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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갤러리/도시락-都市樂

수원화성문화제의 신명난 거리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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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회 수원화성문화제 참관 후기
-제4부,수원화성문화제의 신명난 거리공연-



"정조대왕의 능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지난 12일 폐막된 제51회 수원화성문화제를 구경 오신 분들이다. 정조대왕능행차(연시)가 지나는 정조로는 이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참 많은 분들이 오셨다. 그분들 앞에 볼거리가 생겼다. 그러나 대왕께서 납시려면 적지않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효심깊은 대왕의 용안을 한 번 알현하기란 쉽지않은 일. 정조대왕은 창덕궁을 출발해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에서 잠시 머물며 점심을 드신 후, 저녁 무렵 시흥행궁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는다. 다음 날 능행차 행렬은 수원 화성행궁에 도착하는 데...






8일간의 능행차 기간동안 수원화성은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로 충만했다. 정조대왕의 능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정조대왕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회갑연을 기록한 의궤)'에 따르면, 화성에서의 마지막 날(1795년 윤 2월 13일)에는 '가난한 백성들에세 쌀을 나누어 주고, 노인을 위한 잔치도 열어주었다'고 전한다. 





요즘은 쌀이 남아도는 세상이어서 감흥이 크지않을 지 모르지만, 효심 지극한 왕으로부터 하사된 쌀을 챙긴 가난한 백성들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간다. 백성들과 소통하고 가난한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왕의 존재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것. 조선조의 농경사회에서 농법은 천수답에 의지하여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짓던 세상. 





가뭄이나 태풍이 잦으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은 만신창이가 된다. 따라서 하늘은 백성들의 삶을 좌지우지 하는 신의 영역. 사람들은 해마다 신께 풍년을 기원했다. 그 중 하나가 줄다리기였다. 마을마다 줄다리기를 통해 한 해의 농사가 풍년이 깃들기 바라고 다산을 기원했던 것. 아직 대왕의 능행차 행렬이 당도하지 않은 화성행궁 앞은 발디딜 틈 조차 없다. 잠시 무료한 시간을 위해 화성행궁 앞 정조로에서 왕의 능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거리공연이 펼쳐지는 것.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함께 참여한 줄다리기가 펼쳐졌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제4부,수원화성문화제의 거리공연 줄다리기





줄다리기의 유래


줄다리기를 시작하기 전에 양편의 줄을 마주보게 해놓고 줄고사를 지낸다. 수원 화성행궁 앞 정조로 곁에 임시로 마련된 제단 앞으로 줄고사를 지낼 제주들이 나아가고 있는 모습. 줄다리기를 처음 시작한 시기는 신라시대 이전 상고시대부터 농사의 풍년과 다산을 기원하는 것과 군사훈련의 한 방편으로 행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매년 정월 대보름날 줄다리기를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1900년대 수원화성 일대에는 30여개 두래패가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줄다리기를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줄다리기는 풍요와 다산의 상징 외 마을사람들의 응집력을 드높히는, 놀이문화 이상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마을에 액운이 생기면  감시를 피해 한밤중에 몰래 줄다리기를 행해 왔으며, 이같은 전통은 대략 1987년까지 이어져 온 것. 산업화 시대를 거쳐 디지털 시대로 변해가면서 이같은 전통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이다. 





줄다리기 만드는 방법


줄다리기는 줄의 제작에서부터 시작된다. 큰 줄다리기에서 사용되는 줄은 둘레가 20∼30㎝에서 최대 180㎝로 엄청나다. 길이 30∼40m에서 때로는 300m에 이르는 대형이므로 모든 주민들이 합심하지 않고는 만들 수 없다. 예컨데 경북 문경에서는 정초부터 청소년들이 줄의 굵기를 늘리면서 '애기 줄다리기'를 수 차례 반복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어른들의 일손은 더욱 바빠질 수 밖에 없다. 줄의 재료는 집집마다 방문하여 장만하는 데 이렇게 모든 짚단으로 가닥줄을 꼬고, 여러 가닥의 줄을 다시 묶어서 거대한 몸줄을 만드는 것. 




때로는 소금물을 뿌리면서 매를 때리기도 하고, 수레바퀴에 감아 당기는 등 단단하게 만들어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했다. 이렇게 만든 줄은 사람 몸통보다 굵어 줄을 잡아당길 수는 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잡을 수 있도록 곁가지 형태의 줄을 만드는데, 그 결과 줄은 거대한 지네 모양(위 그림 참조)이 된다. 곁줄은 몸줄의 가닥을 빼는 방식과 별도의 줄을 잡아매는 방식이 있다. 전자의 경우 뒤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반면, 후자는 몸줄의 굵기는 한결같다. 





줄다리기 놀이


줄다리기는 두 줄(암·숫줄) 위에 올라탄 양 쪽 대장의 말싸움에서 이어지는 신경전과 몸싸움을 거친 연후에 결합한다. 이같은 모습을 옛 사람들은 음과 양으로 표현하며 남자와 여자의 짝짓기를 빗댓다. 이날 거리공연 현장에서는 사회자가 '예전에는 줄다리기를 통해 성교육을 했다'고 말할 정도로 농경사회의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 '자식농사'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수원 화성행궁 앞 정조대로에서 펼쳐진 줄다리기는 시민들의 화합의 장이었다. 주최측(수원시)이 멍석을 깔고 시민들이 놀아주는 놀이터라고나 할까.





줄다리기에 얽힌 야시시한 이야기


줄다리기를 할 때 줄을 당기는 두 편을 각각 암줄.숫줄로 정한다. 암줄 즉 여성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도 있다. 이같은 이야기는 풍요와 다산과 밀접한 관계로, 줄다리기를 남녀간의 성행위에 결부시켜 생산의 최종 역할인 여성편에 이점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농경사회의 지신(땅의 신)은 대부분 여신이므로, 여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여자편이 이기게 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단다.


 

 


줄다리기에 쓰이는 줄을 뱀이나 용에 비유하여, 용과 비는 바늘과 실의 관계처럼 밀접한 상호 연관이 있다고 믿기도 했단다. 또 오랜 가뭄 때 기우제의 한 행사로 줄다리기를 벌인 지방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줄다리기에 결부된 민간신앙에 아이를 못 가진 부녀자가 줄을 넘으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전한다. 이 역시 풍요 다산과 관계되어 농사에 필요한 인력의 증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 농경 시대에는 생산물의 풍작 또는 흉작이 백성들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줄다리기(놀이)에 삶의 염원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염원이 놀이문화로 승화되어 수원화성문화제의 거리공연으로 시민들을 즐겁게 만드는 것. 수원화성문화제에서 펼쳐진 줄다리기는 수원시(시장 염태영)와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한바탕 어우러진 놀이마당이었다. 이게 다 조선조 22대 정조대왕의 능행차 때문에 후손들이 누리는 즐거움이라니, 당신께서 베푸신 음덕에 그저 고개 숙일뿐이다. 아울러 줄다리기에 전해오는 비하인드 스토리 몇 개만 더 살펴보고 글을 맺기로 한다.





줄다리기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줄다리기는 우리나라에선 전래 민속놀이의 하나로 대개 정월 대보름에 즐겨 놀았으며, 지방에 따라 5월 단오나 7월 백중(百中-음력 7월 보름에 드는 속절(俗節))에 행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한 마을에서 양편으로 나뉘어 집집마다 볏짚을 모아 새끼줄을 꼬고, 그 줄을 다시 모아 마을사람이 모두 함께 큰 줄을 꼬아 만든다. 줄머리에는 '도래'라는 고리를 만들어 양편의 고리를 연결하고, 그 속에 '비녀목'이라 부르는 통나무를 꽂고, 양편에서 줄을 당긴다. 





줄다리기를 하기 전에 양편의 줄을 마주보게 해놓고 줄고사를 지낸다. 동서 양편으로 나눈 줄을 암줄과 수줄로 구분하며 각 편의 줄패쟁이를 뽑아 대표로 삼고 농악에 맞추어 줄을 당긴다. 보통 암줄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수줄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고 했는데, 지방에 따라 이기는 편이 풍년이 든다고 하기도 한다. 


줄다리기가 끝난 줄은 칼이나 톱으로 베어다가 자기 논에 던져두면 풍년이 든다는 속신도 있고, 또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줄을 삶아먹으면 아기를 낳게 된다고도 한다.(믿거나 말거나...!) 줄다리기의 숫줄의 머리부분(문경에서는 '고딩이땀'이라 한다.)을 암줄 머리부분 사이로 관통하여 '비녀목'을 가로지르게 함으로써, 결합하는 것이다. 소통과 화합의 묘미가 줄다리기에 깃든 것인 데 그 장면을 수원화성문화제를 통해 보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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