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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과 석공들의 얼이 깃든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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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과 석공들의 얼이 깃든 화성
-수원 화성에 빠져들다-



충성심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1박 2일동안 수원 화성을 다녀오면서 떠올린 화두가 석공들의 충성심이었다. 충성심이란 '임금이나 나라에 대해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정성스러운 마음'이라고 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거나 혹은 시켰다 할지라도,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게 하는 임금이나 군주의 덕이 부족하면 부족한 만큼의 충성심이 발현될 건 뻔한 이치다.

예컨데 부덕한 군주나 임금이 도덕을 말하면 백성들이 콧방귀를 뀔 것이며, 덕으로 충만한 군주나 임금은 어디를 가나 당신을 칭송하고 싶어 안달을 하는 백성들로 넘쳐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에 기록되거나 드러난 충성심의 현상이다. 임금이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펼치면 백성들이 평화롭게 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 나라는 특정 임금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부강한 나라가 될 것.

다 아시는 이야기를 서두에 늘어 놓은 건 정조임금의 얼이 깃든 수원 화성의 서삼치와 서남각루를 떠 받치고 있는 석축의 축성 모습을 돌아보면서 느낀점이다. 서노대에서 가까운 서삼치와 서남각루 주변의 성벽 축성 모습이 잉카의 마츄피츄와 우르밤바 계곡에 산재한 고성(古城)을 단박에 떠올릴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된 것이었다.

이같은 모습은 지난해 가을 서장대에서 장안문까지 돌아보며 살핀 축성 모습과 도드라지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수원 화성을 축조한 석공들의 노고와 충성심이 떠오르며 숙연해 지면서 수원 화성에 푹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수원 화성은 석공들의 노고와 충성심의 결정체였다. 그 역사의 현장은 이랬다.




지난 3월 16일 수원역전 근처의 풍경, 지하철공사로 어수선했던 시가지가 차츰 정비되어가고 있었다. 수원시청에 들러 팸투어를 도와줄 문화재답사 전문가인 하주성 기자(블로거 온누리)와 e-수원 편집주간인 김우영님 등 1박 2일 투어에 함께 나설 수원의 SNS팀을 만나게 됐다. 이분들은 지난해 수원시 팸투어를 통해 드러난 가시적인 성과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파워소셜러 팸투어 결과 KBS-2TV의 '1박 2일'을 유치하는 등 대단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것.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공중파의 위력을 실감한 것이지만, 공중파를 통해 정조임금의 얼이 깃든 수원 화성을 소개한 계기를 마련한 게 '블로거'였다니. 뿌듯했다. 이번 투어는 그 결실을 확인도 해 볼겸, 지난해 다 둘러보지 못한 곳과 수원의 명물들을 두루 둘러보게 될 것. 
 



우리가 맨 먼저 이동한 곳은, 수원중앙도서관 뒷산에 세워진 서남각루(화양루) 아래 팔달산 산기슭에 산재한 고인돌을 만나보는 것. 팔달산 기슭에 1000년의 향기가 고스란히 묻혀있었다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다. 서남각루로 가는 작은 오솔길 입구에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자연의 징조는 사람들이 생각하기 나름. 천년의 향기가 샛노란 황금빛으로 당신을 찾은 후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수원 화성의 고인돌




고인돌[支石墓(지석묘), dolmen]은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며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른다. 주지하다시피 한반도는 고인돌의 메카이다.북유럽, 서유럽,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 일대의 신석기시대 묘제로 분포하긴 하나 한반도와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는 고인돌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이다. 고인돌의 역사가 곧 한반도와 만주땅을 터전으로 살아온 한국인의 역사나 다름없을 정도.

고인돌은 크게 나눠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올린 형식과, 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형식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대체로 한반도 중부 이북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후자는 중부 이남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을 각각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이밖에도 지하에 묘실을 만들었으나 남방식 고인돌과는 달리 돌을 괴지 않고 묘실 위에 상석을 바로 올린 고인돌도 있는데, 이를 개석식 혹은 변형 고인돌이라고 한다. 
 



수원 화성의 팔달산 기슭에 위치한 고인돌은 원형이 많이 훼손돼 있었다. 그러나 천년의 향기를 간직한 고인돌 앞에 서 있자니 망자와 선조들의 얼이 단박에 묻어나는 듯 했다. 필자의 눈에 띈 건 이미 도굴되거난 발굴된 청동기 시대의 화살촉이나 부장품들이 아니라, 고인돌 앞에 오롯이 피어난 작은 솔 하나.





천년의 세월을 등지고 피어난 작은 솔 한 그루는 이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바람을 그대로 다 간직했을 법 하다.





비록 지금은 너럭바위처럼 나뒹굴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때 고인돌 위 또는 아래 혹은 사방에서 피워올린 하늘을 향한 제사가 솔 숲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일행들 뒤를 따라 천천히 거닐면서 솔바람으로부터 전해진 것.
 



여행의 참맛은 이런 게 아닌가. 잠시 일상을 벗어나 선조님들의 얼이 깃든 숲 속을 거닐다 보면 우리가 평소 느끼지 못하던 감흥에 젖으며 힐링을 경험하는 것. 팔달산 고인돌이 준 메세지는 간결했다. 천년의 향기는 곧 솔향기며 우리의 역사였다. 그게 작은 솔 한 그루. 우리는 그 솔 숲에서 선조님들의 얼을 찾아 팸투어에 나선 것이다.





고인돌과 석공들의 얼이 깃든 수원화성 채석장




참 신기한 일이었다. 고인돌군(群)은 곧바로 수원 화성을 축조한 데 쓰여진 채석장과 이어져있었다. 고인돌을 지나치자 마자 맨 먼저 눈에 띈 건 수원 화성을 축조할 때 석공들이 돌을 채취한 채석장이었으며, 그곳에는 채석을 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 흔적은 불과 200여 년전 정조임금 당시에 조선의 석공들이 땀흘린 장소였다. 그들은 일일이 쇠망치로 돌을 다듬고 잘라내 수원 화성을 축조한 것이며, 우리 일행이 맨 먼저 만나게 될 서남각루와 서삼치 등 성곽을 쌓는데 사용한 돌들이었다. 




그 흔적은 이런 모습...




또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내려다 보면 이런 모습...솔 숲과 돌들이 한데 어우러져 솔바람을 뒤섞으며 천년의 향기를 만들어 내는 곳. 그곳은 조금 전 고인돌군이 위치한 바로 그 장소였다. 이 곳에서 조선의 석공들이 수원 화성 축조를 위해 돌을 다듬고 나른 것.




그 흔적들이 서남각루로 다가서는 동안 길게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그렇게 신기했단 말인가?...




이곳은 서남각루 바로 아래 위치한 채석장의 한 흔적인데 고인돌군과 길게 연결돼 있는 곳. 조선의 석공들이 이곳에서 돌을 채집하는 동안 고인돌의 석실을 덮고있던 돌이 수원 화성의 축조에 쓰였을 것이라는 게 단박에 유추되지 않는가.
















지천에 널려있었을 고인돌은 어진 임금과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백성들이 힘을 합하자, 곧 수원 화성의 굄돌로 거듭나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석공들의 피땀과 이 땅을 지켜온 선조님들 얼이, 어진 임금이 꿈꾸는 새 세상의 주춧돌과 굄돌이 된 것. 수원 화성 곁에 산재했을 고인돌의 굄돌 등이 수원 화성의 축조에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 굄돌이나 석공들의 땀이 솔향기에 묻어 바람에 날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잘 몰랐다. 그저 그럴 듯한. 하지만 솔 숲을 따라 서남각루를 거쳐 서삼치에 다다르자 e-수원 편집주간인 김우영님이 일행들에게 서삼치와 석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동안 석축을 살피자, 수원 화성은 석공들의 노고와 충성심의 결정체일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선조님들의 얼이 석축 깊이 배여든 게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 그 놀라운 장면들은 이랬다.


수원 화성에 빠져들다
 




서삼치와 서북각루 등을 떠 받치고 있는 오밀조밀한 석축들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오래전 불가사의한 석조건축물로 불리우는 페루의 마츄피츄와 우루밤바 계곡에 산재한 석조물들을 만나면서 정교함과 크기에 놀랐다. 도무지 인간이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던 거석문화가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듯한 골짜기와 산꼭대기에 건축된 것.





그 건축물은 물욕에 어두웠던 '하이렘 빙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잠들어 있었다. 하이렘 빙엄이 이 오래된 놀라운 도시를 흔들어(?) 깨운 것. 공중도시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그 도시는 우루밤바 강을 따라 마츄피츄를 올려다 봐도 보이지 않고 오직 잉카트레일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신비의 도시였다. 그곳에 가면 사람들은 공중도시의 거대한 석조물과 정교함은 물론 안데스의 콘돌 형상을 한 이 도시를 아이나피츄에서 발견하게 된다. 





잉카인들을 한 곳으로 결속시킨 태양의 신과 왕들이 내세를 기원하는 동안 잉카인들은 자나깨나 그곳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린 곳. 그곳은 잉카인들에게 피안의 세계였다. 육신이 살아서 가 봐야 할 곳이 고도 꾸스꼬이자 마츄피츄이며 사후에는 콘돌의 등에 업혀 하늘나라로 가는 것. 그건은 안데스의 띠띠까까 호수 주변 알띠쁠라노에 흩어져 살던 아메리카인디오들의 오랜 숙원이자 꿈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위치한 수원 화성. 화성에는 마츄피츄 만큼 큰 돌이 시공된 걸 볼 수 없다. 또 잉카의 고도 꾸스꼬에 있는 황금의 사원을 떠 받치고 있는 주춧돌 또는 굄돌 만큼 정교하지 않다. 그곳은 얼마나 정교한지 면도날 조차 들어갈 작은 틈이 없을 정도이다. 

사람들은 그걸 신기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원 화성은 그렇게 정교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수원 화성이 그렇게 정교했다면, 석공들의 땀은 피땀으로 변했을 것이며, 피땀으로 만들어진 성곽은 곧 원망을 부르게 될 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게 된다면 힘들게 지은 성이나 권위가 하루아침에 '사상루각'이 될 건 뻔한 이치. 

오히려 약간은 듬성듬성한 축조방법이 석동들은 물론 성곽이 오래토록 버틸 수 있는 숨구멍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속으로 천년의 얼이 깃든 솔바람이 솔솔 드나들며 이 성지를 찾는 후손들을 기분좋게 만들며 감흥케 하고 있는 곳이다. 마츄피츄에는 잉카트레일이 존재했다면 수원화성에는 솔바람이 부는 작은 오솔길이 후손들에게 어서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팔달산 기슭에 위치한 고인돌의 얼과 수원 화성을 수 놓은 석공들의 노고를 일면 언급한 포스트에서 우리 일행이 이동한 거리는 멀지않다. 나지막한 산기슭에서 성곽까지. 천천히 걸어서 30분 정도면 족할 것. 그러나 이곳을 등산하듯 바쁘게 걸으면 아무런 감흥도 없을 것이며 솔바람을 느낄 새도 없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성곽 옆으로 길게 뻗은 오솔길을 앞만 보며 걸으면, 그저 옛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담벼락 정도 외 무슨 감흥이 있을까.

수원 화성의 서남각루와 서삼치 아래 펼쳐진 축성 모습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또다른 소통공간이자 선조님들의 다정한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정감어린 현장이었다. 오밀조밀 요리조리 들락날락 잘 다듬어 쌓아둔 석축들을 보면 정성스러운 마음이 절로 느껴지며, 이곳을 찾은 사람들로부터 오랫동안 기억되게 만드는 묘미가 깃든 것이다. 그런 감흥들이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나 백성들에 대한 애정이 없었으면 가능했겠는가. <계속>
 


베스트 블로거기자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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