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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갤러리/도시락-都市樂

수원 화성의 만추 200배 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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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단풍이 아름다운 역사적 명소
-3편,수원화성의 만추 200배 즐기기-




"...조금 전 나는 두 팔을 커다랗게 벌린 왕의 넉넉한 품에 안겨 

(과거로 떠나는)시간여행을 하고 있었던 것인 지,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따라 거닐며 기분좋은 단꿈에 젖어들었다."


수원 화성의 아름다운 단풍 명소를 소개해 드리는 관련 포스트 2편 끄트머리에 이렇게 끼적거렸다. 수원 화성의 서북각루 아래로 펼쳐진 억새무리가 바람에 날리며 서걱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재아무리 견고한 성이라 할지라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람은 연신 성을 넘나들고 있었다. 수원 화성은 과학적이고 실용적이며 아름답게 건축된 예술품이었는 데 '만추의 포장지'가 화성을 더 아름답고 운치있게 만들며 수원 화성에 얽힌 비하인드스토리로 빠져들게 만드는 것. 





수원 화성의 만추 200배 즐기기


그저 발길 닿는대로 걸음을 옮기면서 화성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만추의 어느날 화성의 역사적 사실 등을 염두에 두고 성곽을 따라 걸으면 즐거움이 200배로 증폭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수원화성의 만추를 즐기는 일반적이자 '나만의 노하우'를 따라 서북각루-화서문-서북공심돈-북포루-북서포루-북서적대-장안문으로 이어지는 환상의 단풍명소를 소개해 드리도록 한다.




수원화성의 서북각루 아래로 펼쳐진 억새밭을 뒤로하고 도착한 곳은 화서문이 저만치 보이는 뷰포인트. 특별한 장치를 하지않고 일반인이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을 조망하기 좋은 장소는 두군데였다. 하나는 서북각루룰 따라 성안에서 화서문을 내려다 보는 뷰포인트와 또 다른 하나는 성바깥에 있는 뷰포인트였다. 만추의 풍경과 잘 어우러진 화서문과 수원의 상징 이미지인 서북공심돈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화성성역의궤에 꼼꼼이 기록된 수원 화성


화서문 위에 올라 성 안을 살피니 장안동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눈에 띈다. 화서문은 수원화성의 서문으로 보물 제403호이며, 문 앞 한쪽이 터진 옹성으로 되어있는 곳. 필자가 서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적군들이 화서문으로 진격해 올 경우 뒤에서 공격할 수 있거나 쉽게 성문으로 접근할 수 없게 만든 게 옹성의 모습.(위 사진 참조) 돌을 다각형으로 다듬어 맞춘 게 눈에 띈다. 화서문에 올라 서북공심돈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따라 걷게 되면 수원화성의 아름다운 성곽이 눈앞에 펼쳐진다.




사진은 서북공심돈 앞 성곽에서 발을 곧추 딛고 서서 촬영한 사진이다. 성곽은 화서문에서부터 장안문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는 모습.




카메라의 앵글을 달리하면 수원화성의 정체(?)가 단박에 드러난다. 수원화성은 높지도 않고 나지막 하지도 않으며 그냥 돌로쌓은 성이 아니라, 성벽의 외축은 돌로 쌓고 내측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꾸는 내탁외축(內托外築)의 축성술이 도입된 것. 




만추의 화성 바깥의 모습은 이러하다.




또 화성 안쪽의 모습은 언급한 바 외축내탁(內托外築)의 축성술이 적용된 게 눈에 띈다. 성밖은 만추의 단풍이 자지러진다. 



그곳에서 다시 화서문 옹성으로 이동해 조금전 지나온 서북각루쪽을 살펴보니 성의 축성술과 함께 아름다운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지하디시피 수원 화성은 
6.25전쟁 때 크게 훼손됐지만,1801년에 간행된 화성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통해 완벽하게 복원되면서,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 것이다. 




특정 건축물에 대한 설계도는 많지만 하나의 도시를 만들고 기록을 세세하게 남긴 건 수원화성이 세계에서 유일한 것으로 참으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따라서 우리 선조님들의 문화유산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자기의 정체성에 목말라있는 사람들에게 보물처럼 다가올 것. 필자가 그랬다. 누가 그랬던가 '여행은 아는 것 만큼 보인다'고...그냥 수박 겉핥기식으로 지나치면 감흥도 덩달아 싱거워질 것이지만, (인터넷을 열어) 관련 키워드를 두르리는 순간부터 화성성역의궤 하나만으로도 뿌듯해 할 것 같다. 



화서문(華西門, 보물 제403호) 화서문은 1795년 화성을 지을 때 함께 세운 화성의 서쪽 문이다. 좌우 성벽에 연결되는 석축에 무지개 모양의 문(홍예문,虹霓門)을 내고 그 위에 단층의 문루를 세웠다. 화서문의 바깥쪽에는 한쪽이 터진 반달형의 옹성(甕城)을 둘렀는데 한 쪽으로 치우치게 통로를 내어 방어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옹성은 안쪽이 2.62m, 바깥쪽이 3.65m, 두께는 3.25m이다. 


옹성은 한 평이 트여 있어 문을 출입할 때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옹성 위에는 안팎으로 낮은 담을 쌓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을 겨냥할 수 있도록 두 종류의 총구를 내고, 벽에는 적을 살펴볼 수 있는 현안(懸眼)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화서문의 문루는 팔달문이나 장안문에 비해 한 등급 낮은 형식으로 지어졌다. 1975년 수원 화성을 중수할 때 보수되었다.



따라서 화성을 구성하고 있는 축조물 하나하나에 깃든 선조님들의 땀냄새는 물론 정조대왕의 야심과 효심이 깃든 수원화성의 나들이 혹은 만추의 모습은 허전했던 가슴 한구석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서북각루-화서문-서북공심돈-북포루-북서포루-북서적대-장안문으로 이어지는 환상의 단풍명소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게 될까. 그 역사적인 현장으로 가 본다.




서북공심돈,수원을 대표하는 시각 상징물


서북각루에서 화서문쪽으로 내려오면 눈에 띄는 건출물이 화서문이며 서북공심돈이다. 위 그림의 좌측에 우뚝 서 있는 건축물이 서북공심돈이며, 수원(시장 염태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시각 상징물로써 수원을 공식 대표하는 심벌의 모티브다. 주로 수원과 관련된 기념품이나 방송의 로고 등에 심벌마크로 표현되는 이 건축물은 수원의 대표선수(?)답게  조형미가 뛰어나다. 만추에 이곳을 방문하면 주변과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화서문이 음적인 형태를 띄었다면 서북공심돈은 양적인 형태로 음양의 조화가 잘 어우러지는 것. 화서문에서 내려와 서북공심돈 앞에 섰다.




*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보물 제1710호) 화서문(華西門) 바로 옆 북치(北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중국 성서(城書)의 제도를 본 떠서 (雉)에다가 (墩)을 설치하였다. 즉 성벽의 일부를 약간 밖으로 돌출시켜 치를 만들고, 그 위에 벽돌을 가지고 3층의 망루를 세우고 망루 꼭대기에는 포사(鋪舍)를 지어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서북공심돈의 높이는 치가 15척(약4.51m), 벽돌로 쌓은 것이 18척(약5.45m)에 망루 꼭대기의 단층 기와 건물까지 하여도 전체 높이는 약13m에 불과하지만, 주변이 넓은 평지인 데다 옆으로는 낮은 성벽이 연이어 있어서 더욱 높아 보인다. 치에는 서쪽과 북쪽 2개 면에 각각 현안(縣眼) 두 구멍을 내었다. 성벽 높이까지는 흙으로 바닥을 채웠으며, 그 위에는 벽돌로 안이 빈 네모난 통 모양의 구조물을 만들어 내부에 3개 층을 구성하였다. 2층과 3층 부분은 마루를 깔았고,사다리를 놓아 위아래로 통하도록 하였다. 



돈대의 외벽에는 총혈(銃穴)을 뚫고, 상층의 벽면 위쪽 판문(板門)마다 각각 전안(箭眼)을 뚫어 놓아 군사들이 밖을 내다보면서 화포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상청판(上廳板)과 하청판의 두 판을 설치하여 누일 경우에는 2층으로 하고 포일 경우에는 3층으로 하여, 층마다 벽돌로 된 면에 불랑기를 쏘아댈 포혈 20개(사방 1척)를 내었다. [화성성역의궤 권수(卷首)] 성곽과 전축 및 누각 모두 200 여 년 전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서북공심돈은 바로 옆에 있는 화서문과 함께, 화성의 독특한 성곽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상징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서북공심돈은 2011년 3월 문화재청으로 부터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710호로 추가 지정되었다.



평지에 우뚝선 서북동심돈은 성 바깥의 풍경과 확연히 구분되지만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위치를 조금 바꾸어 북포루를 한 프레임 속에 넣어보니 수원화성의 빼어난 건축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두 건축물 모두 양적인 형태의 모습이어서 2%가 부족한 느낌. 따라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화서문까지 한 프레임에 넣어보니 아래와 같은 모습이다.





화성성역의궤로 복원된 자랑스러운 인류 문화유산


수원을 대표하는 시각 상징물의 모티브가 확연하게 드러나면서 수원화성의 아름다운 건축미가 한 눈에 조망되는 것. 수원화성이 군사적으로 이용되는 성이라기 보다 거대한 예술품으로 다가오는 게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수원화성이 본래의 모습으로 이같이 우리 곁에 우뚝 설 때까지 적지않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수원 화성의 원형이 가장 많이 파괴됐다. 





당시 수원은 전선의 한복판에 위치해 화성의 정문이자 북문인 장안문의 문루 절반 이상이 폭격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70년대부터 복원되기 시작한 화성은 현재의 모습을 갖추며,인류를 위해 보호해야 할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 화성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결정적 배경에는 화성성역의궤가 있었다.




조선시대 때는 나라에 큰 행사가 있으면 그 내용을 자세히 기록해 책자로 발간했는 데 이를 의궤(儀軌)라 한다. 왕실의 결혼식이나 회갑연 같은 잔치는 물론 장례 절차나 왕릉을 만들 때도 의궤를 제작했다. 또 궁궐의 신축이나 증개축 등에도 의궤가 작성됐다. 의궤는 왕이 직접 보는 어람용 외 지방의 각 사고에 보관하기 위해 보통 6~7부를 만들었는데 특히 어람용은 제본이나 장정을 정성껏 꾸민 것으로 전해진다. 





수원화성의 축조를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는 이런 전통적인 의궤 제작 방식에 따라 화성 축성 공사 전 과정을 기록해서 책자로 꾸민 것. 그런데 화성성역의궤는 필사본으로 기록된 다른 의궤와 달리 금속활자를 이용해 간인된 점이 특이하다. 당시 사용된 활자는 정리자로, 서적 발간에 관심이 컷던 정조대왕의 명으로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화성성역의궤 속에 기록된 내용들


화성성역의궤의 간행은 정조대왕의 활발한 문서 간행의 분위기에 힘입어 이루어졌으며, 화성 축조에 대한 정조의 각별한 관심이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는 정조 사후 1801년에 간행되었으며, 전체 구성은 권수 1권과 본편 6권, 부편 3권 도합 10권 8책으로 되어있다. 각 권수 속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공사 일정과 공사에 감독한 감독관의 인적사항, 그리고 그림을 곁들인 각 건물에 대한 걸명과 자재운반용 기구와 건물의 세부 설명사항이 기록되어있다. 




* 북포루(北鋪樓)는 서북공심돈에 가까운 포루 중 하나로, 장안문과 화서문의 중간쯤에 위치해 거의 일직선으로 있는 북서포루와 함께, 성벽에 다가서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설치한 것이다. 포루(鋪樓)는 성곽을 지키기 위해 돌출시켜 만든 치성(雉城)위에 만든 일종의 대기소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3면의 평평한 여장은 누의 바닥과 이어지며, 각각 포를 쏘는 구멍을 내었고 안쪽에 나무 사다리를 설치했다. 현안이 1개가 있는데 다른 어느 현안보다 훌륭하게 만들었다. 북포루(北鋪樓)는 총구멍이 있어 그곳에서 총과 화살 등을 쏠 수 있도록 했는데, 다른 성들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구조로 알려졌다. 치(雉)에서 좀 더 발전한 형태란다.


나머지 9권은 공사 수행 중에 오간 공문서와 왕의 명령, 상량식이나 고유식 등의 의식, 그리고 공사에 참여한 장인의 이름과 각 건물별로 소요된 자재 수량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 공사 비용의 수입과 지출 내역고 꼼꼼히 수록되어 있다. 화성성역의궤는 기록의 방대함도 놀랍지만 자세하고 치밀한 기록으로 현대의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할 수만 있다면 아니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책임으로부터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오늘날의 공직자 등의 모습과 비교되는 것. 





의궤 내용 중에는 각 건물 별로 들어간 못의 규격과 수량, 당시 못의 단가와 수량은 물론 한 건물을 짓는 데 몇 사람의 장인이 몇 일까지 일했는 지까지 알 수 있도록 기록된 것. 또 공사에 종사한 장인에 대해서도 직종별로 일일이 이름을 기록하고, 편수의 경우에는 출신지와 작업 일수도 밝히고 있다. 의궤의 작성 내용을 보면 공사 내용이 투명하도록 숨기지 못하게 했으며, 공사자들의 책임의식을 높이기 위한 실명제를 도입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만약 화성성역의궤의 존재가 사라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유네스코 조사관도 입 벌어진 화성성역의궤


1975년부터 시작된 화성의 복원 과정에서 화성성역의궤는 절대적인 근거자료였다. 화성성역의궤가 없었다면 성곽의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했을 것. 수원 화성이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도 화성성역의궤 때문이었다. 역사적인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역사성과 예술성도 중요하겠지만, 본래 모습으로 유지.관리되고 있는 지도 중요했던 것. 





특히 파손과 손실된 부분을 복구하고 수리하는 과정에서 적당히 추측해서 새로 만들게 되면, 유산의 실제 모습이 상실돼 치명적인 흠으로 작용하게 된단다. 수원화성이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당시 '정확하게 복원되었는가' 하는 게 관건이었다고 전한다.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유네스코에서 파견돼 화성을 조사한 조사관이 특별히 관심을 가진 부분도 '정확한 복원' 여부였다고 한다. 





그런데 화성 축성 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 때문에 유네스코 조사관은 어떤 결함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정조대왕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화성성역의궤를 본 조사관은 방대하고 상세한 자료에 경탄을 금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말 그대로 완벽한 축성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가 없었다면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그 역사적인 현장에서 만추의 화성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감회가 새롭게 다가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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