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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한강 최초의 '다리' 모습 어떻게 생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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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최초의 '다리' 모습 어떻게 생겼나?


지금으로 부터 200년 전,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강변에서는 보통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펼쳐지고 있었다. 한강줄기 곳곳에서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나루터'라고 생긴 나루터의 배는 모두 강제 징발되어 사람들은 잠시 푸념 투성이였다. 사람들을 한강 이남과 이북을 실어나르던 배가 모두 노량진으로 집결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무슨 영문인지도 몰랐지만 노량진으로 집결된 나룻배들은 '정약용'의 지휘 아래 '배다리'라고 불리우는 '주교 舟橋'로 만들어졌고 그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배다리란, 배와 배를 서로 연결시켜 사람이나 물건을 건널 수 있게 한 다리의 모습인데, 정조 임금이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원陵園을 수원의 화산花山으로 이전한 후 정조의 화성華城 행차가 잦아지면서 한강의 도강이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이에 효과적인 방안으로 강구된 것이 실학자 정약용이 고안한 배와 배를 연결시키고 그 위에 판자를 얹어 다리를 만드는 주교의 가설이었다. 오늘날 한강에 만들어 둔 24개의 다리 모습과 형태는 다르지만 대규모 부대가 임금의 행차에 필요로 한강을 건너기 위한 최초의 다리는 그렇게 배를 여럿 엮어서 만든 부교 형태의 '배다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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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박물관에 있는 '노량주교도섭도 鷺梁舟矯渡涉圖'-노량진 배다리-는 원본을 복제한 그림이다.
 
이 배다리를 만들기 위해서 먼저 이 일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고 준천사濬川司에 부속시켰다. 주교의 가설에는 경강선 80척이 동원되었는데, 동원되는 선박의 경강선주를 모두 주교안舟橋案에 등재하고 대오隊伍를 편성한 다음, 첩문帖文을 주어 세곡운송 등의 특권을 주었다. 위정자는 세곡운송을 구실로 선주들을 주교 가설에 참여시켰고, 선주들은 이를 기회로 세곡운송 용역 이권을 독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주교의 가설은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는데, 다만 이 일에 참여한 경강선주들이 스스로 특권을 지녔다고 생각하고 외방에 나아가서 주교부설에 참가하는 선박舟橋船임을 내세워 위세를 과시하며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출처: 브리태니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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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노량주교도섭도 鷺梁舟矯渡涉圖' 자료 사진
 
나는 서울 예술의 전당 한켠에 있는 '국악박물관'에 있는 '화성능행도병'의 8폭 그림 앞에서 제8폭 그림인 '노량주교도섭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으로 부터 200년전, 정조 임금이 한강을 도강하는 장면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지금의 노량진과 용산을 잇는 배다리의 모습이 도강대열 아래 펼쳐져 마치 처음부터 한강에 다리가 놓여있는 모습처럼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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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잠실에서 본 올림픽대교의 모습은 200년전 배다리 가설시 사용한 공법과 너무도 큰 차이를 보인다.

200년전 모습이 생생하게 담긴 화성능행도병의 '기록화'에는 1795년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章獻世子와 생모 혜경궁惠慶宮 홍씨의 동년 회갑을 맞이하여 사도세자의 현륭원顯隆園이 있는 화성華城;水原으로 혜경궁을 모시고 행차한 뒤 성대한 잔치를 열면서 거행했던 일련의 행사들을 8폭에 담은 것이다. 이 그림은 조선시대의 행사 기록화 중에서 가장 풍부한 내용으로 화려하고 장대하게 묘사한 뛰어난 작품으로써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정조대의 난만한 회화 발달이 어울어져 만들어진 걸작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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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박물관에 있는 배다리 모습을 줌인한 그림, 건너편에 보이는 '용양봉저정 龍驤鳳翥亭' 행궁앞에 두 군주의 가마가 보인다.

나는 그림속에서 걸음걸이 속도로 느리게 이동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모습을 통하여 불과 200년전 한강과 오늘날 한강 곳곳에 만들어 놓은 24개의 한강다리들을 보며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실감하는 동시에 화성능행도병 속 주인공인 정조 임금이 지금도 살아 있는듯 잠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배다리가 있는 그림의 화성능행도병은 정조 임금이 한강을 도강할 당시 행차의 마지막 날인 '윤 2월 16일'이라 전하고 있고 노량진 주교를 건너며 서울로 행궁하는 행렬장면을 용산쪽에서 바라보고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종적인 배다리 설계를 전하고 있는 '주교절목'에는 노량주교도섭도를 상세하게 전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최종적인 '배다리' 설계  

1,「주교절목」『원행을묘정리의궤』(권4, 주교)에 의하면 다리를 연결하는 들어간 교배선橋俳船은 36척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한강의 실제 너비가 190파였던 까닭이다.   1파는 지척指尺으로 6척인데, 지척 1척은 대략 29.5센티미터 정도로 계산된다. 따라서 배다리의 실제길이는 대략 330~340 미터로 생각된다. 현재 한강철교 부근의 강폭이 거의 1킬로미터에 이르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당시의 강폭이 좁았음을 알 수 있다. 계절이 비가 적은 2월인데다 강바닥이 높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2, 강가에 선창을 설치 할 때, 나무를 쓰는 대신 주변의 잡석(雜石)을 모아 배와 같은 높이로 쌓고
석회(石灰)를 발라 항구적인 선창을 만들고, 그리고 여기에 큰 못을 박아 밧줄을 맬 수 있게 함.  

  3, 배와 배를 연결할 때, 먼저 배를 상류를 향하여 닻을 내리게 하고, 배와 배를 연결하는 삼판杉板 견아상제(犬牙相制, 개 이빨처럼 서로 물리게 함) 형태로 연결하여 배가 흔들리지 않게 하고 남북의 선창에 가까이 있는 항선項船의 머리와 꼬리 부분을 묶어서 안상岸上에 있는 못에 연결 그 다음에 막대기縱深와 버팀목을 연결 다음에 횡판橫板을 깔고 그리고 난간欄干과 조교弔橋와 홍살문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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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그림속 하얀 점들은 국악박물관 유리창 속에 든 그림 촬영시 생긴 조명등이 비친 모습일 뿐입니다.
 

  4, 횡판을 깔 때에는 판자가 맞닿는 곳에 드러나지 않게 못을 박고, 아래쪽에는 견마철牽馬鐵을 박았으며, 판자의 양끝에는 구멍을 뚫어 삼줄을 꿰어 좌우의 세로 막대기에 묶었다.


 5, 선창船倉과 항선項船을 연결하는 도로는 조교弔橋 형태를 취하도록 하여 조수潮水가  드나들어 수면이 변동하더라도 안전하게 함 .


 6, 다리의 양끝과 다리의 중간부분에 세 개의 홍살문을 건설, 양끝의 홍살문은 다리의 시작과 끝을 시각적으로 드러나게 하고, 중앙의 홍살문은 강심에 있는 가장 큰 배에 세웠는데 이 곳이  강심이며, 강심은 모든 다리건설의 표준지점이 되기 때문임.  원행을묘정리의궤 』에 의하면 최종적으로 배다리 건설에 소요되는 물자는 교배선 橋俳 36척, 난간欄干이 240척, 홍살문이 3개, 배다리 좌우에 있는 위호선衛護船이 12척 임.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최장(1,140m) 반포대교 교량분수 시연회 모습과 배다리를 비교해 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위 배다리 그림 속 노량진 쪽 '용양봉저정 龍驤鳳翥亭'은 지금도 남아있고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6호'로 지정(서울 동작구 초롱길 8-1, 본동사무소 뒤쪽에 있고  정조 15년(1791년)에 지어진 노량진행궁의 중심 건물.)되어 있다.그림속 노량주교도섭도에는 용산쪽 '한강진나루'와 노량진나루를 연결하는 배다리(주교)를 통해 정조대왕의 행차가 한강을 건너고 있는 모습인데, 정조임금은 잠시 용양봉저정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지금의 수원으로 행차를 계속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배다리 가운데 있는 홍살문을 통과한 정조임금 뒤로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가마가 뒤를 따르고 있는 모습이다.그림뒤로 노량진 행궁鷺梁津行宮이 보이는데, 이곳은 정조임금이 능행을 다녀올 때 한강을 건너거나 건너기 전 휴식하는 장소였으며 노량진 행궁의 가장 뒤쪽에 장막이 쳐진 중심 건물이 바로 용양봉저정이다.

 화성능행도병의 제7폭 '시흥환어행렬도 始興還御行列圖' 자료사진, 임금의 행차 주변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위 주교절목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정조 임금의 제위시절인 약 200년전 한강의 모습은 오늘날의 한강모습과 사뭇 다르고 배다리와 같은 모습은 상시 시설해 둔 다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언급한 바와같이 왕의 능행때 배다리를 만들기 위해서 동원된 경강선( 조선시대 한강을 무대로 한 운수·상업 활동에 사용된 선박.) 때문에 민원이 다발했고 관에 의해서 징발된 경강선은 이권과 특권을 동시에 누리려는 무리들 때문에 민폐를 끼쳤다고 전하는데 이런 모습은 오늘날 한강 등지에 다리 등을 건설하면서 생기는 불협화음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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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박물관에 있는 복제 그림을 시흥환어행렬도 속 모습과 비교해 봤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 정조임금이 제위하던 시절에는 당파싸움이 한창이던 때 였고, 조선조의 사색당파는 남인,북인,노론,소론을 말하는데 북인은 광해군 이후 거의 사라지고 노론이 '여당'이 되어 소수의 남인과 소론의 당파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던 때 였다. 숙종때 까지는 당파싸움의 최후 심판자는 왕이였으나 경종때부터는 왕이 당파에 소속이 됨으로 말미암아 임금도 숙청의 대상이 되는 형편에 처하여 이들 반대당파를 지지한 정조임금의 '독살 의혹'이 여기서 나오게된 것이다. (기회가 닿으면 '정조 독살설'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포스팅 하고 싶다.)이렇듯 선정을 펼치고 있던 정조임금 제위 시절에도 배다리와 같은 가설교를 만들어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는데, 200년도 더 지난 오늘날 1천만 이상의 시민이 살고있는 대한민국 수도서울의 모습은 인구의 숫자와 비례한 만큼 배가된 불협화음들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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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촬영한 가양대교 모습을 보니 '배다리' 모습이 그립기도 하다.
현재 한강변은 서울시에 의해 대대적으로 정비되고 있고 수변공원으로 조성하는 등 친환경 생태녹지로 바꾸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에 만들어 둔 24개의 다리(서울시계)와 함께 급속하게 변하고 있는 한강변의 모습은, 정조임금이 배다리를 건너 느릿느릿 능행하던 때와 달리 강남북을 도강하는 시간은 고작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시대로 바뀌었다. 한강 줄기에 있던 나루터는 모두 다리로 대체되는 한편, 수많은 경강선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정조임금 생전에 배다리가 가설되던 한강진과 노량진에는 한강에서 제일먼저 만들어진 '한강철교'가 들어서면서 배다리는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한편, 20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예술의 전당 곁 국악박물관에 전시된 화성능행도병의 8폭 기록화를 들여다 보며 '노량주교도섭도' 속으로 잠시 빠져든 것이다. 



베스트 블로거기자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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