멀쩡해 보이는 풍물시장은 건물고가 너무 높고 황량해서
바깥의 한파가 그대로 전달되었고 850세대에 달하는 풍물시장 상인들 대부분은 난로를 껴안고 있거나
두꺼운 겨울옷 차림으로 몰려드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발길이 뜸한 가게는 일찌감치 커튼을 내리고 철시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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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풍물시장 내부는 한파속 바깥날씨와 다른 없었다.

약 두시간 동안 풍물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풍물시장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
어느새 나의 맨 손가락은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도저히 추워서 다닐수가 없었다.

한 상인은 "그렇다고 노점상에서 해 왔던 습관처럼
 건물내에서 장작불을 피울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그들에게 풍물시장은 어쩌면 유배지와도 같았던 것일까?

예전 청계천 변 황학동에는 황학들이 살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지명인데
그곳에 터전을 일구며 살던 사람들은 청계천이 재개발 되면서 갈곳을 잃었고
서울시가 청계천의 변모된 모습을 만방에 홍보하고 있는 동안 그들의 자취는 세인들로 부터 잊혀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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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철골구조로 지어진 서울풍물시장은 건물고가 높고 넓은데 비하여 냉온방 시설이 전무하다.

그들의 처절한 모습은 고사하고 현대식으로 단장한 청계천 홍보 열번하는 동안
서울풍물시장을 단 한차례라도 제대로 해 주지 않았다며 불평을 하고 있었는데
개발뒷전에 밀린 힘없는 노점상인들의 겨울은 그래서 더 춥게만 느껴졌다.

서울이 현대화되고 세계화되어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서울이 서울답게 된 이면에는 풍물시장이 한몫 거들었음은 물론이고
4대문 안 관광명소 중에 서울의 근현대 모습을 구경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 이곳이다.

서울시가 개발과정에서 신설동 골목길안 외부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이곳에 그들을 가두었다면(?)
그들을 위한 홍보라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했고
 겨울에 온풍기 하나 제대로 시설해 주지 못한다면 애시당초 그들을 이곳으로 보내서는 아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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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학창시절에는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학년이 바뀌면 정례적으로 실시되던 이 제도는 선생님이 학생들의 가정형편을 헤아리는 제도였는데
학기가 새로 시작되면 선생님이 반장등을 대동하여 학우들 집을 일일이 방문했다.
그때 순서에 따라 방문되는 학우들 집은 난리가 아니었다.

모처럼 귀한 선생님이 집을 방문하는데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부모님들은 호들갑을 떨었고
평소 잘 마시지도 않던 그 비싼 '커피'를 선생님께 대접하는가 하면
언제 준비했는지 가정형편에도 맞지않는 다과가 함께 따라 나왔다.

그런 걸 선생님이 모를리 없지만
누추하면 누추한대로 생활형편이 괜찮으면 괜찮은대로 모습을 보여주었드라면 했고
나는 선생님을 맞이하며 '쪽팔릴' 생각에 한시라도 선생님이 자리를 떳으면 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의외로 엉덩이가 무거우셨다.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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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시장 내 상인들은 건물내에서도 두툼한 겨울차림과 함께 난로를 껴안고 있었다.

황학동 풍물시장은 어느새 '서울 풍물시장'으로 이름표를 바꾸어 달고 있었지만
꽁꽁 언 풍물시장 곳곳을 돌아보며 오래된 LP며 생활도구들을 보면서
 내가 가정방문을 나온 선생님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고 대한민국이나 서울의 현주소를 보고 있는듯 했다.

세계속 대한민국이나 서울을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는 분들을 보면 늘 경외심이 생긴다.
하지만 재개발 등 사업으로 그들의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사라졌다면,  
국가나 지자체는 그들에게 응당한 처우가 되따라야 할 것이나 아쉽게도 우리사회는 그러하지 못하고
가정방문 선생님 때문에 잠시 치워 둔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한 실상을 마냥 덮어 둘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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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시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마땅한 처우를 했다고 항변할 수 있지만
내가 본 황학동 풍물시장은 아니 서울 풍물시장은 그러하지 못했다.

세상의 경제사정이야 다 똑같다고 하지만
지난여름 그들은 바람한점 없는 무더위에 찌들었고 한파속에서 당장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온풍기였으며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려 줄 홍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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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시장 속 먹거리 타운은 한파를 피하기 위해서 비닐로 천막을 했지만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추운 곳이다.

서울 풍물시장에는 볼거리와 살거리와 먹을거리가 넘쳐나고 있었지만
시방,...이명박 전서울시장의 업적인 청계천은 기억하고 있지만
개발에 떠밀려 기억에서 잊혀간 서울풍물시장을 누가 기억하고 있는가?

개발을 할 때 반드시 소외될 사람들을 계획속에서 배제한다면
그건 개발이 아니라 개인과 특정집단에 대한 침탈행위며 폭력으로 지탄받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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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부자되면 더불어 부자되고 쪽팔리면 함께 쪽팔리자.
언제인가 우리는 반드시 세계속 대한민국이 될 것인데 그때 서로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서울 풍물시장을 돌아서는 내 발길도 그들의 형편과 같이 꽁꽁얼어 편하지 않았다.<계속>



베스트 블로거기자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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