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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죽음으로 지킨 신앙 '황사영백서' 쓴 동굴 아세요?



죽음으로 지킨 신앙 '황사영백서'
 동굴 아세요?



충북 제천을 돌아보는 동안 저는 '배론성지'라는 낮선이름을 접했습니다. 언뜻 듣기에도 '배론'이라는 말은 외래어 같아서 잠시 거부감이 들었으나  배론舟論이라는 한자말이었습니다. '주론'이라고도 부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신유박해辛酉迫害의 일은 들었지만 '황사영'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생소했습니다.그도 그럴게 황사영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서울지역의 천주교 전파에 지도적인 역할을 감당하다가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일어나자 충북 제천提川의 배론舟論이라는 토기 굽는 마을로 몸을 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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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백서가 쓰여진 동굴의 모습

그러던 중 박해를 피해 배론에 찾아온 황심黃沁과 함께 조선교회를 구출할 방법을 상의한 끝에,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편지로 적어 도움을 요청하기로 하고
 옥천희玉千禧와 황심이 10월에 떠나는 동지사冬志使 일행에 섞여 편지를 가지고 가려 했는데,



 9월 20일과 26일에 체포되었으며
무언의 약속이 서로 엇갈려서 황사영도 9월 29일 붙잡힘으로써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전해집니다.<자료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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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백서가 놓인 동굴의 모습


저는 황사영백서의 역사에 대해서 '배론성지'의 사무장으로 부터 해설을 전해 들으며
신앙심이란 최소한 황사영과 초대 천주교신자들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과 함께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했나 싶어 고개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로만 듣던 '황사영백서'의 사본(원본은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음)을 보는 순간
또 이들의 행위가 얼마나 치밀한지에 대해서 놀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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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백서(밀서라고도 함)는 길이 62㎝, 넓이 38㎝의 흰 비단에 1만 3,311자를 먹으로 쓴 편지인데
글자 한자가 깨알보다 더 작게 빼곡히 들어 차 있었습니다.
이 백서로 인하여 황사영은 '능지처참'이라는 사지가 잘리는 극형을 당하여 순교를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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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성지에 순례를 온 투어객들이 동굴에 들어가 보고 있다.

황사영백서의 내용을 엿보면 당시 시대상황으로 볼 때 용납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황사영과 초대천주교인들의 죽음은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지금,
 이 땅에 천주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한 밀알로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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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속에는 6~7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황사영백서의 내용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주문모 신부의 처형 등 신유박해의 순교자 내력을 설명한 후
 이번 박해로 천주교가 이 땅에서 멸망할 위기에 처했음을 언급했습니다.

 둘째,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서양의 여러 나라로 하여금 재원財源을 지원해주도록 요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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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이 백서를 쓴 동굴에 비치해 둔 황사영백서 모습

 셋째,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으로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도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거나,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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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학당 터가 있던 곳

 -.서양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에게 호소하여 배 수백 척과 군사 5만~6만 명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국왕으로 하여금 전교사傳敎師를 받아들이거나
조선이 정복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위의 내용 중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황사영의 대책은 충격적인 것이었으므로
조선정부는 관련자들을 처형함은 물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했다고 전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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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보다 더 작은 황사영백서의 모습이다.

깨알같이 쓰여진 황사영백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고 첨부된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당시의 신앙활동은 목숨을 건 행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황사영백서를 한평 남짓한 이 동굴에서 쓰고 그가 그토록 원하던 하늘나라로 간 것입니다.


황사영백서.hwp 전문


四월 보름 후 정부에서는 어영대장(御營大將)에게 명하여 신부를 군문효수(사형한 다음에 보내는 형벌) 하게 하였는데 대장이 병을 핑계하고 사흘동안이나 출근하지 아니하매 사흘 후 그를 파면하고 새로 임명한 대장을 내 보내 사형을 집행하게 하였습니다. 신부를 옥에서 끌어내어 처음으로 형벌을 가해 문초하고 나서(무릎을 서른 번 쳤습니다) 데리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신부는 길가 좌우 구경꾼들을 둘러 보고 목이 마르니 술을 달라 하매 군졸이 술 한잔을 바쳤습니다. 다 마시고 나서 성 밖 남쪽 一O리되는 연무장(강가의 모래밭이요 지명은 노량임)으로 갔습니다. 귀에 화살을 꿴 후 군졸이 죄목이 적힌 판결문을 주어 읽어 보게 하였습니다. 그 조서는 꽤 길었는데 신부는 조용히 다 보고 나서 목을 늘여 칼을 받았습니다. 때는 四월 一九일 성삼첨례 저녁 六시였습니다.


목을 베자 졸지에 큰 바람이 일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 소리가 요란하니 장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황급해 하지 아니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한 교우는 三OO리 밖에서 길을 가고 있었고 또 한 교우는 四OO리밖에 피난해 가서 있었는데 바람과 천둥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필연코 이 날이 이상한 일이 있으리라고 하여 날짜를 기억해 두었는데 그 후에 들으니 신부가 순교한 날이 바로 그 날 그 시였습니다. 머리를 닷새 동안 거리에 달아놓고 밤낮으로 지켜 사람이 근접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중략>


황사영백서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들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신앙의 자유를 너머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타의 신앙을 함부로 이야기 하고 대적해야 할 대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남북분단과 같은 종교적 대립과 갈등을 조장시키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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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배론학당의 모습(당시의 모습이 담긴 이 사진 한장이 유일하다)

황사영과 그의 동역자들이 저 동굴속에서 숨어서 지내면서 목숨을 걸고 지켰던 신앙...
오늘날도 그와 같은 신앙인들이 다수 있으므로 인하여 이땅은 평화롭게 지탱 될 테지요?...

조선정부가 탄압을 가일층 강화할 때,
 황사영백서 중 중국의 감호책이나 종주권행사에 대한 내용을 빼고
서양선박과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멸망시키려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923자로 축소시켜 만든 가백서假帛書를 청나라 예부禮部에 제출했습니다.

황사영백서의 원본은 압수되어 의금부에 보관되었다가 1894년 갑오개혁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당시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손에 들어가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諡福式 때 교황에게 전달되어
 현재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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