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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퇴진운동

광우병정부와 물대포에 맞서는 '나의 장비'입니다. 광우병정부와 물대포에 맞서는 '나의 장비'입니다. 누가 삶은 '계란'이라고 말했던가요? 조금전에 계란을 삶았습니다. 촛불시위는 이제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정권퇴진 운동'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평화롭던 촛불집회를 아비규환의 전쟁터를 만들고 있는 이때, 집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얼마나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것인지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우리 시민들은 다 알 것으로 여깁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젊은이 축에 끼지 못하여 에너지가 쉽게 고갈됨을 느꼈는데 촛불집회 주변에는 마땅히 요기를 할 분위기나 장소가 되지 못하여 나름대로 '전투식량'(?)을 챙기던 중 오늘은 계란을 삶았습니다.^^ 촛불시위 현장을 따라다니는 것 만으로도 힘에 부쳐서 비상식량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리고 냉동실에 두통의 생수를 적당.. 더보기
짭새가 된 '잡쇠' 짭새로 보여! 짭새가 된 '잡쇠' 짭새로 보여! 경찰을 은어로 부르는 말이 '짭새'인데, '잡쇠'는 원래는 '도둑을 잡으러 다니는 남자'라는 뜻에서 생겨난 말이다. '잡쇠'가 된소리를 내다 보니 '짭쇠'가 되었고 범죄자들이 경찰을 비아냥 거리며 부르던 소리가 '짭새'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범죄자들로 봐선 경찰이 결코 가까이 하기엔 너무도 먼 당신이었을 것이다. 어제 저녁 6.15촛불집회에서 본 광화문 세종로의 풍경은 다른때 보다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미 6월 20일로 못박아 둔 광우병국민대책회의의 최후통첩에 따라서 그동안 출석을 한 촛불시민들이 잠시 쉬고 있었던 것일까? 일요일인 어제 시청앞에서 속개된 촛불집회는 2만명 정도로 평소보다는 적은 인원이 모였다. 그럼에도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정.. 더보기
광화문에 등장한 '붉은악마' 2002년과 달라! 광화문에 등장한 '붉은악마' 2002년과 달라! 축구를 통해 한민족을 열정으로 결집시킨 붉은악마는 2002년 월드컵 이후 한국사회에 크게 5가지로 영향을 미쳤다. 첫째는 인터넷 동호회 문화의 형성, 둘째는 평화시위 문화의 정착, 셋째는 한국인의 오랜된 고질병인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 넷째는 투명 경영으로 인한 부패 신화 극복이다. 그러나 다섯째는 반대 급부로서의 시위 일변도의 일방소통 문화형성에 기여한 것이다. 붉은 악마가 2002 월드컵 때 보여준 상징과 응원행동은 그 이후 한국 사회의 시위문화와 참여정치 형태의 모델이 되었다. 저자는 붉은악마의 행동방식을 추적하여 붉은악마가 참여정치 행태에 미친 흔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대중스포츠문화운동으로서 붉은 악마의 미래를 전망하였다. 그러나 지난주 광화문 촛.. 더보기
개똥녀 대신한 '촛불전단지' 시사하는 바 크다! 개똥녀 대신한 '촛불전단지' 시사하는 바 크다! '개똥녀'가 얼마나 유명했는지 '위키백과사전'에 등재되어 있고 국어사전에 '명사'라는 품위(?)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다. 알려진대로 개똥녀는 지하철에서 애완견의 변을 치우지 않았다고 추정되는 여자에게 네티즌들이 붙인 별명이다. '다음백과'에서는 개똥녀사건에 대해서 '사건개요'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서울 지하철2호선에 탑승한 한 여성이 데리고 탄 애완견이 갑자기 설사를 했다. 사진 속 주인공은 당황하여 개를 닦았으나, 지하철 바닥에 떨어진 개 배설물은 치우지 않고 다음 정거장인 아현역에서 내렸다. 결국 같은 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바닥에 떨어진 개의 배설물을 치웠다. 이 사건을 지켜본 한 사람이 애완견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는 여성의 .. 더보기
6.10 독립만세 '터' 아세요? 6.10 독립만세 '터' 아세요? 지난주 촛불행진을 따라서 청와대가 바라보이는 동십자각 앞에서 돌아서 종로로 오는 길이었다. 촛불행진의 모습과 달리 평온한 인사동과 종로의 밤거리를 걷다가 단성사 앞에서 보도곁에 서 있는 작은 비석을 보게 되었다. 우연히 눈에 띈 것이지만 평소 같으면 지나치게 될 뻔한 비석이었다. 그 비석에 쓰여있는 '6.10 독립만세 운동 선창터'가 눈길을 끌었다. 6.10 독립만세 운동은 1926년(丙寅年)에 행해져서 '병인 만세운동'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을 뒤적여 보니 역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조선 황제의 국장일을 맞아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과거 3·1운동의 일을 거울삼아 매우 민감하게 경비에 대비하였다. 조선총독부 산하 전경찰과 일본군 5000여명이 경비에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