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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 山들

무지개터, 우리나라 최고 명당의 전설 맞긴 맞아?

Daum 블로거뉴스
 


우리나라 최고 명당의 전설 맞긴 맞아?
-모산재 '무지개터'에 대한 소고-



영남의 소금강이라 불리우는 모산재 꼭대기에 명당이 있긴 있는 것일까.

Daum view


사람들은 그곳을 '무지개터'라고 불렀다. 무지개터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온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구전에 따르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임금이 태어나고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인근 마을에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치고 백성들이 굶게 된다고 한다. 어느 때인가 누가 여기에 무덤을 썼는데 고을 전체가 오랜 가뭄으로 고달퍼지자, 마을 사람들이 괭이와 삽을 들고 이곳으로 몰려와 무덤을 파헤치니 과연 바로 뒤이어 비가 쏟아지더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따라서 최근에도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고 한다. 최고의 명당자리지만 무덤을 쓸 수 없는 명당터라는 얘기다. 무지개터 바로 앞에는 물웅덩이가 있고, 그 앞에 전망이 활짝 트인 용마(龍馬)바위가 있어 비룡승천(飛龍昇天)의 형국이란다. 조선 제일의 명당자리가 된 이유가 주로 이러하다. 먼저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이라 불리우는 무지개터로 향해 발을 옮겨보기로 한다.





모산재는 합천8경중 제8경에 속하는 유명한 산이라 했다. 


모산재 돛대바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일행들

모산재를 더욱 빛내줄 풍광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깍아지른 기암괴석을 지나오느라 온 몸에 땀이 흠뻑 적었다. 일행들이 (황포)돛대바위로 불리우는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자 발 아래로 멀리 대기저수지를 중심으로 합천의 오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모산재를 품은 황매산은 서부 경남의 최고 오지였으며 황매산 능선 너머 산청군이 자리한 오지중의 오지였다. 그러나 돛대바위에서 내려다 본 가회면은 전혀 오지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모산재는 큰 바위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었고 암릉이 두 팔을 벌린 듯 영암사지를 품에 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 일행이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진 무지개터로 향하는 동안 우리는 모산재의 오른쪽 팔 내지 어께쭉지 위를 걸었다고 해야 할까. 가파른 '천국계단'을 통해 돛대바위에 오르자 모산재 전부가 한 눈에 들어오며 발 아래로 대기저수지와 영암사지 등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졌다. 장관이었다.
 



또 발 아래를 살펴보니 마치 커다란 배암들이 기어다니는 듯한 도로와 누렇게 익어가는 다랭이논의 풍경이 정겹게 펼쳐지고 있었다.




함께 동행한 블로거 김천령님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었는 데, 그는 멀리 발 아래로 보이는 대기저수지 옆 동네를 가리키며 '복치동'이라 일러주며 "예전에는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며 살던 곳"이라고 말했다. 지금 그곳에는 가회면이 자리잡고 있고 대기저수지 옆을 따라 봄이면 사람들이 줄을 지어 황매산 철쭉 삼매경에 빠져드는 대로로 변하고 있는 곳이었다.




일행이 비지땀을 흘리며 잠시 휴식을 취한 돛대바위에 올라서면 가회면이 한 눈에 조망되고 모산재 정상 부근에 위치한 무지개터의 전설이 거짓이 아니란 게 단박에 느껴질 정도다. 이날 하늘은 태풍 산바의 영향으로 찌푸렸는 데 오히려 이 날씨 때문에 산행이 수월했던 것은 물론 긴가민가한 무지개터의 설화를 확인해 볼 절호의 날씨였다.




아마도 오랜 옛날 가회면 등 합천의 오지에 살았던 사람들은 무지개터의 전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 등으로 그 전설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와전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모산재를 돌아 국사봉을 거치며 하산하면서부터 였다. 무지개터에 얽힌 명당의 전설은 영암사지에 들러 완성되었다고나 할까.
 



돛대바위에서 내려다 본 가회면은 커다란 대기저수지를 품고 있었는 데 우리 일행이 서 있었던 모산재에서 바라본 풍경은 '배산임수형'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요즘은 풍수지리를 크게 중시하지 않지만 농경사회에서는 풍수지리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당이 자연스럽게 입에 오르내렸던 것도 그 시기였다.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산업사회가 도래하기 전 까지는 풍수지리설이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명당이란 산 사람에게 유익을 끼칠 뿐만 아니라 망자의 혼백에도 영향을 끼친 '좋은 터'였다. 그래서 너도나도 명당을 찾아 나섰던 것이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 조차 조선의 도읍지를 찾아 팔도를 돌아다니며 장차 도래할 조선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넣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합천의 오지 가회면도 그 후보지에 올랐을 지도 모르는 데 모산재에서 하산하다가 만나게 되는 '국사당'의 흔적이 그걸 말해주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암사지가 일반으로 부터 잊혀지며 땅 속에 묻혀있다가 최근(1984년)에 발굴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영암사지에 얽힌 전설이 전무한 것도 영암사지에 홀로 서 있는 600년 짜리 고목이 지난날의 추억 전부를 간직하고 있었던 지 누구하나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블로거 김천령님은 어른들로 부터 전해지고 있었던 설화 몇을 여전히 기억해 내고 있었다.




돛대바위에서 잠시 발길을 옮기니 최고의 명당 무지개터가 금방 나타났다. 





일행 중 누구인가 말을 해 주지않았다면 무지개터는 그냥 지나칠 뻔 한 장소였다. 그곳에는 싸리나무와 같은 잡목이 억새풀 등과 함께 덮혀있었는 데 이곳이 한국 최고의 명당터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무지개터를 확인해 보는 순간 설화에 대한 의구심이 슬며시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설화는 마치 끝말잇기놀이의 결과 처럼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구심은 곧 현실로 변하고 있었다.




한국 최고의 명당터로 알려진 모산재 무지개터를 다녀가신 분들이 작은 돌탑을 쌓아 놓았다. 돌탑 뒤로 무지개터를 알리는 안내문이 서 있는 데 글쓴이는 무지개터로 접근하다가 두 번이나 미끄러지고 말았다. 한 번 넘어진 발 아래를 살펴보니 그곳은 먼지가 굳어 딷딱해진 것 같은 흙이 습기를 머금고 뺀질뺀질한 모습이었다. 




그곳은 약간 경사가 진 곳이어서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글쓴이는 그곳에서 두 번씩이나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게 됐다. 사람들이 놀려댓다. (명당의 기운이 뻗쳐서 그랬거나 기가 너무 센 결과 그랬다나 뭐라나.ㅜㅜ) 그러나 조심스럽게 합천군 관계자를 따라나선 착한일행(?) 들은 무지개터의 기를 받느라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겼다. 




는 <임현철의 알콩달콩 섬 이야기>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블로거 임현철님이었다. (흠...어때요. 뭔가 느껴지시는 거라도...^^)





당시에는 잘 몰랐다. 그러나 임현철님이 근사하게 가부좌를 튼 무지개터는 한국 최고의 명당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아보였다.(흠...어쩌나...ㅜㅜ) 앞서 언급한 국사당의 전설 때문이었다. 국사당의 전설 속에 무지개터는 명당이 아니라고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음양을 교차해 둔 모산재 정상 모습

그러나 무학대사가 모산재에 들러 가회면을 둘러볼 당시 영암사가 존재하고 있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난을 피해 조선의 도읍지를 선정해 놓은 마당에, 또다른 정적이 태어날 수도 있을 명당이 존재한다는 건 정치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조선 팔도를 손바닥 읽듯 꽤 차고 있었던 무학대사가 이곳을 그냥 지나쳤을 리 만무해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계략이라도 설정해 둬야 마땅했을 것이다.  




모산재가 품은 최고의 명당은 영암사지였을 텐데, 그 사실이 널리 퍼지게 된다면 500년 도읍지로 알려진 조선의 명당이 위협받을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영암사를 불태워버렸을 지도 모르겠다는 발칙한 상상 내지 가설을 세워보는 것이다. 오늘날 모산재가 위치한 곳은 화전민들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살았다고 전해진 서부경남의 오지중에 오지인 가회면이었지만, 시간을 거꾸로 돌려 최소한 조선 건국 시절로 돌려보면 모산재를 올라갈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술수는 간단했다.  



오랜 옛날 가회면에 살던 사람들 한테는, 비가 개인 후 늘 무지개가 걸려있던 장소를 최고의 명당이라고 말해 두기만 하면 된다. 제아무리 황당한 일에 잘 뛰어드는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깍아지른 절벽을 타고 모산재에 올라 무지개를 쫒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 쫒아와 본들 그 자리에 무지개가 걸려있을 리 만무한 것 쯤 무학대사는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그랬다. 

 



온통 암릉으로 구성된 모산재 무지개터에는 무덤을 만들만한 흙이 부족해 보였고, 설령 묘자리를 만들만한 흙이 있다고 한들 배수가 안 돼 백골을 수습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설에 따라 무지개터에 패인 웅덩이를 배산임수의 한 모습으로 간주하는 억지춘향을 빚어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생각해 보시라 맨 몸으로 올라오기도 힘든 모산재 무지개터에 무덤을 파고 (상여없이)주검만 매고 올라오는 일은 도무지 상상불가한 모습 아닌가. 무지개터에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을 다시한번 살펴볼까. 다시 살펴본 구전은 이랬다. 




 "이곳에 무덤을 쓰면 임금이 태어나고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인근 마을에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치고 백성들이 굶게 된다고 한다. 어느 때인가 누가 여기에 무덤을 썼는데 고을 전체가 오랜 가뭄으로 고달퍼지자, 마을 사람들이 괭이와 삽을 들고 이곳으로 몰려와 무덤을 파헤치니 과연 바로 뒤이어 비가 쏟아지더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극히 최근 까지 빨치산들이 숨어들 정도의 오지에 사는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먹거리 걱정이 태산이었을 텐데, 무슨 연유로 이곳에 무덤을 쓸 생각을 할까.   




무학대사의 계략(?)은 맞아떨어지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안 것도, 결국 무지개터를 지나 모산재 정상에 다다른 후 국사당을 거쳐 하산하며 영암사지에 다다랐을 때 겨우 정리된,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진 무지개터의 전설이었다. 글쓴이의 상상력을 자극한 게 최고 명당에서 받은 기운 때문이며 두 번 미끌어지며 터득한 무지개터의 교훈이 아니었는 지.  




깍아지른 절벽 '천국의 계단'을 타고 우리 일행이 지나온 자취가 까마득해 보인다. 모산재 정상에 서면 멀리 대기저수지가 보이고 왼편으로 영암사지가 한 눈에 쏙 들어온다. 그곳에 서면 서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무지개터와 모산재 뒤로 일몰의 서광이 비치면서 청룡과 황룡이 만나는 비경을 만들어 낼 것이다. 나는 조선 최고의 명당자리에 서서 오래토록 시간여행을 하고 있었다. 이게 다 모산재 무지개터에 얽힌 재밌는 설화 때문이었다니. 무학대사의 '무지개터 신공'이 놀랍기만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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