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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 山들

봄이 왔건만 '대모산성' 여전한 돌무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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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왔건만 '대모산성' 여전한 돌무더기!

이틀전 햋볕이 따사롭게 비치는 대모산을 올랐다. 대모산성 터가 있는 곳에는 연두색으로 봄기운이 완연한 한 나무가 볕을 받아 빛나고 있었는데 작은 오솔길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돌무더기가 여전히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대모산성이 언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강남의 수서지역을 지나치다 보면 눈에 띄는 현수막에는 '신라 대모산성' 등에 대한 유적지 훼손을 가져다 줄 개발에 반대하는 이곳 주민들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는데, 이 지역에 들어설 예정인 임대아파트로 인하여 광평대군 묘역 주변에 산재한 유적지가 훼손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다.그리하여 서울시 홈피에 등재된 대모산 관련자료를 살펴보며 우선 대모산성에 대한 서울시 사료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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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산의 위치와 연혁
'대모산 大母山'은 서울특별시청에서 동남으로 13㎞ 지점이자 한강 남쪽 약 5㎞에 위치하여, 강남구 일원동과 서초구 내곡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이 일대는 일원동과 개포동의 남쪽 행정구역 경계선으로 이어진 대모산과 구룡산의 주능선을 따라 산줄기가 동.서축으로 뻗어 있다. 대모산의 북쪽은 양재대로, 남쪽과 서쪽은 헌릉로, 동쪽은 밤고개길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듯한 모습인데, 대모산은 산 모양이 늙은 할미와 같다 하여 할미산 또는 '대고산 大姑山'으로 불리다가, 남쪽 산기슭에 조선 태종의 '헌릉 獻陵'이 자리하면서 어명에 의해 대모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모산에서 서쪽으로 솟아 있는 구룡산은 개포동과 염곡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 산에서 용 아홉 마리가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구룡산의 주봉은 '국수봉國守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봉수군 烽燧軍'이 머물던 동굴이 있었다고 해서 불려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산 다대포에서 올라와 서울 남산의 경봉수에 이어지는 제2봉수의 마지막 봉수대 유지는 오늘날 서울과 성남시의 경계를 이루는 금토동 천천현에서 발굴되었다. 따라서 대모산 일곽에는 봉수대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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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산 기슭은 도로교통이 발달해 있다. 조선시대 이래 한양에서 삼남지방으로 이어지는 삼남대로가 산기슭 서쪽을 지나면서 일찍이 역.원이 발달하였다. 아울러 대모산 남쪽과 동쪽 기슭은 일찍이 왕릉 자리로 주목되어 조선 초기에는 태종의 헌릉과 세종의 '영릉 英陵', 광평대군 묘역, 조선 후기에는 순조의 '인릉 仁陵'이 자리잡게 되었다. 세종의 영릉은 예종 원년(1469)에 여주로 이장되었다.

대모산 북쪽 기슭 양재천과 개포동 일대는 반포리라고 불리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 지석묘가 발견되어 대모산 일대가 일찍부터 수렵과 주거지였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1963년 서울에 편입된 이래 1970,1980년대의 강남지역 개발과 대규모 아파트단지 건립에 따라 청동기유적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대모산은 산기슭과 중턱에 있는 약수터를 찾는 주민들의 운동과 휴식공간으로, 또 청소년 자연학습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또 산기슭에는 농장과 농원이 많이 들어서 있어 서울시민에게 아름다운 화훼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정상에는 서울종합방재센터의 무선통신 송·수신탑이 세워져 있으며 헬기장·체육시설 등이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대모산 정상부에 동서 방향으로 조성된 '테뫼식 산성의 흔적'이 있다. 이 성곽과 인근에 토성이 있었음도 확인되었다. 그런데 산성 진입로가 되는 등산로 옆에는 성곽의 성돌을 이용하여 축조된 예비군 훈련용 참호가 남아 있어 경관을 해침과 동시에 성벽 훼손 현장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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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산의 지형과 지세

대모산은 백두대간에서 한남금북정맥을 거쳐 한남정맥을 따라 올라와 용인 석장산.수원 광교산.청계산.인릉산에 이어져 내곡동고개를 통하여 그 산줄기를 잇고 있으며, 탄천과 양재천이 합류되는 곳에서 한강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솟아오른 산봉우리이다. 따라서 한강 일대를 전망하기에 매우 좋은 곳이다. 북쪽으로 한강에 가까운 삼성동토성, 동북쪽으로 몽촌토성과 풍납리토성, 한강 너머 아차산성과 삼각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표고 293m의 대모산은 구룡산과 더불어 두 봉우리가 낙타의 쌍봉처럼 봉긋하게 솟아 있으며, 양재천과 한강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고, 내곡동 쪽으로 뻗은 '부 副' 능선에 의해 세 방향의 단조로운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들 두 산의 계곡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양재천과 탄천으로 흘러들어 한강으로 합류된다. 대모산과 구룡산은 구릉성 산지로서 그 지질은 주로 선캠브리아기의 경기변성암 복합체에 속하는 호상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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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산성의 성곽 유구와 출토 유물

대모산성에 대한 조선시대 이전의 문헌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대모산성에 대한 기록은 조선총독부에서 1942년 발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헌인릉의 주산인 대모산 정상부에 소형의 '토루지 土壘址'가 있다."고 기록된 것이 처음이다.

이후 1999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서 시굴조사가 있었다. 서울특별시에서 <서울종합방재센터 119시스템 무선통신망기지국(TRS) 장비설치사업>과 관련하여 대모산 정상부에 기지국을 설치하게 되면서 이곳에 대해 한정된 시굴조사를 하게 된 것이다. 이때 일부 구간에서 석축 성벽이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통일신라시대 토기가 출토되어 축조시기를 짐작하게 하였다. 여기서 성벽과 직접 관련이 없는 '점토대토기 粘土帶土器'가 출토되는 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다.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 점토대토기가 출토되는 주거지는 보령 교성리나 대전 보문산유적과 같이 해발 고도가 높은 지역에 있는 것이 특징으로 일종의 고지취락 형태를 취하고 있다. 대모산 경우도 고지에 자리하여 주변에 대한 조망이 탁월한 조건으로 일종의 고지성 취락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어 2002,2003년에 걸친 서울특별시의 성곽조사가 실시되어 1999년에 시굴조사한 내용을 재확인하였다. 전체적으로 성벽의 붕괴가 심하고 흙이 두텁게 덮여 있어 체성이 노출된 곳은 거의 없고, 시굴조사 지점에 석축 성벽만 남아 있다. 성벽의 전체 모습은 붕괴가 심하여 확인할 수 없으나, 시굴조사보고서에서 남벽 길이 258m, 동벽 5m, 북벽 299m, 서벽 5m로 전체 둘레 567m로 추정하였다. 성의 진입로나 문지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는데, 대체로 현재의 등산로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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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형태는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으로 축성방식은 '편축식 片築式'이었다. 성벽은 산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ㄴ'자 형태로 흙을 깎아내고 외부에 돌로 쌓았다. 급히 쌓은 듯 엉성함을 보이며 성벽은 40~100㎝ 할석을 사용하였는데, 3단 정도 남아 있는 상태이다. 성 내부 면적은 약 1,900평 정도로 추정되는데, 동서로 길고 중간 중간에 작은 평탄지가 있다. 특히 남벽 안쪽에 약 200평 정도의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헌.인릉 등 시설지의 철조망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어 접근이 어려운 실정이다. 이 지점에 건물지나 저수시설 등이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보았다.

시굴조사에서 점토대토기 외에 투창이 있는 '단각고배류 短却高杯類'.'대부완 臺付燔'과 연질.경질의 각종 '호 壺'와 '개배류 蓋杯類'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것으로 분류될 수 있는 토기편까지 여러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서울특별시의 지표조사에서도 시기를 알 수 없는 토기편이 약간 수습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인근의 이성산성.호암산성.아차산성 등 삼국·통일신라시대 성곽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준다. 한편 기와는 1점도 채집되지 않았는데, 성 내부에 기와를 올릴 정도의 건물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토기를 통해 볼 때 대모산성은 일단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극히 제한된 시굴조사와 지표조사 만으로 이 성곽의 역사적 성격을 단정할 수는 없다. 특히 백제 도읍지와 가까이 있다는 역사지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성백제 시기의 성곽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백제 유물이 1점도 발견되지 않는 상황에서 축조 시기에 대한 단정적인 결정은 어려운 형편이다. 성곽의 축조 시기와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대모산 아래 대모산 토성이 존재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기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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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산토성

" '대모산토성 大母山土城'은 한성백제의 남서쪽 관방체제로 주목되고 있다. 백제문화연구회에서는 백제 초기 신라와 100년 이상 전투하였고, 근초고왕 이후 한성백제 말기 약 100년간 신라와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하남위례성의 남서쪽 방어선으로 양재천 남북으로 대모산토성·구룡산성·옥녀봉토성(과천시 주암동)과 우면산성(우면산 동쪽 잿골)·삼성동토성(백제 막새기와 출토)이 있었던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동안 대모산 정상에 농성할 목적의 석성만 확인되었을 뿐이나, 이 석성과 연계된 산 전체를 에워싼 거대한 토성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대모산토성은 양재천과 탄천이 어우러지는 두물머리에 위치하여 주변에 2~3개 성을 거느린 '모성 母城'으로 추정하였다. 대모산토성의 크기는 풍납리토성(약 26만㎡)의 2배(50만㎡) 규모이며, 우면산성·구룡산성·옥녀봉토성은 풍납리토성과 비슷한 크기라고 밝혔다.

이 토성은 북쪽 강남구 일원동과 자곡동 쟁골 등지로 연결되며, 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능선을 따라 중산고교-삼성의료원-광평대군묘역으로 이어진 산기슭에 따라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중산고등학교 뒤와 삼성의료원 주차장 뒤에는 토축이 뚜렷이 남아 있고, 이곳에서는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연질 회백색타날토기편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즉 대모산 정상부의 석축 성곽을 중심으로 북·동·서쪽에 토축으로 된 방어시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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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은 동북쪽으로 탄천을 건너자마자 백제고분군이 있는 석촌동과 방이동의 평지가 나타나고 곧바로 몽촌토성과 풍납리토성에 이어 하남시 춘궁동 일대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대모산성 지역이 무너지면 한성백제 도읍지의 중심부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이곳은 한성백제 도성의 남쪽과 서쪽 길목을 동시에 장악할 수 있으며, 왕도와 마주보고 협조할 수 있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 수비성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대모산토성 진입로는 남쪽의 신라와 서쪽의 바다와 한강을 따라 접근하는 고구려·신라 세력을 저지할 수 있는 방어선으로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한편 고구려의 백제 공격은 주로 육로를 통한 것이었지만, 광개토대왕의 침공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해로나 한강을 통해 들어오기도 하였다. 고구려 수군의 상륙지점은 강화도·인천·안산·남양만 일대로 보고 있다. 안산과 남양만으로 상륙한 군사들은 수원·안양을 거쳐 북상하게 되는데, 이 길목에 당항성·군자산성·독산성 등을 비롯하여 최근에 백제시대 유물이 발굴된 의왕시 모락산성이 있다. 모락산성에서 경기도 하남시나 풍납리토성 일대로 가는 길은 우면산성 남쪽과 대모산성 북쪽으로 지나는 길이 최단거리이다. 우면산성은 과천의 넓은 평야지대를 접하고 있으면서 맞은편의 옥녀봉토성을 만들어, 마치 문을 걸어 잠그듯이 성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어 대모산토성과 이성산성으로 이어지는 하남위례성의 방어체제로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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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연구회의 수차례의 현지답사와 조사를 통하여 대모산토성이 있었으며, 하남위례성의 방어체제와 관련됨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나 지표.시굴조사 결과만으로는 아직 그 역사적 성격을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계속적인 조사 연구와 관련 학자들의 진지한 토론을 통하여 축성 시기나 성격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관련자료 http://www.visitseoul.net/visit2006/article/article_view.jsp?seq=3731 >
이상과 같이 서울시 홈피에는 대모산성에 대한 기록 등이 소상하게 전해지고 있지만 아직도 서울시는 대모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나 복원 등에 따른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 지역에 살고있는 주민이나 광평대군파 후손 등이 '신라 대모산성' 등에 대한 유적지 훼손을 가져다 줄 개발계획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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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한강 르네상스'를 외치며 문화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안감힘을 다하고 있다. 이 사업을 위해 '한강 르네상스 8대 실현과제를 선정해 두고 있는데 8대 실현과제 속에는 '한강변 역사유적 연계강화'가 특히 눈에 띈다. 이 프로젝트는 한강변의 역사 유적을 상호연계하고 체험공간 조성을 위해 역사.교육.문화.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밝히고 있지만 8대 실현과제 대부분은 한강변에 새로운 시설을 만드는 것 외에 서울의 역사를 만든 선조들의 혼과 숨결이 담긴 대모산성 복원과 같은 계획은 빠져있는 것이다.
 
한강 르네상스는 우리가 바쁘게 살아오면서 뒤돌아 보지못한 선조들이 남긴 한강변 유적들을 복원하는 노력없이 남의 나라에서 유행하던 문물을 옮겨두는 것에 그치면 서울을 서울답게 만들고 한강의 기적을 다시금 되살리려는 노력은 한낱 사상루각에 지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고도 남는다. 돌무더기로만 남아있는 대모산성을 재발굴하고 복원한다고 해서 당장은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유산들을 외면한채 재개발 등 이익을 남기는 사업에만 매달릴 경우 서울은 문화도시로 거듭나기는 커녕 콘크리트 건물만 가득한 삭막한 신도시로 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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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홈피를 통해서 대모산성을 자세하게 소개한 사실과 아울러 '산성 진입로가 되는 등산로 옆에는 성곽의 성돌을 이용하여 축조된 예비군 훈련용 참호가 남아 있어 경관을 해침과 동시에 성벽 훼손 현장을 볼 수 있다'고 말한바와 같이 대모산성의 존재와 함께 관리의 부실을 잘 알고 있고, 대모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필요'고 언급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대모산성이 축조된 이래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봄은 천번도 더 넘게 이곳 대모산성에서 꽃을 피우고 있지만 후손된 우리가 거들떠 보지도 않으며 외치는 한강 르네상스는 그저 구호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시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서울을 서울답게 만들었던 잊혀진 유적지 등에 대해서 재개발 보다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업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베스트 블로거기자
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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