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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MERICA

그리운 마츄피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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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ka a Machupicchu


보라미랑 함께 가는 南美旅行30

그리운 마츄피츄






















 
전설과 신비로 남은 잉카


3세기 초, 만코까빡이 그의 일족을 끌고 페루의 쿠스코(Cuzco)계곡에 도착했다.
사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직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초대왕 만코까빡에서 8대 비라코차 
그리고 잉카까지 약 200년간은 전통 잉카제국 시대이다.
 외침을 물리치고 쿠스코 계곡을 평정하고 
태양신의 숭배와 농업을 주축으로 하는 잉카제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15세기 중엽, 제9대 빠치쿠치 잉카 유빵끼(Yupanqui)가 왕이 되었다.
 
 그는 태양신의 신전을 건립하고, 우르밤바와 비루가밤바를 정복했다.
 1471년 빠치쿠치가 아들 또빠잉카에게 왕위를 물려줄 무렵 
잉카는 볼리비아에서 칠레에 이르기까지 약 4800킬로미터의 대제국을 거느렸다.
 잉카의 석조건축물은 최고의 수준이며,
 태양신이 최고의 신이었다.
 1525년 와스카르가 12대왕이 되었고,
 이때 왕권다툼으로 허수아비 13대왕이 스페인인들에 의해 추대되었으나 
1533년 11월15일 스페인 정복자 피사로의 쿠스코 입성으로 잉카는 멸망했다.
 
황금을 쫓아서, 그 수탈의 역사


황금을 좇는 모험가들이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온 말이 둘 있다.
 엘도라도(El Dorado)와 파이치치(Paichichi). 
두 가지 다 안데스 산맥 근처 밀림에 있다는 황금의 이상향인데,
 엘도라도는 황금으로 이루어진 도시이고 
파이치치는 막대한 황금이 숨겨져 있다는 곳이다.


16세기 초 중앙아메리카에 처음 발을 디딘 스페인 군인들은
 토박이 인디언으로부터 황금 도시 이야기를 들었다.
 “안데스 산맥 너머 아마존강 유역에 
벽과 지붕을 금으로 씌운 집에서 금으로 치장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 이야기는 온 유럽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유럽 사람들은 너도나도 황금도시를 찾으려고 안데스산맥을 넘었으나
 숱한 사람만 희생되었을 뿐 엘도라도는 말 그대로 이상향으로 남아 있다.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군인 180명을 이끌고 쿠스코를 점령했을 때
 태양의 신전 돌벽에는 황금덩어리가 여기저기 박혀 있었고
 해·달·별의 제단에는 황금이 두껍게 입혀 있었다
.또 황금으로 만든 황제 상(像)이 18개나 되었다고 한다.
 잉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무너졌다.
아타왈파 황제의 근위대 5,000명이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한 짐승(말)과 
천둥소리를 내는 막대기(총)에 놀라 
180명밖에 안되는 스페인 군인과 말 27마리에게 전멸한 것이다.


1531년 11월16일,
 피사로가 스페인 왕의 사절로 왔다고 속이자 아타왈파 황제는 방심하고 그를 만났다.
황제의 근위병들은 무기를 들지 않은 맨손이었다.
스페인 종군 신부가 성경을 건네며 
“여기에 손을 얹고 하나님과 스페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말하자
 황제는 성경을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페인군의 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창기병이 말을 몰고 짓쳐 나왔다.
사로잡힌 아타왈파 황제는
 자기가 갇힌 방을 가득 채울 만큼 황금을 줄 테니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그 방은 높이가 7m,너비가 6m나 되었다.
피사로가 허락하자 두 달 만에 황금 200상자,은 20상자,보석 60상자가 모였다.
피사로는 그것들을 받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가 황제를 불태워 죽이려고 하자 황제는 
기독교도가 되겠다고 애원해 겨우 화형을 면하고 목 졸려 죽었다.
슬픔에 젖은 잉카인들은 분노에 떨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 대부분은 밀림으로 숨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황금을 숨긴 파이치치로 갔다.
1540년 피사로는 파이치치와 대서양쪽으로 나가는 길을 찾으려고 탐험대를 만들었다. 
그는 자기 동생 곤잘로 피사로를 대장으로 삼아 
군인 200명과 원주민 4,000명을 보냈다.
 안데스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나아간 탐험대는
 밀림을 헤매다가 여덟 달 만에 물줄기 하나를 찾았다.
 아마존 상류 나포 강이었다.
 사람과 말이 모두 지치자 피사로는 
오레야나로 하여금 밀림을 정찰하고 먹을 것을 구해 오라고 명령했다.
 오레야나는 병사 70여 명을 이끌고 강을 따라 내려갔다.
 자꾸 가니 큰 강이 나타났다.
지친 몸으로 노를 젓던 오레야나 일행은
 도중에 여자들만으로 된 인디오들을 만났다.
 그 여자들은 밀림 속을 누비며 활을 쏘아댔다.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오레야나는 
그 여자들이야말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구의 끝에 사는 용맹스러운 아마존’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이 강은 아마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레야나는 끝내 대서양까지 나아가 카리브 해에 있는 스페인 땅으로 돌아갔으나
 열여덟 달이나 그를 기다리던 피사로는 지치고 말았다. 
그 사이 원주민들은 뿔뿔이 달아났고,
스페인 군인도 반 넘게 죽어 탐험대는 빈손으로 쿠스코에 돌아갔다.
 그 뒤로 500년이 흐르는 동안 파이치치를 찾아 
안데스산맥 동쪽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은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탐험과 발견의 야만성


엘도라도,파이치치,마노아….
아마존에 이처럼 황금에 관한 전설이 많은 것은,
아마존이 유럽인들에게 수탈당한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
 유럽인들은 신세계에서 온갖 산물(産物)과 보화를 약탈하고,
잉카·아스테카 왕국과 그들의 문명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카리브해에 있는 섬들과 아마존 유역에 사는 인디오들을 
씨를 말릴 정도로 살육했다.
‘황금을 찾아서’라는 가슴 설레는 모험담의 이면에
 ‘탐험’이라는 허울을 씌워 저지른 ‘빼앗음’의 역사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북아메리카 탐험사에서,
가톨릭 수도사를 앞세운 스페인군은 가는 곳마다 십자가를 세우고
 하나님과 국왕을 찬양한 뒤 인디언 마을을 짓밟았다.
그들은 인디언들에게 다짜고짜 하나님을 믿으라고 윽박질렀는데,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불태워 죽였다.
1539년 플로리다에 상륙한 에르난도 데 소토는 인디언들을 겁주려고
 신대륙에 없었던 결핵·천연두·홍역·콜레라를 퍼뜨렸다.
죄없는 인디언들은 영문도 모르고 벌레처럼 죽어갔다.
결국 콜럼버스가 처음 서인도 제도에 상륙했을 때
 100만을 헤아리던 카리브 지역의 인디언은 50년이 지나자 5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아마존강 유역의 인디오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푸투마요강 유역에서는 
1900∼1911년 고무 4000톤을 생산하는 데
 동원된 인디오 가운데 3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근 100년 동안 아마존의 인디오 부족은 무려 90개가 사라져 버렸고,
나머지 20여부족도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한때 500만∼600만을 헤아리던 인디오들은 오늘날 겨우 2만명밖에 남지 않았다.
아마존의 인디언들은 문명 세계와 동떨어져 살아온 덕분에 
인간이 애초에 가졌던 착하고 순박한 마음씨를 그대로 지녀왔다.
 무더위·폭우·맹수·독벌레 등 혹독한 자연 환경에 시달리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생존해온 이들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문명인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스페인의 탐험이 실패로 끝난 뒤로 수백년 동안 잊혀졌던 아마존은
 19세기에 들어서자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브라질 상인들이 밀림에서 황금보다 더 값진 고무나무를 발견하면서부터다.
 방수 신발을 비롯해 고무로 만든 온갖 제품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1888년에
 존 보이드 던롭이라는 사람이 공기 타이어를 만들어 내자 고무값은 30배나 뛰었다.
 화물선들이 아마존강을 거슬러 마나우스항으로 몰려들었고,
고무를 채취하고 배에 싣기 위해 숱한 인디언이 노예로 잡혀 왔다.
몇천명밖에 살지 않던 마나우스항구는
 갑자기 세계에서 제일 부유하고 사치한 사람들이 5만명이나 사는 도시로 바뀌었다.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된 사람들은 이탈리아 대리석과 프랑스 가구를 유럽에서 들여왔고,
비단옷을 유럽의 세탁소로 보냈다.
 고무나무 씨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로 유출되는 바람에
 마나우스의 번영은 30년 만에 끝났다.
 그러나 그 30년 동안에 아마존의 인디언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백인들은 밀림에 고무농장을 세우고 
인간 사냥꾼을 동원해 인디언을 마구 잡아들였다.
 인디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고무나무에서 즙을 받으려고 
날마다 10㎞가 넘게 밀림을 헤매다 죽어갔다.
 백인들은 이들을 채찍으로 갈기거나 며칠씩 나무에 비끄러매어 두었다.
 맹수와 독사가 들끓는 곳에 사람을 묶어둔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짓인가.
 그뿐이 아니었다. 
농장주들은 손님을 초대해 파티를 할 때
 인디언들을 나무에 묶어 표적으로 삼고 총을 쏘면서 즐겼다.
 또 모기약이라고 속여 인디언들의 몸에 석유를 바르게 하고는
 불을 붙여 타죽는 모습을 구경했다. 
 
 마츄피츄에 얽힌 전설
 
마츄피츄는
 1911년 7월 24일 미국의 대학 교수인 하이렘 빙엄에 의헤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 지게됐다.
이 서양 학자에 의해 발견 되기 전까지는 수풀에 묻힌채 
그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마츄피츄를 "잃어버린도시"또는 "공중 도시" 라고 불리는데
 공중도시라고 불리는 이유는 산과 절벽,밀림에 가려 밑에서는 전혀 볼수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존재를 확인할수 있어서이다.
 마츄피츄는 총 면적이 5Km2로 도시 절반 가량이 경사면에 세워져 있고 
유적 주위는 성벽으로 견고하게 둘러 싸여 완전한 요새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마츄피츄(2,280m)는 옛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3,360m)에서 산악 열차를 타고
 안데스 산맥의 협곡을 따라 3시간 거리에 있다.
 
또한 마츄피츄는 산꼭대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산위에서는 계곡이 다 내려다 보이지만 
계곡에서는 어디에서 올려다 보아도 그 존재를 알수없고  접근조차 어렵다.
 마츄피츄에는 약 1만여명이 거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산정과 가파른 경사면에 들어서있어
 스페인 정복자들의 손길이 닿지않은 유일한 잉카의 위대한 유산이다.
 
정확한 건설 연대는 알수없으나
 대략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 태양신전과 생계유지를 위한 산비탈의 계단식 밭, 
훼손됐을 법한 지붕없는 집, 농사를 짓는데 이용한 태양시계, 콘돌 모양의 바위, 
그리고 제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거대한 피라미드로 구성되어있다.
 
이 마츄피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수준 높은 건축기술이라 할수있다. 
커다란 돌을 다듬는 기술이 대단히 정교하며
 다듬어진 돌의 각변의 길이가  몇m나 되고 모양도 제 각각인 돌들을
 정확하게 잘라 붙여서 성벽과 건물을 세웠다. 
종이 한장도 들어갈 틈이없이 단단하고 치밀하게 붙였으며
 젖은 모래를 표면 처리에 이용함으로써 표면을 매끄럽게 했으며 
가파른 산비탈을 개간하여 게단식 밭을 만들고 
여기에 배수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추게 했으며
 모든 이용 시설에 필요한 자재로 돌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이중 하나로 불리는 불후의 유적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있다.
 
1911년 빙엄이 
왕궁과 기타 부속건물을 복원한 뒤로 
1956년 부터 대규모 발굴과 복원이 이루어졌으며
1974년에 일반적인 복원이 마무리 됨으로써 
마츄피츄는 세계에 공개 되었으며 
아메리카 최고의 관광 유산으로 손꼽히는 고대 유적지가 되었다.
 
잉카인들은 통용의 글자와 쇠, 화약,바퀴를 몰랐지만(?)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강한 군대를 유지했다. 
제국은 태평양 연안과 안데스 산맥을 따라 남북을 관통하는
 두갈래 길(잉카로드)를 2만 km나 만들어 광대한 영토를 통제했다.
황제의 명령은 국민 한사람 한사람에게 까지 고루미처 
새 한마리도 황제의 명령없이는 날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잉카인들의 돌다루는 기술은 신기(神技)에 가까웠으며
 그들이 만들고 세운 돌은 20t이나 나가는 엄청난 크기와 무게의 돌을
 바위산에서 잘라내어 수십km 떨어진 산위로 날라다 신전과 집을 지었으며 
면도날도 들어갈 틈이 없이
 석조건축물 구성에 필요한 재주는 남다른데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사용한 가장큰 돌은 
크기가 무려 8.53m 높이에361톤이 나가는 엄청난 큰돌을 
마치 가벼운 물건 다루듯한데서 현대 건축가들도 혀를 내두른다.
 평야가 적었지만  산비탈을 계단처럼 깍아 옥수수를 경작함으로써 
그들은 넉넉히 먹고 살았으며 
철의 대용품으로 구리를 단단하게 제련하여 사용하였는데
 그 방법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렇듯 강성했던 잉카제국은 
겨우 100년여 만에 스페인 군대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졌고
 그들의 패망과 저항에 얽힌 수많은 사연을 집약해주는 최대의 유적이 
바로 안데스 산맥 밀림속 해발 2280m에 자리잡고 있는
 바위산 꼭대기 공중도시 마츄피츄이다.
 
"우리는 비탈에 납작 붙어서
 아래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땅에 손가락을 찔어 꽃은뒤
 미끄러 지지 않도록 한뒤 미끄러운 풀을 헤치면서
 몸을 위쪽으로 끌어 올렸다.
아득한 낭떠러지 저 아래에서는 
우리가 밧줄을 잡고 건너온 우루밤바강의 성난 급류가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안내인은 이 근처에서 
사냥감을 뒤에서 공격하는 페루드란스 독사가 많다고 귀띔을 해주었는데 
밑에는 천길 낭떠러지며 뒤에는 맹독의 독사가 달려든다는 절규처럼
 안내인의 목소리는 신음에 가까웠다."
 
 이 내용은
 미국 예일 대학에서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가르치던
 서른 다섯살난 하이램 빙엄이 
마츄피츄를 발견한 1911년 7월 24일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탐험대는 빙엄과 그의 대학 동료 두사람, 
통역과 안내를 맡은 페루 하사관 1명, 거기에 노새 몇마리.. 
그들은 잉카제국의 마지막 수도였던 빌카밤바를 찾으려고
 들끊는 모기, 지독한 더위,그리고 위험한 급류를 무릅쓰고 
우루밤바 강을따라 페허들을 모조리 조사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들의 일행이 빌카밤바 계곡에서 야영을 할때 
 한 인디언이 나타나 
그들의 바로앞에 깍아 지른듯이 솟아있는 바위산 정상에 
거대한 페허가 있다고 알려 주었으며
  빙엄의 일행은 그 산을 오르는 과정에
 죽음보다 더 두려움을 느낄만큼 소름끼치는 협곡을 기어올라 
마지막 돌로된 관문을 지날때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고 한다.
 
여행기록
 
우리나라에서 마츄피츄를 가기 위해서는 아주 큰 결단이 필요하다.
 돈과 시간, 무엇보다 건강이 전제되어야 한다.
 서울에서 LA까지, 또는 뱅쿠버까지, 또 벵쿠버나 LA에서 페루의 수도 리마(Lima)까지,
 리마에서 국내선으로 페루 제2의 도시 쿠스코(Cusco)까지 가야한다. 
꼬박 이틀 넘게 걸린다. 
쿠스코는 잉카제국의 수도로, 마츄피츄보다 해발고도가 높은 3400m다. 
처음 도착하면 고산병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고 
컨디션 조절이 힘드니 하루 동안 적응하는 것이 좋다. 
 
쿠스코에서 기차로 마츄피츄역까지 가는 데 4시간이 걸린다.
 물론 지겹지 않다. 
오히려 들뜬다. 평생의 소원인 마츄피츄 관광을 위해 
전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열차 안은 시끌벅적. 창밖 풍경은 장관이다.
 험준한 산과 깎아지른 절벽이 양 옆을 에워싸고, 
만년설도 수시로 보인다. 
아마존강을 향해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와 
그 협곡을 따라 트레킹하는 사람들까지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다. 
 
마츄피츄역에 도착하면 ‘마츄피츄 타운’을 만난다.
 이곳에서 또 버스를 탄다.
 꾸불꾸불한 산길을 15분쯤 올라가면 드디어 마츄피츄 입구에 도착. 여기서부터는 도보다.
 계단이 많으니 자신이 없다면 입구에 있는 지팡이를 가져가면 좋다. 
마추픽추는 원주민어로 ‘늙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마츄피츄 입구에서 관광객들은 너도 나도 “우와!” 외친다.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사방을 둘러싼 거대한 산에 압도당한다. 
아래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낭떠러지다. 
산 밑에서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아 ‘공중도시’라고 하고, 
이 때문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마츄피츄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해할 만하다.
<관련자료는 관련 포털사이트나 블로그 등에서 인용하고 재편집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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